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닿지 못한, 그러나 확보해야 할 전쟁 경험의 말‘들’: 베트남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 이후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글 심아정피스모모평화페미니즘연구소/아카이브평화기억
다시,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의미를 소환하며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존자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0년 4월 21일이었다. 3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의 지난한 변론을 거쳐,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 7일,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의 ‘불법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재판부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전에 지났다는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2015년부터 현지답사와 공부 모임을 시작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의 몇몇 변호사들은 2017년에 관련 소송을 위한 TF를 꾸렸고, 그 과정에서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모델로 한, 가해국의 수도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민간법정이었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못해도, 가해국의 구성원들이 꾸린 법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이 ‘가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과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에는 퐁니와 하미 두 마을에서 ‘응우엔티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피해 생존자가 각각 증언대에 올랐다.
그 후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이 퐁니 마을 응우엔티탄의 원고 대리인단이 되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여느 운동들처럼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 또한 사법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적 차원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잘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운동을 안온한 자리로, 응원의 자리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민평화법정 활동의 연속체적 성격을 가지고 변호사, 활동가, 연구자, 평화단체가 모여 ‘베트남전쟁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를 꾸렸고, 지금까지도 정보공개 청구, 청원서 제출, 국가배상소송,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진정, 특별법 발의, 판결문 번역 그리고 각종 공론장 기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민네트워크는 대표도, 직인도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나 국가 간 관계와는 다른 층위에서 20여 년간 국경을 넘나들며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며 지속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번 1심 승소라는 판결을 확보하기까지, 대리인단의 변호사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정 ‘바깥’의 말들
법정 증언을 위해 피해 생존자 응우엔티탄과 목격자 응우엔쩌이 두 사람이 한국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진화위 위원장 면담을 비롯하여 여섯 시간 반이나 진행된 국가배상청구소송 증인 심문과 원고 심문, 국회 토론회, 80여 명이 모인 좌담회 등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응우엔티탄은 법정에서 한국 정부에 간곡한 ‘호소’가 아닌 당당한 ‘요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전쟁기념관에서 베트남전쟁 관련 전시 내용에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정이 큰 기쁨이자 숙원을 향해 나아가는 긍정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거리만큼의 ‘곁’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들어야 할 말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피해 생존자의 말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도 구별이 안 될 만큼 비슷하게 들린다. 그것은 던지는 질문과 만나는 방식이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고, 법정을 꾸리면서 사건 그 자체에 주로 집중해 왔기 때문에 들어야 할 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에서의 당사자 발언만큼은 이런 의미에서 새롭다. 피해자 증언과 법정 구성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참전군인 증언까지도 확보된 지금의 상황에서, 피해와 가해의 구도 사이에 고여 있을 수많은 말들은 제대로 길어 올려지지 않고 있다.
2018년 베트남시민법정 이후 2023년 실제의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론장을 기획하며 ‘말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그 ‘말’은 피해 생존자나 목격자의 말,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 변호사의 말, 활동가와 연구자의 말,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의 말,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들의 말, 온 존재를 다해 비명을 지르는 땅과 바다와 강과 숲 그리고 비인간 동물의 말의 자리였다.
피해자의 말을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들리게 하는 활동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한 더 첨예한 논쟁이 필요하고, 이것이 당사자성에 ‘갇히지 않는’ 혹은 당사자성을 ‘확장해 가는’ 운동이 되기 위한 고민 또한 더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운동이 피해 생존자의 경험이나 말만을 ‘앞세운’ 운동이 되지 않을 때, 피해 생존자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운동이 되지 않을 때, 다양한 말과 관계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려고 할 때, 비로소 지금-이곳의 우리가 그때-그곳을 겪어낸 존재들과 이어지는 운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난 ‘위안부’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증언이 되지 못한 말,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혹은 유족을 베트남 현지에서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같은 해 4월에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법률팀 변호사들과 함께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 확보를 위해 퐁니와 하미 두 마을을 방문하고, 사건 발생 장소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방문하기 전날, 다낭의 모처에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 하루 종일 증언을 들었는데, 먼 곳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낯선 이들을 익숙하지 않은 도심의 공간에서 마주하고, 50년도 더 지난 피해 당시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며 법정의 증언으로 ‘채택’될 수 있는 ‘효력’을 가진 말을 해야 하는 화자들의 부담과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피해 생존자들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무엇보다 화자가 위축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이는 청자의 긴장감마저 녹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얘기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라고 말하는 손주들이 떠들며 뛰어다녔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잘 차려진 밥상이 준비된 거실에 둘러앉아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육하원칙에 따라 질문을 하던 변호사 한 사람이 갑자기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법정에서는 쓸모없는 말이겠지만, 피해 생존자들은 비극을 겪고 난 후 비참한 시간만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은 폐허가 된 마을로 하나둘씩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 위에 다시 집을 짓고, 누군가는 남의집살이를 하고, 누군가는 국수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뒷마당에서 닭과 돼지를 키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증언을 할 때와 이후의 시간들을 ‘살아낸’ 이야기를 할 때, 화자들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재판을 위해 청자가 꼭 들어야 할 말들은 화자가 하고 싶은 말들과 겹치기도 하지만 충돌하기도 한다. 말들의 어긋남 속에서 법정 바깥으로 밀려난 경험들을 놓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피해 생존자에게 들은 말을 청자들에게 미처 전하기도 전에 통역사가 울어버린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도 화자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다가 함께 울어버린 순간, 피해 생존자가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노라며 곰방대를 쥔 손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당당하게 학살 이후의 삶을 말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감싸 안는 화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 현지에서 마주했던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청자들에게 ‘듣는다’는 행위를 고민케 했다.
또 하나의 학살지 하미 마을 이야기 – 진실을 회피하는 자는 누구인가
또다시 현지를 찾아가 피해 생존자들을 만난 것은 2023년 2월이었다. 퐁니 마을의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의 1심 승소 판결 소식이 베트남 사회에 전해진 직후였고, 하미 마을의 위령제가 열리는 때였다. 승소에 대한 커다란 기쁨 속에서도 또 다른 학살지 하미 마을의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화위에 제출한 진정은 조사 개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에,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는 피해 생존자들의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며 당사자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퐁니 마을과는 달리 법정에 제출할 증거 확보가 어려웠기에 실제 법정을 꾸리지 못하고 진화위 진정을 냈던 하미 학살. 그러나 하미 마을 사람들은 퐁니 마을의 승소 소식을 전해 듣고, 사법적 해결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평화법정, 청와대에 낸 청원, 실제 소송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피해 생존자들은 그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만’ 있지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겐 커다란 의미를 갖는 시도였고, 베트남 사회 내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게 된 계기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러 지면과 보도를 통해 퐁니의 응우엔티탄과 하미의 응우엔티탄으로 대표성이 각인된 피해 생존자 이외에도, 하미의 응우엔티본 등 새로운 화자들이 등장해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응우옌티본을 포함한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은 진화위에 하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진화위는 2023년 5월 25일, 하미 마을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절차를 시작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2라-12544).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까지 진화위가 조사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조사대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이니 조사조차 하지 않겠다는 진화위의 기괴한 의지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범죄를 방조하겠다는 이른바, ‘정의에 대한 태만’에 다름 아니다. 진정 신청인 중 한 명인 응우엔티탄은 진정을 접수하고도 일 년 넘게 ‘침묵’을 이어온 진화위에 보낸 서신에서 ‘조사할 용기’를 내 달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쟁 때 자행된 학살의 조사 개시는 ‘용기’까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이자 재판과 진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온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과 김남주(법무법인 도담)는 “진화위 관련 법률에는 외국인을 조사범위에서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인권침해가 일어난 지역이 ‘외국’이라거나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제하는 조항도 없다”며 “진화위가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유를 근거로 들어 부당하게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결국 피해 생존자들은 시민네트워크의 조력으로 지난 7월 19일,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서울행정법원 2023구합71872).
1심 승소 판결 이후, 판결문 번역과 ‘민’들의 공론장
1심 승소 판결이 난 이후에도 한동안 피해 당사자들은 한국어로 쓰인 판결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이 어떻게 인정되었는지, 재판부는 한국 정부에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 용기를 낸 증언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네트워크에서 판결문 번역을 위한 모금을 했고, 693명의 응답으로 번역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었다. 판결문은 베트남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피해 당사자들과 유족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 국제기구에 전달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1심 승소에 대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갈렸다. 승소 판결 열흘 후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것은 전혀 없다”며 “국방부는 거기(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언했고, 3월에 한국 정부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은 국가적 차원에서 말 그대로 대대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제출된 항소이유서는 자그마치 126쪽에 달한다.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유감’이나 ‘마음의 빚’과 같은 권력자들의 애매하고 비겁한 표현 이외에 한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다.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열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정부가 항소한 사실이 알려지자,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매우 유감”이라며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정부의 항소에 대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낸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승소 판결 이후, 시민네트워크의 기획으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라는 공론장이 열렸다. 홍보를 위해 처음에 만든 웹자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시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였다. 논의를 거쳐 최종안에서 ‘시민’을 ‘민’으로 수정했는데, 전쟁 자체가 국가주의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고, 국민으로 동원된 피해/가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민’으로 테두리 쳤을 때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을 더 이상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쟁을 경험한 존재들을 국가나 국경에 가두거나 인간으로만 범주화해서 논의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이 생겨났다.
사실, 누군가 겪은 피해 경험을 판결문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가해 경험 또한 그러하다. 법정에서 다뤄지는 ‘증언’만으로는 다 말해지지 못하는 경험들이 있다. ‘판결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판결의 법적 내용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의 언어 너머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공동의 언어를 벼려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떤 동시대적 고민이 필요한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응우엔티탄의 승소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에서의 가해 경험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며 공유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용기를 낸 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만이 아니다. 가해 집단에 속한 참전군인 R의 증언 너머,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병사들의 수많은 말과 마음들이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의 경험들도 있다. 41쪽의 승소 판결문을 함께 읽는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낯선 법의 언어 속으로 뛰어들어 여러 질문을 던지고, 법정 투쟁만이 아닌 방식의 담론과 운동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
가까스로 확보한 가해경험과 가해구조에 대한 논의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 자리나 위치의 효과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가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어, 회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거기에는 연루와 자신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책임을 진답시고 죽어버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지만,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회성의 결여를 뜻한다. ‘가해자’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는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1]
1심 승소 판결이 내려진 직후에, 방청하던 법정을 나오자마자 증인 심문에서 가해 목격담을 증언해 준 참전군인 R에게 소식을 전했다. 시민평화법정 때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만나 온 시간들이 떠올라,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홉 번의 변론기일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날은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했던 2021년 11월 16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최초로, 참전군인이, 가해 관련 증언을 한 것이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했던 바로 그 참전군인 R이다. R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고, 재판에 필요한 말을 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전쟁 경험이 온전히 말해지는 장(場)이 될 수 없었다.
R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 때 증언을 하고 나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 그러나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이 전쟁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서 언어화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은 전우회에서 말하는 무용담과도, 법정에서의 증언과도, 보훈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하는 말과도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그것은 어쩌면 청자에게 ‘새로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장(場)을 요청하는 말들이 아닐까. 참전군인의 전쟁 경험을 듣는다는 것은 지금껏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온 ‘남성성’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병역과 군대에 대한 현재적인 문제들과 함께 논의될 수도 있다.
병사들의 증언은 어떤 청자들을 요청하고 있을까.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참전군인의 증언이 있던 날, 함께 재판을 방청했던 성미산학교 은결은 판결을 앞둔 시점에 열린 공론장 〈법정에서 못다한 이야기〉에서 “‘감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전쟁”을 말했다. 은결은 아카이브평화기억과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학생들이 1년간 해온 참전군인 구술작업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는 우선 ‘감정’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의 감정은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에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도 감정은 배제됩니다. 감정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특히 법정에서는 이 감정의 언어들이 삭제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참전군인들은 저에게 감정을 공유해주었습니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밤엔 코코아를 마시며 위안을 얻었다’ 같은 것들. (…) 전쟁과 관련한 감정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것조차도 저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은 원래 흔들리고 엉키며 복합적이니까요. 그렇기에 감정을 통해 재구성하는 전쟁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감정으로 구성하는 전쟁은 이익과 손해, 피해와 가해, 규정되는 것만을 판단의 근거, 기준으로 삼으며 구성하는 전쟁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고 훨씬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안전한 자는 없기에 우리는 전쟁의 영향을 받는 많은 이의 삶을 살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이 전쟁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승소 판결 자체는 너무나 소중한 결실이지만, 전쟁에서 휘둘러진 여러 층위의 폭력을 분석하려면 ‘참전’의 주체들을 전방과 후방의 군대뿐 아니라, 전쟁을 지탱하여 고통과 이윤을 동시에 양산했던 병참 기능을 한 기업이나 강제로 동원된 소수민족과 비인간존재들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더욱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외교’ 문제로만 다뤄져서도 안 된다. 한명 한명의 목숨, 애도받지 못한 죽음, 살아남은 자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법정으로 가져가지 못한 하미마을의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국군대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으로서의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이자,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빨갱이인지 양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4.3의 폭력, “베트공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베트남전쟁의 폭력, “폭도인지 시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5.18의 폭력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국민화’를 거절하는 마음 -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민간인 학살에 국한해서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젠더, 생태, 강제 이주, 공동체 소멸, 자살 병사, 장애의 양산, 재생산권, 참전군인, 남성성, 디아스포라, 소수민족과 비인간동물의 전쟁 동원, 에코사이드(생태학살), 파월노동자, 전범기업 등 조금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모닥불 같은 공론의 장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졌으면 한다.
특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을 언급할 때, ‘민간인’은 베트남 ‘국민’으로 한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놓쳐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미군에 의해 동원되었다가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학살당한 산악지대 소수 민족들의 죽음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에서는 애도 혹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동원한 주체와 학살한 주체 각각에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제껏 ‘비국민’의 학살 피해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었던가. ‘1심 승소’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국민’의 전쟁 경험과 학살피해였다.
전쟁이라는 극대화된 폭력, 가해 경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해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 아무리 피해를 말한들 들리지 않거나 남 얘기로 들린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자에게 화자의 말은 가닿을 길이 없다. 1심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국의 미디어와 여론이 피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만하고 무감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가해 병사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의 자리’와 ‘가해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각주
- ^ 후지이 다케시가 2021년 4월 15일, 공론장 〈피해를 품은 가해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을 말하다〉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쓴 추천의 말
- 글쓴이 심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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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연구활동가. 동물, 난민, 여성, 가해자성을 키워드로 공부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 Internationa, Waters 31을 시작하면서 동물과 난민의 문제를 시설과 구금과 시설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화성외국인보호소면회활동마중, 번역공동체 <잇다>, 국제법X위안부 세미나팀, 피스모모평화페미니즘연구소 등을 통해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앎과 삶을 모색하는 중이다.
최신 번역서는 『유곽의 총파업』(얀베 유헤이 지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논형, 근간),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센터 엮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논형, 2021)가 있고, 최근에 쓴 글은 「페미니즘과 생태적 관점으로 다시-쓰는 ‘민’들의 법정의 계보」 『사이間SAI』 31호(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22), 「가해국 여성들의 피해, 일본인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문제화’할 것인가」 『문학들』64호(심미안, 2021), 「‘위안부’ 소송, 국제면제 법리와 ‘여성’인권의 충돌-젠더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위안부’판결의 의미」(페미니스트저널 일다, 2021) 등이 있다. 공저로는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년), 『동아시아 혁명의 밤에 한국학의 현재를 묻다』(논형, 2020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