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공동의 목소리 - AI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 전시 〈증언을 만나다〉

배주연

  • 게시일2022.11.18
  • 최종수정일2022.11.24

증언과의 우연한 조우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중앙대학교 HK+접경인문학연구단이 주관한 AI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 전시 〈증언을 만나다〉가 지난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렸다.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가 중심이긴 하지만, 이번 전시는 기술적 상연을 넘어 증언을 한다는 것, 그리고 증언 이후 증언을 마주하는 장에 관한 다양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특히 “증언을 만나다”는 국문명보다 “Encountering Testimonies”라는 영문명이 전시의 성격을 보다 잘 보여주는데, ‘증언들’과의 예상치 못한 마주침, 하나가 아닌 복수의 증언들과의 마주침의 계기들을 설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증언은 하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닌 마주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가능한 이유는 증언이 이미 행해졌고 그로 인해 그 자리에 던져졌기 때문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시장 입구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전시 서문은 증언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증언은 이들의 기억뿐 아니라, 현재 삶의 모습, 방향, 의지를 드러내는 ‘말’ 모두를 의미한다. 이 말은 발화되면서 증언자를 떠나, 그 자체의 생명을 지니며 퍼져나갔다.” 여기에서 행해진 증언은 더 이상 피해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닌 피해자를 떠난 말들이다. 도미야마 이치로[1]가 지적했듯이 ‘증언’이 대신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모순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위의 소유격과 행해진 말의 소유격의 비일치에서 증언을 둘러싼 담론장의 곤경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증언의 발화 행위가 필연적으로 청자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증언은 누구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닌 집단의 발화 행위가 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나치 친위대(SS) 군인들의 ‘청자 없음’에 대한 경고가 생존자들에게 지속적 잔상으로 남아 있음을 지적하며 증언자와 청자의 문제를 연결시킨다. 

 

시몬 비젠탈은 SS 군인들이 냉소적으로 포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면서 즐거워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중략) 설령 몇 가지 증거가 남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희 중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너희가 얘기하는 사실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고 할 거야. 연합군의 과장된 선전이라고 할 거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우리를 믿겠지. 너희가 아니라. 라거(강제수용소)의 역사, 그것을 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될 거야.” 희한하게도 이와 똑같은 생각(“우리가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거야”)이 한밤의 꿈의 형태로 포로들의 절망의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2]


발화의 유효성은 청자에게 도달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를 동반한다. 증언은 늘 청자를 염두에 둔 말하기라는 점에서 공동의 발화를 요청한다. 또한 소영현의 지적처럼 증언이 이루어지는 구술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증언이 “‘말하는’/‘듣는’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합적 목소리”라는 점은 분명하다.[3] 그렇다면 이 집합적, 공동의 목소리는 누구에 의해 누구에게 어떻게 도달 가능한 목소리인가? 


이어 말하기 


이번 전시는 증언집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하는 전시는 아니다. 그것보다 이미 행해진 증언이 다른 시기와 형식 속에 놓였을 때의 맥락과 수용에 대해 고민해보는 전시다. 전시는 크게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졌다. 인트로 영상과 정정엽 작가의 회화 및 사진 작업, AI 인터렉티브 콘텐츠, 그리고 최경준 감독의 미디어아트 작업이다. 관람순서를 바꿔볼 수도 있겠지만, 관람객이 많지 않다면 일직선으로 나열된 각각의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동선이 가장 자연스럽다. 

전시 작품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인트로 영상은 피해생존자 고(故) 김학순의 증언을 시작으로, 이후 이어진 증언의 과정과 증언하기의 고통, 그럼에도 증언을 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피해생존자들은 증언하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알리고 기억하기 위해” 증언을 계속했고, 이를 통해 “지지자들을 만났”으며 “자신도 조금씩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은 “피해자, 운동가, 증언자”로 등장하고 “영원한 증언자로 남았다.”[4] 여기에서 증언은 피해생존자를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된다. 이런 증언의 절대성에 대해 프리모 레비는 ‘운 좋게’ 생존한 이들은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은 자들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5] 그리고 증언은 행해진 말뿐만 아니라 신체에 각인된 폭력의 흔적(정정엽, <벚꽃보다 나팔꽃이 더 예쁘다>)이나 삐뚤빼뚤 쓰여진 글씨(최경준의 미디어아트 작업)와 같이 비언어적 형태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음성화되지 않고, 가시화되지 않은 경험도 증언이 될 수 있을까?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소개된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과 박문칠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는 이런 발화되지 못한 증언과 발화되었으나 가시화되지 못한 증언들에 주목한다. ‘찾은 시(found poetry)’라는 이름을 붙인 에밀리 정민 윤의 작업은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시의 형태로 재구성하면서, 시의 여백과 증언 사이의 함축과 침묵, 공백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보드랍게> 역시 피해생존자 고(故) 김순악의 생전 인터뷰 영상에 기반한 일종의 ‘찾은 장면(found footage)’ 영화인데, 여기에선 왜곡의 우려로 인해 발화되었으나 삭제된 김순악의 귀환 후 삶이 조명된다. 

미디어 아트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found’ 작업과는 달리 두 작품은 자신들이 발견한 작업물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돌출하기보다 다른 맥락들 속에 ‘원본’을 다시 꺼내듦으로써 일종의 이어말하기와 따라 쓰기로서 ‘증언’의 재독해를 요청한다. 이는 이번 전시에 소개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증언’을 따라 말하고(최경준, 박문칠의 작업), 관람자가 직접 필사하고(필사테이블), 말해진 언어들을 자신의 표현 수단을 통해 재배치(정정엽, 에밀리 정민 윤의 작업)함으로써 말해진 증언은 다시 생명을 얻는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증언의 청자들에 대해 “청자는 기꺼이 증언을 공유하고, 증언자의 시공간을 확장하도록 돕는 공동의 목격자, 또는 2차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6] 행해진 증언을 따라 말하고, 다시 쓰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청자는 단순히 듣는 사람이 아닌 공동의 목격자가 되고 이를 통해 증언은 다시 공동의 목소리가 된다. 

 

듣기에서 ‘다시’ 묻기로 


전시장의 메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AI 인터랙티브 증언 콘텐츠로, AI 기술을 이용해 이용수와 이옥선 두 명의 피해생존자의 사전 녹화된 증언 데이터베이스에서 질문자의 질문에 호응하는 답변을 찾아주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당초 더 이상 증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예비하며 증언의 지속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처음 이름은 ‘영원한 증언’이다. 그러나 증언의 다양한 경험들이 이야기하듯 증언은 증언자와 증언이 놓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증언 자체가 변하기도 하고, 해석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증언의 영속화는 불가능한 기획에 가깝다. 또한 모니터 화면(screen)을 통한 대화가 어쩌면 증언의 생동성을 가리는 장막(screen)이 되는 것은 아닐지, 또 테크놀로지가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 한계들과 ‘매칭 시스템’이 증언을 평면화하고 모범적 답변들만을 제시하는 일종의 ‘계몽용’ 프로젝트가 되지는 않을지에 대한 우려 역시 관람 전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전시 프로젝트를 마주하는 순간 증언이 놓인 담론장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질문으로 바뀌었다. 

전시는 두 개의 스크린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관람자는 각 스크린을 통해 이용수, 이옥선을 각각 대면하게 된다. 실물 크기로 제작된 초고해상도의 화면은 전시 서문에 쓰인 “본 전시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한다. 특히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던 화면 속 인물들이 금세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할 때는, 관람 전 가지고 있던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비인간성에 대한 경계는 사라지고, 뜻밖의 친밀감마저 형성된다. 

AI 인터랙티브 증언 콘텐츠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인사말을 하고 난 뒤에 무엇을 물어야 할지, 어떤 언어로 물어야 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난감함을 덜어주고자 전시에는 예시 질문들이 준비되어 있지만, 이들의 이야기에 익숙한 이들에게 오히려 이 질문지는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고, 그렇다고 정형화된 질문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문들을 만들어내기에 나의 상상력은 빈곤하다. 결국 한참의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 “식사는 하셨어요?”다. 결국 나는 한참이나 근황에 관한 질문만 이어가야 했다. 그 순간, 증언집 4권 이후, 그리고 이용수의 기자회견 이후 제기되었던 ‘청자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묻기에서 듣기로’의 사고 전환 과정에서, 정작 듣기란 묻기를 포함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실감형 AI 인터랙티브 증언콘텐츠가 관람자에게 던지는 질문의 유효성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엇을 들을까가 아닌 무엇을 물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 제기하는 것. 잘 물어보기 위해서는 질문자의 끊임없는 고민이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묻기로의 재전환이나 회귀가 아닌 듣기의 과정 안에 묻기를 복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AI와의 대화가 개방된 장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루어진다는 점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증언자의 증언이 사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든,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든, 그것이 공적 장 안에서 다루어지는 한 공적 발화의 성격을 지닌다면, 질문자의 질문은 그동안 공적 장에서 쉽게 가려져 왔다. 질문자의 언어는 매끈하게 정리된 채로 기술되거나, 질문자 자체가 카메라 뒤로 물러나 있거나 하는 과정에서 질문자의 목소리와 얼굴은 지워진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질문자는 개방된 장소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해야만 한다. 수많은 트라우마적 사건의 증언자들이 고백하듯 증언하기는 증언자에게 고통을 남긴다. 증언함으로써 사건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고통과 더불어 공적 장에서 발화해야 하는 행위 자체가 불러오는 주목의 문제가 여기에 존재한다. 김수진은 대면 인터뷰 상황에서 질문자 역시 트라우마적 전이를 경험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7] 물론 이번 전시 프로젝트에서는 스크린이라는 막이 이러한 전이 경험으로부터 관객을 ‘보호’한다. 그럼에도 관람자는 자신의 언어가 공적 장소에서 ‘얼굴이 공개된 채’ 발화될 때 그 무게와 곤경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앞서 말한 증언콘텐츠가 갖는 단순화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비디오 증언이 법정의 증언이나 자전적 기술과 다른 점은 “멈춤, 침묵의 시간, 불완전한 문장, 빈정거림과 같은 열린 단락의 여지를 남기는 덜 정교한 형태”를 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8] 물론 이 말은 비디오 증언 역시 편집이나 자막, 사운드 보정 등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비디오 증언이 언어가 드러내지 못하는 증언자의 제스처, 표정, 휴지(休止)를 초과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9] 그러나 증언자의 침묵과 제스처는 AI 콘텐츠에서는 삭제되거나 제한되고, 침묵을 대신한 기술적 오류들–질문자의 질문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질문에 매칭되는 답이 없거나 하는 오류들–이 증언자가 아닌 관람자의 휴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기술적 오류들은 어느 정도의 개선이 가능하겠지만, 모든 질문에 가능한 모든 대답 영상을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AI 증언콘텐츠의 한계를 직시하되, 다른 한편에서 이런 오류는 증언콘텐츠가 생산된 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모든 것을 증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망하는 눈은 피해생존자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말해진 것을 어떠한 맥락과 형식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이를 각자의 몽타주로 그려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청자, 공동의 목격자, 공동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 도미야마 이치로(2002), 『전장의 기억』, 임성모 역, 이산. 
  2. ^ 프리모 레비(2014),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역, 돌베개. 
  3. ^ 소영현(2019),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구보학보』 22. 673-702쪽.
  4. ^ 따옴표 안은 인트로 영상에서 발췌. 
  5. ^ 프리모 레비, 위의 책. 
  6. ^ Assmann, A. (2006). “History, Memory, and the Genre of Testimony”. Poetics Today, 27(2), 261–273.
  7. ^ 김수진(2013), 「트라우마의 재현과 구술사: 군위안부 증언의 아포리아」, 『여성학논집』 30(1), 35-72쪽.
  8. ^ Assmann, A. 위의 글. 
  9. ^ 그러나 이 몸짓 역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거나 위반되는데, 김한상(2021)은 카메라 앞의 증언자의 몸짓이 이들이 마주하는 특정한 사회적 역할과 맥락 속에 놓인다는 점에서 이를 ‘사회적 몸짓’의 인용과 모방이라고 말한다 (김한상, 「다큐멘터리의 몸짓과 영상사회학적 실험/실천: <숨결>과 <보드랍게>의 피해생존자들의 경우」, 『현대영화연구』 44, 29-41쪽.)
글쓴이 배주연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영화를 중심으로 젠더, 기억의 재현과 시각장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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