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운동에 매진하면서 유학 전에 가졌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해소되었다가, 크게 두 가지 사건, 즉 첫째, 1993년 고노담화에 대한 정대협 성명서에서 드러난 일본인‘위안부’ 인식, 둘째, 정대협의 국민기금 반대 활동을 계기로 한국 사회 및 정대협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직면하셨다고 쓰셨어요. 어떤 일들이 있으셨는지요.
특히 1993년의 사건이 저에겐 큰 충격이었어요. 고노담화 발표 직후에 정대협이 낸 성명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어요.
‘위안부’는 당시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 국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서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 성노예였다.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라는 말이 가장 걸렸죠. 그리고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한 내용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지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로서는 일본인을 제외하면 한반도 출신자가 많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인 여성은 성노예적 성격의 강제종군위안부와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일본인 ‘위안부’는 당시 일본의 공창제 아래에서 ‘위안부’가 되었고, 돈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하였고, 계약이 끝나면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수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를 은근슬쩍 이 보고에 집어넣은 것은 강제종군위안부의 성격을 흐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 내용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공창제도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는데,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공창제도가 들어왔잖아요. 공창제 연구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전무했고, 일본에서는 많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공창제도가 있었기에 ‘위안부’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만큼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창제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구해 보면 공창제 하의 여성들이 얼마나 노예적인지 알 수 있어요. 그들이 자유의사를 갖고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남성적 시각인 거죠.
이것을 번역해 일본 단체에 보내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걱정됐죠. 그때는 여름방학으로 제가 일본에 있을 때였는데, 정대협에 연락해 그 부분을 빼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일본어판에서라도 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그 내용은 빠지게 됐습니다.
Q. 국민기금이 나오면서 성금 분배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성, 피해자 다양성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들이 보였잖아요. 그때는 어떤 고민이 있으셨나요?
정대협이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건 그 때로선 당연했어요. 국민기금 정책으로 많은 일본 국민이 모금과 기부를 했고, 일본 정부가 갹출금을 내면서 애매한 모양새로 국민기금이 진행됐죠.
국민기금을 할머니들이 못 받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어요. 저는 할머니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대협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정대협 분위기도 그랬는데, 국민기금의 ‘더러운 돈’을 절대로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이 문제에 대해 윤정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선생님은 “가족 중에 당뇨병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분이 단 걸 먹고 싶다고 한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죠. 즉 이 운동을 ‘우리’ 모두의 투쟁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지요.
증언집 작업을 하며 개인적으로 친분이 쌓인 할머니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분들 중에는 정대협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저에게 전화를 해 오신 분들이 계셨어요. 윤정옥 선생님에게도 직접 전화가 갔으니 저보다 훨씬 많은 말을 들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은 신념이 있으셨죠.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셨고, 일본의 악랄한 행위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이 확고하셨던 거예요. 저처럼 외부에 기반을 둔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요.
“너는 일본 사람이니까 우리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도 들었어요. 반은 맞는 말이죠. 그런데 납득이 안 가더라고요. 때마침 주디스 허먼의 책 『심적 외상과 회복』(한국어판 제목은 ‘트라우마’)이 1996년 12월에 일본어로 번역되어서 읽었는데 한국 활동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식민지 피해를 직접 겪었든, 2차적으로 겪었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그때까지 한국 사회든 정대협이든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피해로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여성의 피해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인지 접근하는 연구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연구했어야 했는데 저도 그럴 능력이 없었어요.
Q. 한국에서의 10년간의 체류 이전과 이후, 선생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달라졌고 어떤 방향으로 진화했나요.
1993년의 그 일로 충격을 받고 나서 저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한국 사람과는 생각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됐죠. 정대협 사람들과 일심동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한국과 일본처럼 가부장적인 국가 아래서 나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그런 체제하에서 양자택일 식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것은 타자를 차별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을 국가에 소속시킬 필요가 없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자.’ 이것이 결론이었어요.
Q. 일본군‘위안소’ 제도와 전시 성폭력, 성별화된 군사주의 비판 일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자격)에 초점이 맞추어진 논의 지형에서 이슈의 젠더화 양상을 절감합니다. 특히 다양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이 존재하는데, 해결 운동 과정에서 ‘순결한 민족의 피해자’상에 맞춰 일원화, 표준화된 경향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누락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남성중심적 성관념 비판, 여성 섹슈얼리티 및 노동의 착취와 비가시화 문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와 연동되어 오늘날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보편화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끝난 운동으로서) 생명력을 잃고 게토화, 고립되는 양상과도 관련되는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90년대에는 불가피한 지점이 있었죠.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운동이 크게 달라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수요시위의 ‘끝’에 대해서도 90년대에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수요시위는 일본에 항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 문제를 한국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에요. 수요시위를 해서 일본을 규탄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일본 정부는 달라지지 않아요. 더 많은 연구가 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부터 윤정옥 선생님은 정대협과 연구소가 합쳐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운동의 중심을 연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지요. 2000년 법정 직후에도 그런 논의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밖에서 보면서 아쉬웠습니다.
Q. 1995년의 국민기금과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는 피해자들과 한일 활동가들을 분열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히 아쉬운, 일종의 실패한 기획으로 보입니다. 또한 1990년대와 2000년대 일본 법원을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는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일본에서의 의원입법운동(전시 성적강제 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안)이 사법정의를 넘어선 ‘포스트콜로니얼’ 입법정의의 시도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관부재판 1심에서 승소한 결과 국회의원들의 입법 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엔의 권고가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됐죠. 그래서 모토오카 쇼지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입법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피해자 지원단체가 수긍하지 않으면 입법안을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민기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국민기금은 협의나 설득이 되지 않은 채 강행한 것이었잖아요. 그런 경험을 앞서 했기 때문에 정대협에서 찬성하지 않으면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 입법안에서는 일본인‘위안부’를 제외했어요. 외국인 피해자들만 대상으로 한 거죠. 일단 이 법안을 제정한 후에 일본인‘위안부’도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하면 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입법 자체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Q.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가 가져온 논란과 운동단체장의 국회 입성과 피해자의 고발, ‘위안부’ 피해 부정론과 여성혐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 빠르게 기억이 휘발되고 담론 지형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과 1세대 운동가들의 작고 속에서 운동사의 정리 또한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2022년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의 증보판 부제를 ‘페미니즘의 과제’라고 하셨는데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위안부’ 문제를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게 됐습니다. 2020년 5월에 이용수 님의 문제 제기가 있었을 때 90년대 정대협 활동을 했던 한 사람으로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가부장적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 때리기 현상이 있었고 한국을 포함해서 글로벌하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이런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운동을 옹호하거나 자기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언설이 아니라 철저히 페미니즘적 시각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이 페미니즘적 시각과 열정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어떤 특성을 갖고 있었는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단계인지, 일본에서는 어떤 과제가 있는지 등을 써서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90년대에는 조금이나마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논의가 점점 사라졌죠. 제가 2008년에 쓴 책에서도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 2020년 전후로 활발해진 것 같고, 그러한 기조가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일본 사회 문제도 심각해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논의가 활발해지면 반드시 일본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함께 연구도 하고 토론도 하면 더 좋지요.
Q.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리며, 향후 생각 중인 연구 방향이 있으신지 함께 여쭙니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와 연결 지어서 연구하고 있어요. 또 북한의 젠더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게 제 마지막 과제 같습니다. 민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어서인지 북한에 대해서는 뚜껑을 닫아버렸어요. 그 후 한국 사회나 여성문제에 대해서만 다뤘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북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한반도의 가부장제가 어떤 식으로 남북한에 남아있고 또 새로 형성됐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요. 일본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웃 나라인 북한에 대해서도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핵문제나 세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북한 드라마와 젠더를 연구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
연결되는 글
-
-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1부〉
-
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 글쓴이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
분쿄대학교 문학부 교수. 저서로는 『여자들의 한류: 한국드라마를 읽는다』(이와나미신서, 2013),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한울, 2012), 『신판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문제와 페미니즘의 과제』(이와나미 현대문고, 2022)가 있다.
- 글쓴이 이헌미
-
국제정치학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