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힘이 들었다.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라, 나는 이 책을 하루에 한 챕터 이상 읽지 못하였다. 도저히 사실이라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잔인함과 너무나도 압도적인 숫자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말 그대로 ‘글로벌’한 르포였기 때문이었다. 겨우 한 챕터를 읽어낸 뒤 용기를 내어 다시 책장을 넘기면, 거대한 참혹이 장소를 옮겨 또다시 재생되었다(이 지면에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자세한 내용 언급은 생략할까 한다). ‘전시(戰時) 성폭력’이라는 이다지도 거대한 부정의(不正義)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프리모 레비의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인가?”[1]
나는 조선 중기 광해군대에 발간된 행실도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다루어 석사 학위논문을 완성했다. 본래 행실도는 효, 충, 열이라는 유가의 세 가지 중대한 가치를 지키거나 충실히 이행한 이들을 모범으로 기록한 책이다. 일종의 미담 사례집인 셈인데, 조선시대 내내 수차례 발간된 다른 행실도들과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매우 특이하다.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행실도이기에 대부분이 국내의 사례일 뿐 아니라, 인물 수도 압도적으로 많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확고한 가부장제 속에서 그 형체조차 찾기 어려웠던 여성들이 대규모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1,587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행실도에는 821명, 그러니까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2]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걸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에 수록된 다음의 사례가 그 이유를 잘 말해준다.
처녀 류씨(柳氏)는 서울 사람으로 …(중략)… 나이 열넷일 때 임진왜란을 만나 외조모 김씨를 좆아 강에 빠졌다. [지나가던] 뱃사람이 손으로 건지고자 하니 류씨가 하늘을 우러러 이르되 “구차히 삶을 구함이 몸을 지켜 죽음만 못하니라”하고 드디어 빠져 죽었다. 소경대왕[선조] 대에 정문(旌門)하셨다.[3]
그러니까 저 이상한 이야기에서(목숨이 위태로운 판에 외간 남자의 손을 잡지 않겠다는 결의를 외치고 죽는 소녀의 이야기면 충분히 이상하고도 남는다) 외할머니와 열네 살 소녀가 강에 빠진 것은 다름 아닌 자살 시도였던 것이다. 나는 저 이야기가 조선 남성 권력자들의 상상일 것이라고 의심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다. 행실도를 출간했던 남성 권력자들도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시 성폭력이 만연했고 그 때문에 여성들이 차라리 자살을 택할 만큼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 그림 속에 슬쩍 보이는 무장한 ‘왜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남성들은 목숨을 바쳐 ‘정절’을 지킨 여성을 칭송함으로써 생존자들에게 낙인을 찍었고, ‘여성의 실절’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무마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소개할 책, 『관통당한 몸』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례는 태곳적부터 어디에나 있었던 현상이란 말인가?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전시 강간을 ‘전쟁의 흔한 부산물’로 여길 만한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강간의 목적은 적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기를 꺾는 것만이 아니었다. 야디지족과 보코하람에 납치된 나이지리아 소녀들, 로힝야족에게서 내가 목격한 것처럼 파키스탄군에게는 강간도 체계적인 전쟁 무기였다.
“개별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정책이고 이념에 근거한 정책입니다.”[4]
즉, 전시 성폭력은 명령 체계 안에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사용되는 ‘전쟁 무기’라는 것이다. 심지어 하버드대학교 공공정책학 교수 다라 케이 코언(Dara Kay Cohen)은 ‘전투원 사회화(combatant socialization)’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무장 집단들이 전시 성폭력을 그들 내부 집단의 ‘사회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342쪽). 그러므로 집속탄이나 생화학무기, 핵무기가 국제적으로 금지되는 것처럼, 성폭력이라는 전쟁 무기 또한 공식적이자 국제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르포답게 실증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 ‘실증’은 때론 위험하다.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반복되는 자극은 감각, 심지어 도덕적인 감각마저 무디게 만든다. 성폭력과 학살, 고문이 생생하게 재생될수록 그 참극은 탈맥락화한다.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끔찍하기 그지없는 사례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독자의 도덕적 미성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로힝야족이 겪은 고통에 아웅산 수치가 눈을 감는 이유는 정치 때문이지만, 이 책은 각 사례의 맥락을 깊이 있게 살피지는 못한다. 전시 성폭력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으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군대의 규율이 잘 잡힌 곳에서는 성폭력이 불가피한 현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456-457쪽)는 순진한 서술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강점은 비극을 생생히 재생하는 점에 있지 않다. 책을 펴자마자 쏟아지는 비참의 평원에서 독자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지만, 조금 정신을 차리면 이 책의 서술 대부분이 ‘증언’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저자가 취재한 것은 문서 더미나 증거 사진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생존자 혹은 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들은 악몽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고통은 물론이고 사회적 비난과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147쪽) 새로운 정의를 위하여 고통의 순간을 증언하는 이들의 기억, 눈빛, 말, 그리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서서히 자리 잡는 공감과 연대. 이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괴로움 따위를 감히 말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에도 여전히 전시 성폭력은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전쟁 범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결국 전쟁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1980년대 학교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배울 때 교과서에는 집단 강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남자들의 전쟁처럼 보였다.(240쪽)
이브 엔슬러[5]는 나와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성폭력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남자들은 다 어디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우리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남성들의 문제입니다.”(343쪽)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인 강간이 어떻게 전시에는 문제시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241쪽)라는 저자의 질문은 정확하지 않다. 전시이든 평시이든, 성폭력은 애초에 보편적으로 비난받지 않고 있다. 이 책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남성들의 발언처럼, 그리고 성폭력 희생자가 오히려 저주를 받은 메두사의 사례처럼, 많은 남성이 성폭력을 여전히 “정상인 것처럼”(382쪽) 여긴다. 이 책은 분명 전시 성폭력을 다루고 있으나, 저자는 긴 후기에서 전쟁터 외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을 덮는 독자는 ‘전시’를 떼고 현실을 바라봐야만 한다. 이 책 속의 비극이 비단 전쟁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나 역시 책을 덮고 현실을 바라본다. 명백히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은 범죄를 두고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성폭력 과정에서 여성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그 여성이 피해를 ‘당할 만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닌다. 아동에게 성폭력을 가한 남성에게 ‘심신미약’이라는 방어막이 마련된다. “이건 남성들의 문제”임에도, 그건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피해자보다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기분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발언과 주장이 가볍디 가볍기에,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역자가 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무거운 책인 만큼 매우 세심하게 번역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제목의 번역은 좀 의아한 부분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Our Bodies, Their Battlefield’이다. 물론 ‘관통당한 몸’이라는 제목도 깊이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번역으로, 전시 성폭력을 다루는 책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근거 없는 의심(?)을 하게 된다. ‘젠더 이슈’라는 말조차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2022년 한국 사회에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이 어떤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이 책의 목소리를 전시의 상황일 뿐이라고 제한적으로 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콩고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오랜 시간 치료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니스 무퀘게 박사는 “한 여성이 자기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정할 때 그건 자신이 회복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내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게 놔둘 수 없다고 말하는 것”(492쪽)이라고 했다. 그러니 앞서 소개했던 ‘류씨’의 상상된 목소리가 아니라, 이 책 속 실제 여성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를 소중히 담아 듣고 그들의 귀환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쉽게, 그리고 아프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읽어야 할 책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당연한 말에도 무엇인가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더욱.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마녀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황무지로부터 여성은 돌아온다.[6]
각주
-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 ^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할 것. 정일영,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 시대적 배경과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국어사연구』 17, 2013.
- ^ 『동국신속삼강행실도』(영인본), 559쪽, 《柳氏投江》.
- ^ 크리스티나 램, 『관통당한 몸』, 강경이 옮김, 한겨레출판, 2022, 121쪽. 이후부터 이 책을 인용할 때에는 본문에 쪽 수만 표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 ^ 편집자 주: 극작가이자 사회운동가. 주요 저서 『버자이너 모놀로그』, 『아버지의 사과 편지』 등
- ^ 앨런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박혜영 옮김, 동문선, 2004, 13쪽.
- 글쓴이 정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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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죽음과 노동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 〈역사에서 기억으로〉(공저), 〈서울 사람들의 생로병사〉(공저) 등의 책과 〈해방 후 한센인 자녀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양상: 1960-70년대 한센인 자녀 공학 반대 사건과 미국 입양 사례를 통하여〉, 〈국가폭력 이후의 사면: ‘가해자의 관용’과 ‘피해자의 용서’- 1980-90년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면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현재 서강대 사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