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네덜란드가 열었던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den)의 판결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증명할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이 재판에서 다룬 총 171건의 사건 중 4건이 일본의 강제 성매매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와 관련해 총 15명의 일본인이 기소되었고, 그중 1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다.1 무엇보다 네덜란드 법원은 BC급 전쟁범죄로 기소된 강제 성매매 피고인들에게 국제법에 의거해 역사상 처음으로 형을 선고했을 뿐만 아니라, 동인도에서의 위안소 운영의 실태와 일본군의 조직적인 개입 및 유럽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의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중요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은 그 한계성과 모순 또한 지니고 있다.
‘침묵된 타자’와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의 한계
무엇보다 이 재판은 모두 유럽 여성에 대한 범죄행위만을 다루고 있을 뿐, 네덜란드는 자신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사실과 인권유린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식민주의적 인종차별과 유럽 여성의 도덕성과 명예를 인도네시아 여성의 것보다 우월한 것으로 해석하는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사고와 오리엔탈리즘이 기저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임시군사재판에서 강제 성매매를 다루는 이중잣대를 양산했다. 네덜란드인은 식민지 성(性)담론에서 우월한 계급에 속했으며, 이들은 열등한 타자인 인도네시아인보다 우월한 주체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등한 동양’, 그 타자화의 대상은 인도네시아인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인에게도 적용된다. 즉, 네덜란드는 “일본인이 저지른 범죄 자체에 대해 처벌했을 뿐만 아니라, 인종적 침해, 즉, 부르주아 ‘백인’ 여성에 대한 ‘황인종’ 남성의 성적학대에 대해 일본인을 처벌”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문에 드러난 담론은 네덜란드 정부의 식민주의적 인종차별주의를 반영한다. 임시군사재판장인 더 흐로트는 무방비 상태로 억류되어 있던 여성들의 강제 성매매 동원을 ‘잔인함의 궁극적인 예(ultime voorbeeld van wreedheid)’로 규정하고, 일본 용의자를 일컬으며 ‘짐승 같은(beesachtig)’과 ‘비인간적(onmselijk)’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2 당시 유럽 여성들에게 부여된 ‘아무 힘없는 희생양(willoze prooi)’3이라는 순수함의 이미지로 인해 그 순수함을 훼손하는 일본인은 최악의 전범으로 규정되었다. 반면, 동양인 ‘타자’인 동인도 여성들이 또 다른 동양인 ‘타자’인 일본인들에게 겪은 시련은 간과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드러내는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는 세마랑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일본군은 수용소에서 35명의 유럽 여성을 이 지역 4개의 위안소에 배치했다. 나중에 세마랑의 헌병대에 의해 100명 이상의 유라시아인, 인도네시아인, 중국인 여성이 모집됐다. 하지만 세마랑 사건의 재판은 수용소 외부에서 동원된 100여 명의 유색인종 여성이 아닌 수용소 내에서 징집된 유럽인 피해자에게만 해당됐다. 그 과정에서 모든 유럽인 피해자는 위안소에 오기 전까지 처녀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법원은 유럽 처녀의 강제 성매매를 재판하는 것이었으며, 피해자가 순결을 잃고, 굴욕을 당하고,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유럽 여성의 순수함이 침해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4 임시군사재판은 포괄적 개념의 ‘강제성’을 근거로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었는데, 이러한 해석은 부분적으로 ‘유럽 여성의 자발적인 성매매는 불가능하다’고 간주한 데 기인한다. 서구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외설적인 행위이며 ‘서구의 도덕적 기준에 반하는’ 매춘행위를 유럽 여성이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volgens Westersche maatstaven niet eerzaam is en indruischt tegen de eerbaareheid”).5
동인도의 성매매에 관한 연구에서 헤서링크(Hesselink)는 성매매를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각을 흥미롭게 비교한다. 유럽에서 성매매는 더럽고 타락한 것이었으며, 매춘부는 사회 최하층을 형성했다. 유럽 여성은 유럽의 우월한 규범과 가치를 유지하는 데 모범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신의 성을 표현하고 판매하는 여성은 서구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고 지적한다.6 반면 유럽인들의 사고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위안부’는 성매매를 혐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유럽의 성관념과는 다른 느슨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성매매 행위가 이들의 명예를 빼앗거나 심각한 타격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7 이러한 사고방식은 네덜란드 남성들이 역사적으로 동인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거나, 첩(Njai)을 두는 문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8 이는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사고를 드러내는 동시에 임시군사재판에서 유럽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고,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피해는 외면당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즉, 성매매 담론을 둘러싼 네덜란드의 이율배반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인도네시아의 첩(Njai)제도와 ‘위안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제도의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을 조사하는 것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9 인도네시아 여성을 바라보는 이러한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백인 유럽 여성의 품위와 명예를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중요하게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식민주의적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은 오랫동안 동양을 타자화해 왔으며,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편견은 서양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담론 속의 주체는 ‘유연한 우월적 위치(flexible superior positionality)’를 설정하기 위해 상대를 열등한 타자로 만든다. 사이드가 말한 이 ‘유연한 우월적 위치’는 서양인 자신에게 본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으로 부르는 담론 속의 주체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담론 속에서 서양과 동양은 합리/비합리, 도덕/열등, 성숙/유치, 정상/이상이라는 위계적이고 대립적인 층위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양이 자신에게 우월한 위치를 부여하고자 동양인을 열등한 타자로 가치 하락시킨다고 할 수 있다.10 이는 네덜란드가 오랫동안 인도네시아를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시선을 대변하기도 한다. ‘게으른’, ‘성적으로 느슨한’, 그리고 ‘지도가 필요한’, ‘신뢰할 수 없는’, ‘육체적인’ 존재로서 동인도의 원주민들은 네덜란드의 담론 속에서 재현되어 왔다.11 1900년대 초 동인도 원주민들을 위한 교육, 교통, 의료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시행된 네덜란드의 ‘윤리정치(Ethische Politiek)’는 원주민들의 정치적∙경제적 발전을 돕는 의도였으나, 근본적으로 문명화된 네덜란드가 미개의 인도네시아를 돕는다는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유럽 여성은 동인도에 유럽의 미덕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표상화됐다. 따라서 동인도를 방문하는 유럽 여성들을 위한 지침서에서는 비위생적이고, 부도덕하며, 게으른 원주민 여성들과 너무 잦은 접촉은 피하도록 조언하고 있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2
이처럼 서양과 동양,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차이는 인종에 따른 불평등을 법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법제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유럽인과 원주민이 서로 다른 법적 요구사항을 가진다고 믿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많은 영역에서 ‘법이 인종에 근거해 이원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 예로 유럽인은 공정한 재판을 보장받았지만, 원주민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13 더욱이 네덜란드가 보이는 태도의 이러한 양면성은 임시군사재판에서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 기간 동안에 행해진 네덜란드 동인도군(KNIL)의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인 ‘현지군사재판’의 성폭력 재판에서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바타비아 현지군사재판(Krijgsraad te Velde in Batavia)의 성폭력 재판과 한계
1942년 일본의 동인도 점령으로 인해 실질적인 통치권을 상실한 네덜란드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다시 동인도에서의 식민정책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1945년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 수카르노가 독립을 공표했고, 1945년부터 1949년까지 4년간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립군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경찰행정(Politionele acties)’이라는 미명 하에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병했고, 이들이 저지른 과도한 무력 사용과 전쟁범죄는 민간인을 포함해 10만 명이 넘는 인도네시아 희생자를 낳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규모 군대가 형성되면서 군사적 정의와 행동규범의 수립 필요성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45~1950년 사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기간 동안 일반군사법원 대신 현지군사재판소(Krijgsraden te Velde)가 주요 법적 기관이 되었다.14 왕립 네덜란드 동인도군(KNIL)의 재판을 위한 바타비아 현지군사재판은 총 1781개 사건을 다루었다. 이 중 21개 사건이 성폭력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피해자는 대부분 인도네시아 원주민이었다. 그리고 가해자 또한 종종 원주민이었다. 이들 중에서 단 3명의 유럽 군인이 성폭력 혐의로 기소되었다.15 현지군사재판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군 형법에 근거하여 판결됐는데, 검사가 종종 형량을 줄이려 한 정황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미성년 의붓딸을 학대한 유럽 군인에 관한 사건에서 검사는 참작할 수 있는 여러 정황을 제시했다. 심리보고서는 피고인이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이유를 들어 책임의 경감을 제안했고, 결국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법원은 피고인의 낮은 도덕성을 인정했지만,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인 피고인이 ‘유럽인으로서 사실상 거주하기 힘든 환경’에서 살았다고도 지적했다.16 즉, 유럽인으로서 살기 힘든 인도네시아의 환경이 유약한 피고인이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근거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유럽인 상병이 미성년자 유럽인 소녀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경우, 심리 검사에서 상병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상급자에게 불리한 평가를 받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일시적인 일탈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변론에서 피고인이 사회의 도덕 기준을 위반했다고 인정했지만, 이는 슬럼프 기간에 일어난 일이며 흥분이나 충동을 범죄행위로 간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17 현지군사재판은 피고인의 사기 저하의 결과가 성폭력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법원은 이처럼 유럽인 가해자의 부도덕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예외적인 상황을 찾는 것 같았고, 이들의 범죄행위는 종종 일시적인 충동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동은 범죄성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탈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행동이었으며, 따라서 형은 경감될 수 있었다. 기소된 세 명 중 두 명은 유기형에서 면제되었다.
군사재판에 인도네시아 원주민이 기소된 경우에서도 재판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로레스에서 태어난 원주민 군인이 11세 소녀를 학대한 사건으로 기소됐었으나, 재판부는 강압적인 측면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피고인은 미성년자를 추행한 혐의로 징역 10개월만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서도 식민주의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피고인의 행동의 질이 나쁨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피고인 같은 원시적인 남성들(primitieve mannen zoals de beklaagde)’은 성적인 문제가 있기 마련이며, 성적 욕망을 조절할 수 없는 원주민이라는 사실이 참작의 사유로 활용되었다.18
이 외의 사건에서도 사건의 유일한 증거가 인도네시아 피해자의 증언인 경우, 강간은 유죄판결을 받을 수 없었다. 성폭력 재판에 관한 검사들의 논의에서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종종 저항을 거의 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의 증거를 제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19 이에 대한 예가, 세마랑의 한 군인이 강간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그는 자바 여성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그녀를 강간했다. 피고인은 온전히 자백했으나 형량 결정에 있어 검사는 그 여성이 성년의 나이를 훨씬 넘었고, ‘어떤 의미에서 사건 발생에 대한 그녀의 협조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20
또한 미성년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의 판결에서도 피고인인 54세의 인도네시아인 군인은 그가 행한 폭력과 강제성을 부인하며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돌려보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반면에 소녀는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옷을 벗어야 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군 검사는 피해자가 기소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이며,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조숙하므로’ 군인의 행위가 악의적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즉, 인도네시아 소녀는 성숙했고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간주되므로 강제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이다.21 이처럼 인도네시아 여성은 성적으로 조숙하고 성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식의 일반화는 기소인이 강제적인 폭행을 행했다는 근거를 무력화하고, 현지군사재판이 기소인을 무죄로 판결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처럼 바타비아 임시군사재판(Temporaire Krijgsraden)에서 판결의 기준이 된 유럽 여성 피해자의 명예와 품위 개념은, 현지군사재판(Krijgsraden te Velde)에서 판결 기준이 된 인도네시아 여성 피해자의 도덕성의 개념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볼 때, 매춘 또는 성매매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충분히 수용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위안부’에 대한 혐오나 거리낌도 많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임시군사재판에서 유럽 여성에 대한 태도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임시군사재판에서 네덜란드인 ‘위안부’에게 행해진 강제성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적용하고, 일본이 네덜란드인 포로수용소에서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를 전범 조례에 추가하는 등22 일본 피고인의 처벌에 엄격했던 네덜란드였지만, 그 피고인이 네덜란드인이 되고, 피해자가 인도네시아 여성일 경우 유무죄를 판결하는 잣대는 이율배반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두 법원의 재판결과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성차별의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은 비단 네덜란드 군사재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네덜란드를 포함한 승전국들의 도쿄전범재판23 판결은 여전히 피식민국의 아시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연합군이 직접 위안소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했는데,24 이는 전쟁의 승자뿐만 아니라 패자에게도 면죄부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며, 이 제국들의 위선과 승자의 정의는 도쿄재판이 ‘위안부’에 대해 대체로 침묵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25 연합군이 직접 위안소를 사용한 사실은 연합군 또한 ‘적군’에 대항하는 전쟁행위로써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에 가담했으며, 전범재판에 성범죄를 전쟁범죄로 포함하여 재판에 회부하게 된다면 연합군은 처벌을 받고, 자국의 군인을 재판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26 즉 “도쿄전범재판에서 일제강점기 동안의 한국인과 연합국 식민통치하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범죄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기소되지 않았으며”27, 이와 같이 기소 대상을 결정하고 전쟁범죄의 범위를 정한 이러한 주관적 판단은 “위헌적이고, 오만하며, 인종 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28 태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바타비아 임시재판과 극동군사재판(IMTFE) 판결의 한계 및 불처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개최되었다. 이 민간법정에는 한국,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피해생존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으며, 일본군 고위관계자와 일본정부에 책임을 물으며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위안부’ 문제의 범죄성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법정의 한계는 ‘위안부’ 문제를 전쟁 중 여성인권 문제로 보는 데 그쳤으며, 식민주의 비판과의 연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식민의 역사와 여성인권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할지에 대한 반성과 고민을 숙제로 안겨준다.29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강제 성매매 이슈는 일본이 점령했던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에 해결되지 않은 법적 문제이자 화해의 걸림돌로 남아있다. 일본이 ‘위안부’ 제도를 통해 수많은 여성들에게(그 대상이 네덜란드 여성이든, 인도네시아 여성이든, 한국인이든, 다른 아시아 국가 여성이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성적 학대와 폭력, 인종차별을 자행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인권유린과 성폭력을 경험한 수많은 아시아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침묵 당해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전쟁 중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는 전쟁의 부산물로 간주되곤 했으며, 식민체제 하의 여성인권은 ‘피식민’과 ‘여성’이라는 이중적 ‘타자’의 위치에서 무시되고 침묵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침묵 속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인종차별, 성차별, 식민주의 역사와 관련하여 앞으로 우리가 풀어가야 할 많은 과제들을 시사한다. 정의는 다면성을 지니며, 그중 하나는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30 그러므로 식민지 피해자와 여성들에게 주어질 평등한 정의는 보편적 인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반성과 국제윤리체계의 구축이 선행될 때 가능해지리라 기대해 본다.
각주
1. De Groot, 1990, p.23
2. De Groot, 1990, p.29, p.80
3. De Groot, 1990, p.104.
4. NIOD. inventarisatienummer 400, zaak 72/1947
5. 네덜란드 전쟁문서보관소(NIOD), 목록번호 400, No.72/1947, Judgment, p.13; Jørgenson & Friedmann, 2014, p.344; Koevoets, 2016, p.54.
6. Hesselink, 1987, p.213.
7. Tanaka, 2003, p.66.
8. 네덜란드 남자와 동인도 여성 간에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첩(Njai)제도는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 역사와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헤서링크(Hesselink, 1987, pp. 208-209)에 따르면 동인도에서의 매춘은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필요악(necessary evil)’으로 간주되었으며, 정부가 마련했던 성병 방지 교육과 적극적인 성병 치료는 고객인 유럽인의 건강을 우선시한 조치였다. 더불어 매춘을 하거나 성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었던 첩(njai)제도는 유럽 남성들에게 ‘축복(blessing)’으로 간주되었다.
9. Horton, 2009, p.195.
10. 사이드, 1991, p.24, pp.75-76
11. Pols, 2007. ‘Psychological knowledge in a colonial context: theories on the nature of the “native mind’ in the former Dutch East Indies’, History of Psychology, 10. p.2.
12. Stoler, 1989, p.640, p.650.
13. Wertheim, 1991. “Koloniaal racisme in Indonesie”, De Gids, 154, p.369.
14. Van den Bos, 2015. p.32.
15. Koevoets, 2016, p55.
16.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9, zaak386/1948. Koevoets, 2016, p.56참고.
17.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64, zaak362/1949. Koevoets, 2016, p.56-57참고.
18.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8, zaak358/1948; Koevoets, 2016, p.56.
19. NL-HaNA, Hoog Militair Gerechtshof, 2.09.79, inv.nr. 1747; Van den Bos, 2015, p.56; Koevoets, 2016, p.57.
20.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8, zaak355/1948; Koevoets, 2016, p.57.
21. Nationaal Archief, Den Haag, Archief van de Krijgsraden te Velde, inventarisnummer 55, zaak105/1948; Koevoets, 2016, p.59.
22. Borch, 2015, p.103; Koevoets, 2016, p.48.
23. 극동국제군사재판(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은 도쿄재판(Tokyo Trial) 또는 도쿄전범재판(Tokyo War Crimes Tribunal)이라고도 불리며, 일본제국의 A급 전쟁범죄를 재판하기 위해 1946년 4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열린 재판이다.
24. Tanaka, 2003, pp.133-166. 연합군 수장인 맥아더 장군은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이러한 위안소의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즉각적인 폐쇄를 명령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 정부는 1937년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미국과 다른 연합군이 일본에서 잔학 행위를 저지를까 두려워했고, 일본은 일본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1945년 8월 18일 연합군이 사용할 위안소를 열었다. 이후 위안소가 문을 닫게 된 것은 성병의 확산을 막고자 함이었지, 여성 인권의 착취에 관한 반성 때문은 아니었다(Friedman, 2015, 주68).
25. Henry, 2013, p.369.
26. Friedman, 2015, 주 68.
27. Dolgopol, 1995. p.30.
28. Friedman, 2015, 주 86. 네덜란드, 미국, 호주,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사령부(SEAC)에 각자 자국의 전쟁범죄과(War Crime Section)를 만들었고, 네덜란드 역시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전범을 조사하기 위한 팀을 구성했다(Piccigallo, 1979, 178). 하지만 도쿄전범재판을 위해 한국인이나 일본 지배하의 다른 피식민국가들을 위한 이같은 팀은 구성되지 않았다. (Friedman, 2015, 주 80)
29. 네덜란드인들의 이러한 고민의 예로, 얀 바닝과 힐더 얀슨이 2007년과 2009년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이들의 사진과 인터뷰 내용을 『위안부(Comfort Women=Troostmeisjes)』와 『치욕과 무죄(Schaamte en Onschuld)』라는 책으로 출간하고 전시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전시회는 네덜란드, 프랑스, 인도네시아와 일본에서도 개최되었다. 또한 이 인터뷰는 ‘우리가 예뻤기 때문이었다(Omdat Wij Mooi Waren)’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어 인도네시아인 ‘위안부’들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기여했다.
30. Dolgopol, 2011, p.260.
사이드, 에드워드. (1991).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Borch, F.L. (2015). “In the name of the Queen”; military trials of Japanese war criminals in the Netherlands East Indies (1946-1949),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79, 93-125.
De Groot, L.F. (1990). Berechting Japanse oorlogsmisdadigers in Nederlands-Indië: Temporaire Krijgsraad Batavia. 's-Hertogenbosch: Art & Research.
Dolgopol, Ustinia. (1995). Womens' Voices, Women's Pain. Human Rights Quarterly, 17(1), 127-154.
Dolgopol, Ustinia. (2011). Knowledge and Responsibility: The ongoing consequences of failing to give sufficient attention to the crimes against the Comfort Women in the Tokyo Trial. in: Tanaka et al. Beyond Victor’s Justice? The Tokyo War Crimes Trial Revisited.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44-261.
Friedman, Sylvia Yu. (2015). Silenced No More: Voices of 'Comfort Women'. Freedom Campaign Publishers.
Hesselink, Liesbeth. (1987). ‘Prostitution: a necessary evil, especially in the colonies’, In E. Locher-Scholten e.a. Indonesian women in focus: past and present notions, Foris, 205-224.
Horton, W.B. (2009). Comfort Women, The encyclopedia of Indonesia in the Pacific War, 184-196.
Jørgenson, Nina.H.B. & Friedmann, Danny (2014). Enforced prostitution in international law through the prism of the Dutch Temporary Courts Martial at Batavia, FICHL Publication Series, 21, 331-354.
Koevoets, Kim. (2016). Koloniaal racisme en seksisme in de militaire rechtspraak in Nederlands-Indië. Master scriptie. Universiteit van Amsterdam.
Piccigallo, Philip R. (1979). The Japanese on Trial: Allied War Crimes Operations in the East, 1945-1951.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Pols, H. (2007). Psychological knowledge in a colonial context: theories on the nature of the ‘native mind’ in the former Dutch East Indies, History of Psychology, 10(2), 111-131.
Stoler, A.L. (1989). Making empire respectable: the politics of race and sexual morality in 20th century colonial culture, American Ethnologist, 16, 634-660.
Tanaka, Yuki. (2003). Japan's comfort women: sexual slavery and prostitution during World War II and the U.S. occupation. London: Routledge.
Van den Bos, Steven. (2015). Military Justice in the Dutch East-Indies: A Study of the Theory and Practice of the Dutch Military-Legal Apparatus during the War of Indonesian Independence, 1945-1949. Master Thesis. Utrecht University.
Wertheim, WF. (1991). Koloniaal racisme in Indonesie, De Gids, 154, 369-384.
- 글쓴이 문지희
-
한국외국어대학교 네덜란드어과 교수. 네덜란드령 동인도 문학과 남아프리카 문학 등 네덜란드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