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청자였던 적이 없다. 미디어에 쏟아져 나오는 피해자의 말을 읽을 때 자주 화가 났다. 누구나 쉽게 미디어에 가해자를 고발하고 피해를 밝힐 수 있는 시대라지만, 피해자가 말을 할 수 있으려면 피해자의 말을 들어주는 청자, 응답하는 청자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성폭력 피해자의 글이나 피해자의 글에 달린 공감과 응원, 가해자를 향해 분노와 처벌을 요구하는 댓글을 읽을 때면 혼란스럽고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지곤 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2차 가해자,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한 명예 남성이라는 비난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정말 가해자의 처지에서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 정작 나는 피해자의 서사를 읽으면서 매번 내가 겪은 폭력의 경험을 고스란히 떠올리는데?
매일 되새기지 않는, 조금은 잊힌, 부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을 복기하게 한다고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한 가족, 상사, 동료를 고발하는 이들에게 화가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피해자의 용기를 주저 없이 지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은 감정과 억울한 심정이 얽혀 더 큰 혼란을 만들어냈다.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비판적 지성을 가장했다. 온라인 해시 태그 성폭력 고발과 미투가 이어지는 동안, 새롭게 등장하는 피해자의 글,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비난의 반응을 읽으면서 나는 전복적인 시대에 생겨날 수 있는 윤리적 누수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공동체에서 가해자를 골라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직면한 윤리적 질문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고 중요하지만 시시한 소리를 적지 않게 늘어놓았다. 고발당한 사람이 창작자일 때는 나의 전공과 지식을 동원해서 작품은 작가에게 속한 것이 아니므로 작가를 처벌하더라도 작품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내가 했던 말에는 담론적 근거가 있다. 내가 한 말은 파렴치하지 않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강박적으로 말했다. 미투의 열기 속에서 피해자를 위해 연대하기보다, 미투의 열기에 녹아내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나의 분노와 고통, 회피, 변명, 정당화의 패턴을 관찰하는 일에 매달렸다. 골몰하는 시간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피해자로서 피해자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이미 홀로 직면했던 피해를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발견하는 일은 무엇 때문에 나를 화나게 했을까? 피해자성에 대한 격렬한 부인이라는 말로 이 모든 혼란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여하튼 나는 내가 피해의 경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불안했기 때문에, 부인에 대해서도, 비겁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변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열심히 ‘격동의 역사에 휩쓸리고 마는, 예기치 않게 생겨나는 또 다른 피해자’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피해자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피해자성, 소수자성, 타자성을 지닌 사람들이 맺을 수 있는 연대를 곧바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적어도 SNS를 통해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 고백, 호소가 쏟아져 나오던 첫 번째 시기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강박적 자기변명에 매달리며 피해자에게 제대로 연대하지 못했던 일은 경솔하고 무책임한 일이었지만 그에 대한 자책을 드러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혼란이 묻어있는, ‘아직’ 피해를 스피크 아웃하지 않았거나, ‘영원히’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이미 ‘내면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피해자로서 ‘밖으로’ 말하기를 거부하는 피해자(가 아닌 자)의 목소리에 관하여 쓰고 싶었다. 피해를 스피크 아웃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피해자의 까다로운 변증법을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 피해자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처럼 듣는다는 것은, 나를 대리하여 발화하는 피해자를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에 관해 쓰고 싶었다. 이 역시 피해자로서 말하기의 고유한 모순과 고통이기 때문이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제이 로치, 2020)은 폭스 뉴스 회장을 성폭력 혐의로 고소한 폭스 뉴스 여성 아나운서의 2018년 스피크 아웃을 다룬 영화다. 그의 고소는 간판 아나운서를 포함, 피해를 겪은 동료들의 추가 고소를 끌어냈다. 간판 아나운서(그레천 칼슨)의 첫 번째 고소가 진행되는 사이, 과거 같은 상사의 성폭력을 경험한 또 다른 간판 아나운서(매긴 켈리)는 갈등한다. 매긴 켈리는 단지 피해를 부정하고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모는 타인의 수군거림과 괴롭힘에 대한 염려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다. 스타 아나운서인 그는 고발에 동참하게 될 때 피해자-약자라는 낙인을 얻게 될 것 역시 두려워한다. 다시 말하자면 피해자가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기 위해 다투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타인의 공격, 괴롭힘, 비방만이 아니다. 성폭력은 인격을 훼손하는 폭력이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일, 성폭력 피해자, 나아가 희생자임을 밝히는 일은 존엄의 훼손을 경험했다는 자기 인식, 약자의 위치에 처해있다는 자기 인식을 가질 때 가능하다. 역설적이게도 피해자는 존엄한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존엄의 훼손, 가해자, 상황, 사건, 폭력을 증언해야 한다. 훼손의 입증을 통해 훼손되지 않은 존엄성을 지닌 인간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피해자를 ‘짓밟힌 가녀린 꽃’이라 칭하는 동정의 여론은 피해자를 영원한 약자의 위치에 고정한다. 피해를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상처’로 표현하는 일은 피해자의 존엄을 상처 난 것으로 명명한다. 법의 법정과 공감의 법정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악몽’과 같은 표현을 통해 피해의 심각성과 영구성을 입증하고 강조하는 피해자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법정과 사회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법정과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는 바람직하고 타당한 주장이다. 그래서 피해의 과거, 현재, 미래, 영향과 극복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일의 곤란함이 더욱 커진다.
나치 장교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은 나치의 악마성에 대한 증거와 생존자의 증언이 쏟아졌던 재판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번역, 한길사, 2006)에서 폭로된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증언대에 선 증인의 용기를 치하하는 데 인색했다. 대신 아이히만을 납치해서 재판한 예루살렘 법정의 정당성, 나치 치하 유대인의 순응을 문제 삼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아이히만의 행적을 재검토하며 “악의 상투성”과 “무사유” 등의 표현으로 ‘최종 해결’ 실행자 중 한 사람인 아이히만의 책임을 상대화했던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런데 유대인 사회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격렬하게 비난했던 것은 책에 몇 번 등장하지 않는 “악의 상투성”이라는 문구 때문만은 아니다. 아렌트는 한편으로 아이히만 재판이 “피고에 대해 요구된 형량을 가늠하고 판결을 내리고 적절한 처벌을 내리는” 법의 주된 업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복수의 권리에 대한 요구 만족”을 위해 열렸다고 비판한다. 이때 아렌트는 법의 이름으로 동족 피해자의 고통을 고려하는 일, 공감하는 일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멀리한다.
다른 한편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이 공동체의 가치와 ‘정의’를 위한 재판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피해자의 고통을 다루는 재판으로 축소되면서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유례없는 나치 범죄의 성격을 제대로 다루는 것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은 일반적인 범죄를 다루는 재판과 같은 차원의 재판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돌아보는 일을 정의의 숙제로 삼지 않는다. 유대 사상가 숄렘은 아렌트가 “사려 깊은 방식으로” “유대인의 딸”로서 말하지 않았다고 적은 서한을 보낸다. 아렌트는 책을 펴낸 후 민족을 배반한 유대인, 독일인화된 유대인, 냉혹한 지식인, 감정적으로 가해자를 두둔한 여성으로 비난받았다. 독일인 사상가, 수용소를 경험한 유대인, 미국인 필자 한나 아렌트, 동족의 1/3이 몰살당한 역사적 재난의 가해자와 고통을 호소하는 법정 안팎의 동족 피해자 사이의 아렌트, 개인적이지 않은 것(impersonal)을 주제로 가장 친애하는 여성에 대한 책(<Rahel Varnhagen: The Life of a Jewess>)을 펴낸 아렌트, 연민(pity)과 연대를 구분하려고 애쓰던 아렌트, 아이히만의 법정 방청석에서 재판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카메라를 바라보던 아렌트, 피해를 소비하는 이스라엘의 국가주의와 미디어의 선정성을 목격하고 있는 정치철학자 아렌트가 느꼈을 곤란, 피해자와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아렌트를 상상해본다. 아렌트는 독일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고통과 훼손의 이미지 속에 유대인을 가두기를 거부하지 않았을까? 아렌트가 질문하지 않고 질문했던 바는 피해의 존엄성이 아니었을까? 고통의 겪음(피동)과 고통의 주장(능동), 훼손과 회복의 변증법을 생각하지 않고서 피해자가 된 피해자의 존엄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한꺼번에 약자, 훼손당한 자, 분노의 한가운데 있는 자,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을 거부하는 자, 용기 있는 자,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겪는 특별한 고난이다. 역설적으로 피해자는 한꺼번에 이 모든 존재일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 속에서 특별한 존엄을 갖는다.
유년기 친족 성폭행의 경험을 담은 소설 『근친상간』(L'Inceste, 1999)으로 명성을 얻은 크리스틴 앙고(Christine Angot)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논쟁적인 프랑스 중견작가다. 2017년 그는 한 심야 토크쇼에서 환경 정당 내 성폭력을 고발한 후 펴낸 에세이 『말하기 Parler』를 소개하러 나온 여성 정치인(산드린 루소, Sandrine Rousseau)에게 책의 서사와 주장이 빈곤하다고 지적하고, “여성을 희생자의 지위에 가두려 한다”는 독설을 퍼부어 대중의 격렬한 질타를 받았다. 정치인은 피해자의 스피크 아웃의 치유적 의미를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내놓을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펼쳤을 뿐이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프랑스에 성폭력 경험에 대한 말하기가 전무한 것에 대한 충격” 속에서 책을 썼다고 밝히며, 여성 일반이 (자기 경험을) 말할 수 있는 문화를 위한 교육과 응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작가는 자신이 겪은 강간을 말할 수 있는 이는 각 개인 자신뿐이라며, 여성 일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정치인을 힐난했다. 정치인은 “나는 내가 겪은 것을 썼다, 이것은 틀림없는 내 이야기다”라며 눈물을 터트리고, 방청객은 “나의 강간”을 내뱉으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는 작가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이후 점잖은 매체에는 두 명의 여성, 두 사람의 피해자, 두 가지의 고통, 두 가지 방식의 말하기를 언급하는 글이 실렸지만, 대중의 반응은 텔레비전 토크쇼 현장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해자의 말이 공적 공간에 비로소 쏟아져 나오는 미투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대중에게 작가는 피해자를 다시 공격하는 가해자와 다름없었다. 논쟁적 작가의 또 하나의 미디어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될지 모를 이 장면은 내게 깊은 충격을 안겨줬다. 해소될 수 없는 심리적 난폭함이 두 가지의 피해 경험과 자기 자신의 고통을 목격한 두 사람의 증인, 무대 위와 무대 뒤-작가는 야유가 쏟아지자 녹화 현장을 박차고 일어나 대기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의 두 울음, 그리고 피해자의 말을 듣는 청자, 연민하고, 분노하고, 비난하며 연대하는 청자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제3세계 여성의 진실을 대리 표상하려는 서구 페미니즘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비판하고, 글을 쓴다는 행위와 타자 표상의 밀접한 얽힘에 주목했던 오카 마리라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자기가 겪은 폭력의 경험을 표상할 수 있는 글쓰기의 특권을 가진 작가(크리스틴 앙고)가 자기의 고통을 스스로 발화한 피해자에게 표상의 이름으로-앙고는 피해 경험을 다소 상투적인 묘사와 연상 작업을 빌려 기록하는 루소의 글을 인용하며 “당신의 책에는 이야기가 있을 뿐 아무런 담론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폭력을 휘두른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서구 세계의 두 피해자의 관계를, 말을 빼앗긴 제3세계의 타자와 발화 권력을 지니고 있는 서구인의 관계에 비교할 수 있을까? 연민과 연대를 구분했던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경청했던 오카 마리, 타자의 증언을 듣는 일, 타자의 고통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는 일은 타자가 겪은 사건의 ‘정보’를 전달받는 일이 아니며, 타자의 사건에 대해 철저히 무력한 존재로서 사건을 나눠 갖는 일이라고 썼던 오카 마리, 공감의 말을 찾는 조건은 고통을 겪고 있는 타자와의 동일화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감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카 마리라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새롭게 불어오는 시대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만이 연대와 연민은 구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는 모두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인 것은 아닐까?
이 글에서 나는 피해자 되기에서 겪었던 복잡성과 혼란의 경험을 불러냈다. 의문문이 가득한 글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의 피해 경험 역시 모든 사람의 피해 경험과 ‘다르지 않게’, 나에게 ‘고유하다’. 우리는 선의와 악의를 가지고 타자의 경험을 해석한다. 제도의 언어를 동원하고 ‘모두’의 경험으로 상상하게 한다. 정말 다행스럽고 안타깝게도. 나는 아마도 근대적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표상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개인, 자신의 주장을 밝힐 지식과 언어를 배운 사람, 입은 피해를 다시 읽는 사람, 쓰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인식한다고 가정된 근대적 주체의 분열을 두려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웠고 질문을 멈추지 못했던 것인지, 그런데도 답을 구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함에 관하여 쓰는 것도 스피크 아웃의 역할일 테니까, 피해자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것일 테니까 나는 써보기로 했다.
- 글쓴이 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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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문화연구자. 영화, 무빙 이미지, 재난 이미지, 인류학적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유럽영화운동〉, 〈알렉산드르 소쿠로프〉(공저), 〈하룬 파로키〉(공저), 〈풍경의 감각〉(공저), 〈어둠에서 벗어나기〉(역서), 〈색채 속을 걷는 사람〉(역서) 등을 펴냈다. 현재 동의대 영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