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자 아시아 각지의 일본군‘위안소’들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군인 전용 성매매업소로서의 군 ‘위안소’(이하 따옴표 생략)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뿐 오히려 새로운 군대를 위한 위안소들이 전후 각국 정부에 의해 잇달아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말기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후 구 일본군위안소가 슬그머니 미군위안소로 전용된 것은 차치하고, 1945년 8월 일본 정부는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포함한 점령군위안소를 설치했고, 한국전쟁 때 한국정부는 한국군특수위안대와 연합군위안소를 각각 설치했으며, 비슷한 시기 대만 국민당 정부도 대만군위안소라 할 수 있는 특약다실(特約茶室)을 설치했다. 전후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특수함’을 내세운 각국 군 위안소들의 연쇄적 등장은 식민과 탈식민, 열전과 냉전의 착종 속에 구축된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특별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대만 특약다실은 그 특별함이 가장 명징할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까지 최장기간 지속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관련 연구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는 특약다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1
1. 특약다실의 설치와 명칭
특약다실의 원래 이름은 군중낙원(軍中樂園)이었다. 지금까지 기록으로 확인된 첫 대만군 전용 성매매업소는 1951년 금문도에서 개업한 ‘군낙원(軍樂園)’이다. 하지만 국방부 지시에 따라 군중낙원이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954년이었다. 국방부는 장제스 총통의 승인 하에 1953년 「군중낙원 설치 임시 시행법」을 만들고 일부 군부대에 군중낙원 시범운영을 허가했다. 1년여의 여론 수렴과 일선의 긍정적 평가를 바탕으로 국방부는 정식으로 「군중낙원 설치 실시법」(1954, 이하 군중낙원법)을 제정하고, 금문도를 비롯한 대만 전역의 육해공군 부대에 군중낙원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군중낙원이라는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는지 국방부는 1957년 군중낙원을 특약다실로 개명하고 관련법도 「특약다실 설치 실시법」(이하 특약다실법)으로 개정했다. 1958년에는 「주화 미군클럽 설치법」을 제정하고 미군특약다실도 설치했다. 하지만 개명 후에도 특약다실은 여전히 군중낙원으로 더 많이 불렸다. 특약다실에 비해 군중낙원이라는 이름이 그것의 본질적 성격을 훨씬 즉자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군중낙원을 최초의 군낙원부터 특약다실까지를 가리키는 범칭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2. 일반 공창과의 공존과 구별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46년, 대만 정부는 폐창을 선언했다. 그에 따라 1947년 제정된 「대북시 특수업종 주가 및 시응생 관리 임시 조례」는 과거 성매매업소였던 ‘창관(娼館)’을 ‘주가(酒家)’로 변경하고 그 종사 여성은 ‘창기’나 ‘기녀’ 대신 ‘시응생(侍應生)’으로 명명하여 성병관리를 의무화했다. 그러나 이 조례는 불과 몇 년 후 「대만성 창기 관리법」(1956)과 「대만성 각 현 창기 관리법」(1960, 이하 창기관리법)으로 대체되었다. 말이 폐창이지 실은 묵인하면서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했다가 10여 년 만에 다시 명실상부한 공창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 결과 군중낙원은 공창의 일부로서 더 안전하게 자리 잡았고, 일반 공창업소들과 긴밀한 연계 속에 수 십 년간 공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낙원은 특수한 공창, 이른바 군창(軍娼, 軍妓나 營妓라고도 함)으로서 원칙적으로 일반 공창과는 확연히 다른 시스템 속에 놓여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공창과 군창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민용이고 후자는 군용, 즉 설치의 주체, 목표, 대상, 규정 등이 모두 철저히 군을 주체로 한다는 데 있다. 우선 군중낙원은 군인의 정신건강과 사기진작 그리고 성병관리라는 분명한 군사적 목표를 표방하는 군인 복지시설이었다. 공창과 달리 국방부와 각급 군부대 정치작전부가 관리했으며, 법적 근거도 「창기관리법」이 아니라 국방부가 제정한 「군중낙원법(특약다실법)」이었다. 자연히 운영은 민간이 위탁하더라도 그 관리감독의 최종 권한과 책임은 국방부와 각급 군에 있었다. 국방부는 군중낙원 민간업소의 세금이나 전기세를 면제해 주고, 군중낙원의 이용료를 일반 공창보다 낮게 책정하도록 규정했으며, 시설 내부의 치안과 질서유지를 위해 헌병을 파견하는 등 그 재정과 경영에도 직접 개입했다.
시응생의 신분도 일반 공창과는 확연히 달랐다. 시응생은 군무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시응생에게 필요한 주식과 부식 및 군 의약품을 제공하고 부대 규모에 따라 군중낙원의 수나 규모, 시응생의 인원수까지 적절히 유지하도록 관리했다. 1961년을 기준으로 외도에 20여개, 본도에 50여개의 군중낙원이 운영되었고, 한 곳의 시응생은 보통 10~40명, 많은 곳은 60여명, 적은 곳은 3~4명 정도였다. 1961년 본도의 전체 시응생 수는 1182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기본적으로는 그와 비슷한 규모로 유지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병력이 집중 배치되었던 금문도의 경우 1960년대 이래 군중낙원 10개에 160여명 수준의 시응생 수가 유지되었다. 「창기관리법」이 완비된 1960년 이후에도 국방부는 시응생이라는 명칭을 고수했는데, 이 역시 시응생의 특별한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시응생은 군중낙원 종사 여성만을 가리키는 명칭처럼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응생을 일반 공창의 창기와 구별하고자 애썼던 군의 노력은 그만큼 멀면서 또 가까웠던 군중낙원과 공창 간의 거리를 시사한다.
3. 군중낙원의 운영과 폐지
군중낙원은 민간이 경영하고 군이 관리 감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실제 운영상황은 시기나 지역, 군의 의지 등에 따라 다양했다. 가장 큰 차이는 크게 본도와 외도(外島)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도는 금문도, 마조도, 팽호 열도 등 본도에서 멀리 떨어진 섬들을 말한다. 본도와 외도 군중낙원의 차이는 무엇보다 정치적·군사적으로 상이한 환경에서 비롯됐다. 대만 본도보다 중국대륙에 더 가까운 외도들은 1948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44년이나 계엄상태가 지속되었고 군대가 지역행정까지 책임지는 군사통제지역이었다. 특히 금문도는 1958년부터 1979년까지 실제로 이틀에 한 번씩 중국대륙으로부터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였다. 자연히 군대 기율의 삼엄함은 물론이고, 민간인의 외도 출입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민간사회활동 역시 군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 관리되었다. 이 같은 환경은 외도의 군중낙원이 본도에 비해 더 규범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수십만 대군까지 잠재 고객으로 두었던 외도 군중낙원은 한때 그 수익금으로 군부대의 각종 복지비용과 위문공연비 등을 충당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 이런 특수한 조건 덕분에 외도의 시응생들은 본도보다 안전한 환경과 훨씬 많은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도 군중낙원은 1960년대 이래 계속된 군 감축으로 장기적으로는 하향세에 있었다. 특히 1979년 중미수교로 대규모 군 감축이 단행되면서 급격히 쇠락했고, 1980년대부터는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게다가 1987년 대만 본도의 계엄해제와 함께 민주화가 시작되고 1990년 한일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면서 군중낙원에 대한 대만사회의 비판이 고조되자, 결국 국방부는 1990년 11월 군중낙원의 정식 폐지를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본도의 환경은 외도와 상당히 달랐다. 본도 역시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장기간 계엄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외도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웠고 무엇보다 다양한 성 산업이 존재했다. 이는 군중낙원 외 다른 공창이 존재하지 않았던 외도와는 확연히 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즉 본도의 군중낙원은 다양한 층차의 공창 및 사창과도 경쟁하면서 점차 그 경계가 모호해졌고, 자연히 군중낙원에 대한 군의 관리감독도 외도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 실제로 군과 업주 간의 불법유착, 횡령, 권력남용 등은 물론이고 시응생을 둘러싼 납치나 협박, 인신매매, 미성년자 고용, 불법감금과 갈취, 상습적 폭력, 치정살인 등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이는 외도에 비해 본도는 민간업주의 재량이 더 큰 반면 국방부의 관리감독은 더 부실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본도 군중낙원은 외도보다 십수 년이 빠른 1970년대 후반 사라졌다고 한다. 1974년 폐지됐다는 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또 한편 아주 특별한 예외로서 본도 육군제2군봉산특약다실을 빼놓을 수 없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해당 다실에서 군복무를 했던 예샹시(葉祥曦)에 따르면, 당시 봉산특약다실은 육군총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고 실무책임자는 위병중대의 중대장이었다. 다실과 시응생 관리 실무도 군무원이 아니라 예샹시와 같은 210여명의 위병들이 담당했다. 여느 군중낙원처럼 민간이 운영하고 군이 관리 감독하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군이 직영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시응생 수도 900~1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보통 10~40명 정도인 여타 군중낙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도적인 규모였다. 3층짜리 回자 구조로 된 다실 건물도 1층에는 위병과 헌병들의 숙소, 식당, 강당, 마당, 축사, 어장 등이 있고 2, 3층에는 각각 500여 개의 시응생 방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대규모 군중낙원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비밀은 그곳 시응생이 모두 기결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형기의 절반을 감면받을 뿐 아니라 시응생으로 복역하는 동안 돈도 벌 수 있었다. 죄수들에게는 특별감옥이었고 군인들에게는 거대한 군중낙원이었으니, 봉산특약다실의 운영방식이 군 직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당 다실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 예샹시의 회고록이 유일하기 때문에 그의 체험을 넘어선 다실의 전체 면모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며, 심지어 그의 진술 내용이 사실인지도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태다. 다만 군중낙원에 여성 죄수들이 있다는 소문이 수십 년 전부터 파다했다는 사실, 그리고 예샹시의 회고가 매우 핍진하고 세부적이라는 점에서 특별감옥 봉산특약다실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커 보인다. 만약 예샹시의 회고 내용이 사실이라면 봉산특약다실은 비밀리에 군이 주도하고 행정부와 사법부까지 가세하여 창안해 낸 전대미문의 성매매업소였으며 육군총부를 내세운 대만정부가 그 포주였던 셈이다. 이는 군 성매매업소의 정당성을 넘어 국가 존재의 정당성까지 질문하게 하는 문제로서, 우선 예샹시 체험수기의 진위가 시급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4. 동아시아 탈식민 분단체제와 군중낙원
그렇다면 대만군과 정부는 이렇게 탈도 많고 비밀도 많은 군중낙원을 굳이 왜 만들었으며 그토록 오랜 기간 유지했을까? 우선 일선 장교들의 요청이 있었다. 1949년 국민당 정부가 중국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패퇴할 때 60여만 명의 군대가 함께 이동했는데, 대규모 젊은 병사집단의 갑작스런 등장은 대만이라는 작은 섬 사회에 위협적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미군의 진주 당시 일본이 ‘성(性)의 방파제’ 논리를 내세웠던 것처럼, 대만에서도 대륙 출신 병사들을 겨냥한 ‘성의 방파제’로서 군 위안소 설립의 필요성이 일선 장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한편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1952년 현역군인의 결혼 금지령을 내리고 그 보완책으로 군중낙원 설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이용해 5년 안에 중국대륙을 수복한다는 정부계획에 전투경험이 많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대륙 출신 병사들을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륙수복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양안의 분단은 그대로 고착되고 말았다. 정부에 의해 실향민으로 전락해 버린 대륙 출신 군인들은 상당수가 혼기를 놓친 채 독신으로 늙어갔다. 이들 대륙 출신 병사들은 군중낙원이 국민당 정부의 ‘덕정(德政)’으로 선전되며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표면적 이유이자 명분이었다.
사실 대륙 출신 병사들의 비극을 초래하고, 군중낙원을 출현하게 만든 근본적인 배경이자 원인은 바로 국공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국공내전 역시 서로 다른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탈식민 기획과 그 주체들이 전후 국민국가 건립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었고, 이것이 미소냉전이라는 국제정치와 맞물리면서 동아시아 고유의 탈식민 분단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전후 공산혁명을 우려한 일본정부는 맥아더와 미군정에 점령군위안소라는 ‘선물’을 하며 그 세력을 등에 업었고, 전승국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백단(白團)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극우 군국주의자들과 기꺼이 손을 잡았으며, 한국의 극우 반공주의 이승만 정부는 그런 국민당 정부와 아시아 반공연맹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처럼 전후 동아시아의 자유진영은 반공이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빠르게 헤쳐 모였고, 그 이념을 위한 열전(熱戰)의 도구로서 ‘특수’라는 기만적 이름을 단 군 위안소들이 잇달아 등장한 것이다. 반공적 탈식민 기획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일본군위안소라는 식민의 유산을 의도적으로 부활시킨 것은 퍽이나 의미심장하다.
분명한 것은 대만의 군중낙원이, 종적으로는 식민제국주의 전쟁 시대의 일본군위안소가 어떻게 전후 탈식민 분단체제로 얽혀 들어가는지, 횡적으로는 동아시아 냉전과 군사문화의 연동 속에서 어떻게 위안소 및 ‘위안부’ 문제가 전유되고 담론화되며 새로운 파동들을 낳는지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고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탈/식민, 반/민주(여성), 탈/냉전이라는 세 가지 담론축이 모두 교직하며 경합하는 지극히 복합적인 역사적 장소이자 지금도 중국대륙/대만, 통일파/독립파, 친중파/반중파 등의 시각이 서로 각축하는 대만 현실정치의 장이다. 나아가 그것은 미중갈등과 함께 양안과 남북간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현 동아시아에서 탈/민족주의적 문화정치의 장으로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군위안소 및 그 ‘위안부’ 연구가 대만의 군중낙원에도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처럼 차고도 넘친다.
각주
1. 이 글은 필자의 논문들을 바탕으로 했으며,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논문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풍문과 역사 사이: 대만군 위안소 특약다실 연구의 현황과 과제>(중어중문학 제76집, 2019), <일본군 위안소에서 대만군 특약다실로>(중국어문학논집 제118호, 2019), <‘위안부’가 된 여죄수들: 대만군 특약다실의 ‘충군’ 논란 일고>(중국학연구 제90집, 2019), <동아시아 냉전과 군 ‘위안소’의 연쇄>(일본문화연구 제81집, 2021), WooKyung, IM, “Resurrection of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stations’ in East Asia: focusing on the Taiwanese military brothels, special assignation teahouses(teyuechashi)”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21, NO. 1, 2020
- 글쓴이 임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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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 연대 중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중국 북경대 박사 후 연구. 주로 동아시아의 냉전과 민족주의 그리고 젠더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최근 사회주의여성해방론과 중국여성, 신중국의 창기개조운동, 대만군 위안소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 저서로 《근대 중국의 민족서사와 젠더》, 편저 《이동하는 아시아: 탈냉전 수교의 문화정치》, 《‘냉전’ 아시아의 탄생: 신중국과 한국전쟁》이 있고 역서로 《시인의 죽음》, 《적지지련》,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