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물으며 오랫동안 소송투쟁을 벌여왔다. 거듭되는 패배 속에서도 지난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길에 이금주라는 한 여성이 있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으로 광주천인소송 등 다양한 강제동원 관련 소송을 이끌었던 이금주. 그녀의 일생을 담은 책 『어디에도 없는 나라』[1]를 통해 역사의 정의를 위해 싸운 한 여성의 불굴의 삶을 들여다 본다.
명분과 신념이 확고해도 계속 지기만 할 때, 우리는 지친다.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분과 비탄의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멋있지만, 그 말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거듭되는 패배를 겪으면서 자포자기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정의와 원칙의 기준이 모호해질 때마다 명분을 지키며 끝까지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게 된다.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이하 이금주로 표기)의 평전을 읽으며 명분 있는 패배를 끝내 명분 있는 승리로 이끌어낸 한 여성의 투지에 큰 용기를 얻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금주가 69세부터 102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1920년에 태어나 2021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 이금주는 69세 되던 해인 1988년에 태평양전쟁희생자 전국유족회를 발족하고 광주유족회 회장을 맡게 된다. 1942년에 이금주의 남편은 일본 해군 군속으로 남태평양 타라와섬에 강제 동원되었고, 이듬해인 1943년에 사망했다. 해방 후 교사로 근무하며 성당에서 프란체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금주는 69세부터 운동가의 삶을 걸었다. 그는 마치 싸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라도 한 것처럼 유족회를 빈틈없이 운영했다. 교사 시절, 그리고 성당의 행정 업무를 맡아보던 시절부터 이금주는 “기록의 달인”이었다. 일기는 물론이고, 이사회 내용 및 지출명세서 등을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특히,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모두 받아 적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료들이 축적되자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93년에 1,273명의 원고가 일본 전범 기업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원고인단은 일본 사법부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다. 원고가 천 명이 넘는다고 해서 ‘광주천인소송’[2]으로 불렸다고 한다. 원고 수가 천 명이 넘는 만큼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다.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재판이 빨리 진행되지 않자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하지만 이금주의 태도는 완강했다. “우리 1,100명의 재판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올 2월 17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기까지 꼭 11개월 걸렸습니다. 그동안 무지에서 나오는 모략과 질투, 명예 훼손 등은 어처구니가 없고 구역질이 났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목적지만을 바로 보고 백절불굴의 의지와 강한 결심으로써 다른 지부에서 안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금주는 회원 가입 신청, 소장 작성, 위임장 작성, 소득증명 서류 작성 등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했고, 재판이 지연되는 상황을 회원들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1994년 3월에 첫 공판이 열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5년에 이금주는 또다시 회원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할 것입니다. ‘텔레비전 보니까 안 줄 것 같다’, ‘언제 끝날 것인가, 너무 지루하다’, ‘속았다. 포기하자’ 등등입니다. 우리 대답은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하자’는 것입니다. 줄 것 같으면 왜 우리가 싸울 것입니까? 이 재판이 지방재판소에서 끝나면 고등재판소로 가고, 고등재판소에서 끝나면 일본최고재판소까지 가서 투쟁한다고 하시오. 일본 변호단은 우리 1,100명이 인지대도 내지 않고 무료 재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싸우고 있는데, 우리 원고 피해자들이 재판 걸어놓고 물러서거나 포기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시키시오.” 이금주는 처음부터 이 싸움이 얼마나 험난할지 잘 알고 있었다.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한다”는 말 속에 이금주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어려운 싸움일수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 싸움은 한판 승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금주의 말은 옳았다.
도쿄지방재판소는 1998년에 광주천인소송을 기각했고, 1999년에는 BC급 포로감시원 소송[3]을 기각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금주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을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제기했고, 아사히(朝日)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며 일본 여론에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 사법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1999년에 일본 도쿄고등재판소는 광주천인소송 항소에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금주는 2000년에 일본최고재판소에 상고했지만, 광주천인소송 상고는 각하되었다.
연이은 패소에도 이금주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을 상대로 일곱 건의 소송을 치르며 열일곱 번 기각당했다. 긴 세월 이금주와 피해자들이 겪은 좌절과 패배의 고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금주는 소송을 처음 제기하면서 동지들에게 외쳤던 “계속 투쟁하자”는 그 말 한마디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운동가였다. 2012년 피해자들이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때도 피해자들을 도우며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목적지만을” 보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최종 승소 판결 소식을 들었을 때 이금주는 99세였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의 작가는 “열일곱 번 문을 두드려 열일곱 번 기각당하는 그 고단하고 외로운 싸움이 없었다면, 과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할 수 있었을까?”라는 말로 이금주의 투쟁을 승리의 역사로 기록했다.
더불어 이금주가 “온기 없는 냉방에서 새벽부터 온종일 붙잡고 씨름해 작성한 각종 기록물”의 가치를 역설했다. 광주유족회를 운영하며 이금주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직접 작성한 노트들과 발품을 팔아 모은 관련 자료들이 현재 보존 장소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평전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이금주가 남긴 역사적 자료들이 더 이상 외면당해서는 안 된다. 즉각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각주
- ^ 송경자 지음, (사) 일제강제동원시민 모임 엮음, 선인, 2023
- ^ 1992년 2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제 당시 노무자·군무원으로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과 근로정신대 및 징병 희생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대규모 집단소송.
- ^ 일제 말기 동남아시아에 강제 동원되어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전후 행해진 연합국 전범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그 전범 피해자와 유족들이 1995년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대신하여 전범으로 처벌받은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미지급한 임금의 지급 등을 요구하였다.
- 글쓴이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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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여성, 정치를 하다』, 『변신하는 여자들-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등이 있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