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자 고(故) 박숙이 할머니(1922.3.4. ~ 2016.12.6.)는 2012년 9월, 만 90세에 정부 피해등록자 240명 중 236번째로 등록하셨다.
경남 남해군 고현면 관당리에서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1명씩 있는 집에서 태어나셨다. 16살이 되던 1939년, 이웃마을인 갈화에 살던 이종사촌인 17살 장쌍가매 언니와 조개 캐러 가는 길에 일본 군인에게 납치되어 부산, 나고야, 만주, 상해를 거쳐 상해 위안소에서 해방되던 1945년까지 6년간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해방된 줄도 몰랐는데 위안소에 왔던 군인들도, 위안소 관리인도 일본이 전쟁에 지니 조선인들이 좋아한다며 화를 냈고, 군인들도 사나워졌고, 부대와 위안소 안팎이 이상할 만큼 어수선했다고 한다. 아무도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사촌 언니가 밖을 내다보려고 나갔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혼잡한 틈을 타서 뒷문으로 도망쳐 중국 홀아비의 헛간에 숨어들었다. 신고를 막으려고 그 집에서 살다가 조금씩 돈을 모아 1948년 고향이 남해라는 것을 몰라, 무조건 한국에 오기 위해 부산행 배를 탔다. 부산 영도에서 식모살이하다가 ‘화방사’라는 절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내고 1949년 고향 남해로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다.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빠도 어딘가로 살러 가서 소식이 닿지 않아 혼자 살았다. 정상적인 결혼은 하지 못했고, 양아들 1명과 양딸 2명을 키웠다. 손자들이 장성하여 남해를 떠나고 난 뒤 만 90세에 피해 등록을 마쳤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로 세상에 나와 4년의 삶을 살고, 2016년 12월 6일 만 94세로 고단한 삶을 마쳐 경남 남해군 서면 연죽리 남해 추모누리 공동묘지에 묻히셨다.
2013년 1월 19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님 전화를 받고 함께 찾아간 박숙이 할머니의 지붕 낮은 방 안.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91세 박숙이,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살피며 사회운동과 지역 운동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 운동가 65세 이경희, 지역 여성회를 만들고 일궈가는 44세 김정화, 세 여성이 무릎을 마주하고 앉은 것이 출발점이었다. 어쩌면 박숙이 할머니와 남해여성회원들의 만남은 몇 겹의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시대와 공간의 접점이 딱히 없는 듯한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서로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남해여성회는 긴급운영위를 열어 일본군‘위안부’ 사업을 중심사업으로 결정했다. 할머니가 가장 하고 싶어 하시는 강연 사업을 추진했고, 피해자 심리정서 안정 사업, 청소년 교육 및 증언 영상 기록사업 등을 숨 가쁘게 진행했다. 지금 생각해도 퇴근 후 밤에 모여 의논하고 주말에는 나들이, 생일잔치, 교육사업 등 그 고단하고 버거운 일을 어찌 해냈나 싶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할머니 건강 상태를 살피는 일까지 어느 하나 조심스럽지 않고 힘겹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남해여성회 회원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우리들, 즉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일본군의 성노예로서 아픈 생을 살아 낸 한 여성의 삶을 마주하며 연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남해여성회가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고 연대하여 일궈낸 빛나는 자매애는 지금도 잊지 못할 자랑거리다. 비록 약하고 낮고 투박하지만, 이토록 애절하고 슬픈 만남과 헤어짐을 그저 개인의 특별한 경험으로 남겨둘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박숙이 할머니께서 생전에 “내가 살아서는 기어서라도 학상들한테 역사 강연할낑께, 내가 죽고 나면 내 얘기를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니가 책으로 맹글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겁 없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도 3년이 흘렀고, 일생의 강렬한 만남이었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깊은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매우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나는 경남의 중고등학교 교사 8명과 2019년 8월 6~9일 마창진시민모임 주최로 청소년의 인권 평화 교육 자료 수집을 위한 교사 역사탐방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국 난징과 상해의 위안소 흔적들을 찾기 위해 낯선 골목을 다니며 자료수집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중국 난징의 리지상 위안소와 그 흔적, 난징대학살 박물관과 상해의 최초 일본군 위안소인 대일 살롱과 상해 사범대학 내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임시정부청사 등을 탐방했다. 도심의 초라하고 낡고 빛바랜 옛 위안소 건물들이 고층 건물 사이에서 버려진 듯 남아 있어 이질적이었다. 마치 고향도 찾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평생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아픔을 겪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숱한 ‘박숙이’와 닮았다는 생각에 깊고도 깊은 심연에 닿았다.
할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할 수 없었고 말해서도 안 되는 세상을 살아낸 수많은 ‘박숙이’들의 시간을 세상에 단 한 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 딱 그 마음으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 박숙이 할머니의 삶은 그저 한 개인의 삶이 아니었다. 누군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면, 할머니와 가장 자주 만나고, 가장 가까운 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논문을 쓰기 위해 선행연구를 분석해보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주제로 한 논문 자료 중 생애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여성가족부의 일본군‘위안부’ e-역사관 자료실에도 두 분 이상의 피해자 사례를 묶어 나온 생애사 논문은 있었지만, 피해자 한 명을, 그것도 실명으로 밝힌 단일사례 생애사 연구 논문은 없어 놀랍기도 했다.
나의 논문은 비록 글짓기 수준의 논문이지만, 심층 면접과 참여 관찰을 통해 한 분의 삶을 담아내고, 피해자의 감정을 따라가며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적은 세상에 없던 기록물이며, 피해자가 사망한 시점에 쓰인 논문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
또 연구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의식적으로 박숙이 할머니를 만난 게 아니라, 할머니를 만나며 쌓아 온 구체적인 경험이 그대로 연구 결과물이 되었다는 것이 다른 생애사 연구 논문과의 차이점이다. 논문에 쓰인 자료들은 수집한 것도 있지만 남해여성회가 직접 제작하거나 제작에 참여하고 주도한 것들이 더 많다. 자료 제작 과정이 곧 논문 내용이 되었고, 주 2~3회 찾아뵐 수 있는 거리에서 이웃으로 살면서 할머니를 만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할머니의 주거, 의료, 생활 욕구를 세세히 살핀 활동 결과가 그대로 논문이 되었다.
특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 등록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숙이 할머니와 남해여성회가 함께한 사회활동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할머니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사회적 활동을 통해 달라진 할머니의 감정과 관점의 변화는 논문에서 처음 이야기한 것이다. 유년 시절 겪어야 했던 가부장적인 양육 방식과 그로 인해 규정된 할머니의 삶, 그리고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이 깨진 것에 대한 깊은 회한을 할머니가 표현한 그대로 기록했다. 할머니의 생애에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들은 객관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들을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살아내신 마지막 4년의 생활에 대한 기록은 논문 말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에 박숙이 할머니에 대한 유일한 기록물인 셈이다.
박숙이 할머니께서 피해자임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저 우리 이웃에 흔히 있을 법한 평범한 할머니였을 것이다.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 분이 아니기에 잘 알려지지도 않으셨다. 박숙이 할머니처럼 지방에서, 단독 주거 형태로, 90을 넘긴 늦은 나이에 피해자임을 밝힌 할머니들의 삶은 우리에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언론이나 방송에 자주 등장한 피해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증언으로 남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나의 논문은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며 그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일본의 공식사죄와 피해자의 명예 회복은 여전히 멀고, 세계 곳곳에서 심지어 국내에서도 일본군 성노예 제도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역사부정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생존자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내 주변의 지인들조차도 ‘그동안 할머니 모시고 그만큼 고생했는데, 이젠 그만하면 되었다’며 걱정과 위로의 말을 한다. 이러다가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지 않을 때가 곧 올 텐데, 관심에서 멀어지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절박함은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웠고, 책은 나중에 내더라도 논문이라도 먼저 남겨야 했다.
‘포스트 할머니 시대’에 더 강력한 문제 해결의 주체인 시민들이 ‘위안부’ 운동의 주변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기록과 기억의 사회적 재현 작업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다. 생존해 계신 피해자가 10명뿐이라는 위기감과 절박감에 대한 역설로, 기록과 기억은 힘이 세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개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사회적인 기억으로 만들고 재현할 것인가? 이는 곧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만들어 온 역사적 교훈을 어떻게 이어가고 확장할 것인가라는 행동 실천의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행동 실천 과제로 남해여성회는 매년 8월 인권 평화문화제 ‘숙이나래 문화제’를 열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가장 많은 경남지역에서는 98개의 시민사회 단체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당사자와 시민사회가 일궈온 공공 역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기록과 기억 행동을 위한 사회적 연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다. 기록과 기억 행동, 사회적 재현으로 지속 가능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이어갈 때, 일본군 성노예제도와 같은 반인도적 전쟁 성범죄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에 맞서 여성 인권과 평화, 역사 정의의 연결고리로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더 널리 퍼지고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나의 논문은 박숙이 할머니께 약속 드렸던 책을 쓰기 위한 전제이고,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아주 작은 기록이지만, 기억을 확장하고 운동을 지속시키는 데 쓰일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 글쓴이 김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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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여성회장,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남해평화 기림사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