잊혀진 죽음과 기억의 젠더정치

김미선

  • 게시일2023.12.26
  • 최종수정일2023.12.26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는 전쟁에 대한 여성의 피해 경험 자체와 더불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젠더 규범 속에서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랜 세월 묻혀있어야 했던 사실에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웹진 〈결〉은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노근리 사건을 통해 전쟁으로 희생되었으나 가시화되지 못한 여성들의 죽음을 살펴보며 기억의 젠더정치 문제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이었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한·미 정부에 의해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며 한국 사회에 알려졌고, 2004년 ‘노근리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되는 등 노근리 사건의 기억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0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감독 이상우)이 개봉하며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대중적으로도 조명받게 되었다.

노근리 사건을 재현한 영화 〈작은 연못〉(이상우, 2010) ⓒ(유)노근리프로덕션

 

하지만 영화를 비롯한 진상규명 등 노근리 사건에 관한 역사화는 젠더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근리 사건의 희생자 중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달한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기록과 역사화가 대부분 남성 피해생존자와 유족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와 같은 피해의 불균형과 그 맥락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위험 상황에 취약한 아이나 노인은 그렇다 치지만 왜 여성들의 희생이 많았던 것일까.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은 한 여성 피해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굴 안에 있으믄 다 죽는다. 남자들이라도 뒷산으로 (가서) 피하자고. 그래 가지고 아버지, 오빠들. 뒷산이 있잖아요? 옛날에는 흰옷을 입으면 밤에도 허옇게 보이잖아. 그러니까 옷을 벗고 뒷산으로 피해가지고.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오빠들은 거기서(노근리 다리) 그렇게 피해가지고 살았잖아.”

폭격으로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 남자들이 먼저 탈출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미군의 소개령에 의해 피난을 떠난 4일 동안 노근리 쌍굴다리 안에 갇혀 있던 남성들은 미군의 총격을 피해 이웃 마을인 도동리로 탈출했다. 부계 중심의 가족 질서 안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남성의 목숨과 안전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피난을 떠난 남성들도 적지 않다. 

반면, 여성들은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어린 자녀와 늙은 시부모를 보살펴야 했다. 이것이 학살 현장에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사망한 여성들이 많았던 이유이다. 또 여성들은 쌍굴다리에서 도망을 치더라도 낯선 남성들에 의한 강간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홀로 피난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처럼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성별분업, 그리고 젠더 규범은 한국전쟁기 피난의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충북 영동군 노근리 다리 사건 현장 ⓒ김미선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충북 영동군 노근리 다리 사건 현장 ⓒ김미선

 

이처럼 노근리 사건에서 여성, 특히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노인의 사망이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측면이 가시화되거나 논의되지 않은 것일까? 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노근리 사건 피해생존자들이 어머니의 사망으로 초래된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과 연관된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남은 가족을 위해 생계는 물론 가사노동과 돌봄 역할을 떠맡기도 했지만, 자녀들을 방치하거나 자녀, 특히 딸로부터 돌봄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혼의 딸들은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 오빠, 남동생 등 남성 가족구성원들의 식사와 빨래를 도맡아 하고 농사일을 도왔다. 반면 아들들은 학업을 지속하거나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얻었다. 

아내를 잃은 남편/아버지들은 가족의 위기를 재혼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재혼으로 다시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은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남성의 가장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행위였다. 이들과 결혼한 여성은 가사 및 돌봄 노동, 나아가 생계노동을 담당하며 사망한 여성의 성역할을 대체했고, 특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는 동안 노근리 사건으로 사망한 여성의 죽음은 잊혀갔다. 노근리 사건으로 재혼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안민혁(가명) 씨는 제삿날마다 집안이 시끄러웠다고 기억한다. 재혼한 어머니는 조부모와 삼촌 그리고 ‘큰어머니’의 제사를 함께 준비했는데, 아버지가 ‘왜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냐’며 큰어머니의 제삿밥을 내동댕이치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또 전영희(가명) 씨는 재혼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혼가정에서 태어난 배다른 동생들이 아버지의 무덤 옆에 노근리 사건에서 죽은 ‘전처’가 아닌 자신들의 친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망한 아내/어머니의 성역할이 딸에 의해, 혹은 남편/아버지와 재혼한 다른 여성에 의해 대리·대체되면서 그 존재는 점차 망각되었다. 그 결과 노근리 사건에서 사망한 여성,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애도될 수 없는 전쟁 피해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며 어머니를 ‘기억’하는 딸 ⓒ백정미

 

그러나 노근리 사건에 의한 어머니의 죽음은 피해생존자의 자녀들, 특히 딸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딸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긴다. 전쟁이 끝난 후 사망한 어머니의 성역할을 대신하며 자란 데다 결혼 후 자신이 어머니가 되면서 어릴 적 어머니의 부재를 더욱 큰 상실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이오사변 때문에 내 인생이 망친 거지, 한마디로. 내가 엄마하고 살았으면 공부도 하고 그랬을 텐데. 그게 한이 되지. 딴 게 한이 된 거 아니여. (…) 누가 엄마라고 부르면 그렇게 부럽더라고, 엄마. 엄마가 최고여. 아버지는 아무 소용도 없어. 어쨌든 남자는 헛일이야.”(정영희(가명))

이런 모습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거나,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들의 삶을 별개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은 아들들의 경우와 대비된다. 성역할과 젠더 규범으로 인해 전쟁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성별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전쟁의 피해이자 가족 수난의 상징으로 여겨진 남성의 죽음과 달리, 가족의 돌봄을 책임져 온 여성의 죽음은 애도조차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서 여성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전후 어떻게 잊혀 갔는지 살펴보는 것은 전쟁 기억의 젠더정치를 밝히는 중요한 작업이다. 한국전쟁기 노근리 사건에 의한 여성의 죽음의 맥락과 망각의 과정이 문제시될 때, 남성-아들을 넘어 여성-딸 역시 노근리 사건의 역사화 과정에서 공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김미선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학술연구교수. 전쟁과 냉전, 젠더, 평화, 경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을 키워드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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