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마츠나가 가츠토시(松永 勝利)

  • 게시일2023.08.07
  • 최종수정일2023.08.28

2023년 기림의 날 특집 : 일본군‘위안부’ 역사, 우리 모두의 삶

오키나와의 할머니, 배봉기 님이 돌아가시고 7년이 흐른 뒤, 그 반평생을 취재하여 기사로 엮어낸 일본인 기자가 있습니다. 매 학기 대학 강의실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논점을 학생들과 토론하는 서울의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알리고 소수자 혐오범죄 및 성폭력 방지 교육활동을 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교훈은 저마다의 공동체와 시민적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변화를 촉구합니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그 작지만 큰 실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에서 걸어온 전후(戦後) 
2. 샌프란시스코 시민운동과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
3.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
4.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듣다 II

 

기자로서 한 여성이 걸어온 궤적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본인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망설임과 불안을 안은 채, 그래도 나는 취재를 진행하기로 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한반도에서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渡嘉敷島)으로 끌려와 일본군‘위안부’가 된 배봉기 씨. 전후에도 계속 오키나와에서 생활하다 1991년 10월 18일 나하(那覇) 시내 아파트에서 잠자듯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향년 77세였다.

내가 배봉기 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학생 때였다. 배봉기 씨의 증언을 기록한 책을 읽다가 그가 겪은 전시 상황의 처절한 경험을 알고 나서 할 말을 잃었다. 기자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사람들의 기록 작업에 임하고 싶었다.

배봉기 씨가 생을 마감한 1991년, 나는 류큐신보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지 겨우 2년 차였다. 그의 부고를 전하는 짤막한 기사를 접했을 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현실을 깨닫고 아쉬움에 의욕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편, 당시의 나는 기자로서 미숙했고, 애초에 배봉기 씨로부터 신뢰를 얻어 취재를 실현할 만한 역량은 갖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배봉기 씨를 마음 한편에 품은 채 기자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 후, 나는 오키나와 전투를 몸소 겪은 분들에 대한 취재를 조금씩 이어나갔다. 1995년에는 우루마(うるま)시 구시카와(具志川)에서 일어난 집단자결(강제 집단사)의 생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등 전쟁을 겪은 분들이 오랜 세월 봉인해 온 힘들고 슬픈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이러한 취재는 당사자의 과거를 다시 끄집어냄으로써 묵은 상처를 헤집는 죄도 동시에 저지르게 된다.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바람에서 입을 열어준 증언자의 마음을 헤아려 기사화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취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1998년. 마침내 나는 배봉기 씨의 반평생을 기사로 엮는 취재에 도전하기로 했다. 배봉기 씨 본인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대신, 생전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배봉기 씨를 17년간 지원해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오키나와현 본부의 김수섭, 김현옥 씨 부부를 비롯해 배봉기 씨를 담당했던 나하 시청 기초생활 담당 직원, 배봉기 씨가 살던 아파트의 집주인 등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6월 2일부터 21일까지 20일간 연인원 41명을 취재했다. 증언은 취재노트 4권으로 남겼다.

1998년 6월 18일부터 23일까지 게재된 〈할머니의 유언-전 ‘종군 위안부’ 배봉기의 전후〉 연재 기사와 배 씨에 대해 취재한 4권의 노트 ⓒ마츠나가 가츠토시

 

배봉기 씨는 전후 전쟁 후유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계속 시달렸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몇 년간 난조(南城)시 사시키아자쓰하코(佐敷字津波古)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사탕수수밭 옆에 세워진 집은 베니어합판으로 사방을 에워싼 약 1.2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다.

어느 날 오후 교류가 잦았던 조총련 김 씨 부부가 집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불상화 울타리를 지나 샛길로 접어들자 사탕수수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소리 사이로 오두막집에서 금속음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을 들여다보니 배봉기 씨가 고함을 치며 식칼로 냄비를 두들기고 있었다. 배봉기 씨는 전쟁 때보다 혼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지금이 더 괴롭다고 주변에 털어놓았다.

“배봉기 씨는 청춘과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상태인 게 당연하다”라고 김 씨 부부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 무렵 배봉기 씨의 증언을 듣기 위해 종종 오두막집을 찾았던 논픽션 작가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 씨도 “홀로 살면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육체적 고통을 견디며,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데서 오는 괴로움 같았다”라고 말했다.

배봉기 씨는 병적인 수준의 결벽증에 걸려 있었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추진하던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는 1980년 나하시의 목조 단층집에 살고 있던 배봉기 씨를 찾아갔을 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1시간 동안 배봉기 씨는 6번이나 부엌에서 손을 씻은 것이다.

“차를 끓인다며 손을 씻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손을 씻고, 물이 끓고 나서 손을 씻고, 찻잔에 차를 따르고 나서 손을 씻고, 쟁반 위에 찻잔을 올려놓고선 다시금 손을 씻었다. 차를 다 마신 뒤에도 손을 씻었다”라고 회상했다. 윤 교수는 “배봉기 씨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만난 ‘위안부’였던 많은 분들이 결벽증을 갖고 있었다. 위안소에서 겪은 일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표현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배봉기 씨는 1975년 ‘불법 체류자’로 국외로 강제 퇴거될 뻔했다. 그때 신원보증인이 되어준 사람이 과거 배봉기 씨가 일하던 난조시 사시키의 일품요릿집 주인장 부부였다. 그는 그때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나이 들어서까지 가게 주인집 청소를 위해 정기적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나는 꽃이 싫다”고 말하던 배봉기 씨가 숨지기 몇 달 전 아파트 인근 꽃집에 들렀다. 가게 주인의 말에 따르면 배봉기 씨는 소국 딱 한 송이만 샀다. 고난의 연속이었던 삶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마음에 평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이들의 독려와 포옹 ⓒ백정미

 

전시 중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뒤, 배봉기 씨는 오키나와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77년간의 생을 마감한 뒤 개최된 배봉기 씨 추모회에서는 제단에 오키나와현 지사, 나하 시장의 화환이 장식되었고 생전에 인연이 있었던 분들이 다수 참석했다. 배봉기 씨의 만년은 결코 외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배봉기 씨가 사망한 지 30년이 되는 2021년 11월 하에바루초(南風原町)에서 추모 심포지엄이 열렸다. 행사장에는 주최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청중 130여 명이 참석했다. 등단한 조총련 김현옥 씨는 “만년에는 삶의 의욕을 갖고 사신 것 같아 기뻤다”라고 말했고, 3년간 배봉기 씨의 기초생활 수급을 담당한 나하시 부시장 구바 겐고(久場健護) 씨는 “배봉기 씨를 통해 인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배봉기 씨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배봉기 씨는 살아 숨 쉬고 계신다.

2021년 배봉기님 30주기 추모 심포지엄 선전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글쓴이 마츠나가 가츠토시(松永 勝利)

류큐신보사 북부 지사장. 1965년 도쿄 출생으로, 오키나와대학 졸업 후 89년 류큐 신보사에 입사했다. 사회부장, 보도본부장, 논설 부위원장 등을 거쳐 현직에 있다. 주요 취재로는 검증·노인 데이케어 캠페인(신문협회상 수상), 오키나와현 평화 기념 자료관 전시 조작 문제(일본 저널리스트 회의상 수상), 점검 기지 오염-해외에서 재해 기지를 묻는 취재(신문노련 저널리스트 대상, 평화·협동 저널리스트 기금 PCJF상 장려상 수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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