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도쿄에서 12월 8일에 열릴 ‘여성국제법정’을 앞두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병원 진료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한 적이 있었다. 수십여 명의 할머니들이 인천의 한 병원에서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산부인과, 내과, 외과, 정신과를 돌며 종합 진찰을 받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었는데, 영상이 모의법정에서 ‘증거물’로 채택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는데,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직접 듣게 될 증언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지 고민하며 영화패 후배들과 병원에 도착했다. 그전까지 피해자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증언이라는 것이 인스턴트 음식처럼 질문과 동시에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쯤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카오스가 펼쳐졌고 나는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병원에서 할머니들은 차례로 산부인과 진료 의자에 누워 의사들에게 몸을 맡긴 채 하복부나 생식기와 관련한 상처들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상처가 생긴 시기와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할머니들은 엉뚱한 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테면 “할머니 이건 ‘위안부’ 시절에 생긴 상처예요?”라고 의사가 물으면 갑자기 ‘나이 많은 영감에게 시집간 스토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식이었다. 남편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얼마나 자상했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도, 결국 할머니의 남편은 몸에 남겨진 상처와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 나중에 정신과로 옮겨 생애구술사를 받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몸속 상처들은 ‘위안부’ 시절 얻게 된 것이었지만, 해방 후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감(남편)이 자신을 받아주고 죽을 때까지 잘해줬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산부인과 의사가 몸속 상처에 대해 질문했을 때, 할머니는 그 상처가 생겼던 ‘위안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 상처와 관련해 가장 고마웠던 죽은 남편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날 현장은 이와 같은 구술자와 면담자 사이의 말과 말들이 날아다니는 경연장과 같았고, 나는 카메라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며 피해자의 몸을 열심히 촬영했지만 번번이 어떤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그날 유독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서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 계기나 하루에 몇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는지와 같은 중요한 질문에 긴 침묵을 유지하거나 단어 몇 개로 된 짧은 문장을 내뱉을 뿐이었다. 힘겹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중, 면담자가 해방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했을 때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만주의 한 유곽에 있었는데 어떤 일본 장교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자 그녀도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돈 대신 가지고 있던 비단 치마저고리 아홉 벌을 껴입고 출발했다. 부지런히 귀향 행렬을 따라 걸어갔고, 압록강을 만나자 ‘헤엄쳐’ 건넜으며, 다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걸어 내려오며 아홉 벌의 비단 저고리를 하나씩 팔아 노잣돈으로 썼다고 했다. 그때 나는 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별이 안 되는 이상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고,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이 반짝이며 열정적이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하지만 곧 해방 후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초반에 보여줬던 극히 침울하고 말수가 적은 상태로 돌아갔다. 모든 진료가 끝나고 할머니는 진료대기실로 돌아갔는데, 내 눈에는 유독 그 할머니만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다른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곳과는 떨어진 구석의 의자에 혼자 누워있었다. 혹시 불편한 곳이 없는지 이것저것 살펴드리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다른 할머니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귓속말로 “저 여자는 가짜예요. 우리랑 완전 다른 여자예요. 걸레라고 걸레”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면서 ‘저 할머니는 정부의 지원금을 타 먹으려는 가짜’라는 말을 반복했다. 순간 그분이 사용한 ‘걸레’라는 표현과 ‘가짜’라는 말에 깜짝 놀라 나의 몸도 경직되었다. 그제서야 ‘위안부’라는 경험은, 단지 어느 시공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재에 반복되고 있으며, 피해자 그룹 안에서조차 누가 ‘진짜’ 피해자인지를 두고 ‘구별 짓기’ 한다는 것 자체가 ‘위안부’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아홉 겹의 비단 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들을 기지촌 현장에서도 계속 만나게 되었고, 우리가 ‘증언’으로 부르는 말들이 어떠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이 선택되는지, 도대체 증언과 이미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대체로 그것이 생성된 장소를 떠나 외부로 퍼져나갈 때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수록 이야기는 계속해서 점점 더 좁은 문을 통과하며, 애초의 복잡성을 포함하던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특정한 부분만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버려지며, 또 남아있는 요소들이 재구성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체로 그 이야기를 최초로 ’만들거나’ ‘전달한’ 사람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어떤 원형을 남기고 끊임없이 변형, 대체되면서 ‘현재’적 시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 간다. 만약 어떤 이야기가 ‘현재’로 계속 소환되어 유통되지 못하면 그 이야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즉 ‘이야기할 거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거나, 기록이라는 형태로 아카이브 센터라는 ‘무덤’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진적 이미지와 영상들은 애초에 그것들이 생성된 장소(scene)와 관계를 갖지만, 결정적으로 ‘찍혀지는 순간에’ 의미가 생성된다. 그리고 애초에 그것을 촬영한 사람(대체로 찍혀진 이미지 속에는 보이지 않는다)의 어떤 ‘의도’가 부여되기는 하지만, 이미지의 도상적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는 원래의 의도와 별개로 계속해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수용, 선택, 변형의 과정을 거친다.
92년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살해당한 ‘윤금이’의 사진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에 의하면, ‘윤금이’가 살해당한 현장 사진의 공개는 공대위[1]에서 결정되었다. 공개 여부를 두고 찬반이 갈렸지만 “이 사건은 말로 설명해서는 공감할 수 없으며” 결국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데 사진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공개하자는 입장 안에서도 고인이 여자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어떤 성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킬까 봐” 우려했는데, 남성 운동가들에게 “여성의 벗은 몸, 살해당한 몸은 민족의 상처, 수치였기 때문”이라고 정희진은 적고 있다. ‘윤금이’ 사건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기지촌에서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윤금이’ 사건만큼 사회적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시에 윤금이 시신은 ‘사진’으로 우리가 본 것이지, 그 사진이 만들어진 장소(scene)에서 본 것은 아니라는 점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사진이 도상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벌거벗은 채 바닥에 누워 죽어있는 여성이며, 신체에 가해진 여러 흔적들은 그가 잔인한 폭력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높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미지가 가리키는 현실의 지표-이 여성은 누구인지, 왜 살해당했는지-에 대해 사진이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으므로 우리는 프레임 밖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진 속 여성은 ‘윤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시신 사진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의미’를 획득해 나갔다. 그녀는 불합리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때문에 미국의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 태어난 불행한 여성이 되었고, 따라서 이 살인사건은 ‘우리 민족’의 문제가 되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히빠리’(편집자 주: 일본어로 ‘잡아당기다’라는 말. 호객행위를 뜻하기도 하며, 업소에 소속되지 않은 기지촌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꽃과 성판매를 하던 행위를 뜻하기도 함)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비천한 성매매 여성은 별안간 ‘순결한 우리 민족의 누이’가 되었다. 하지만 사진의 공개와 함께 만들어진 대중 캐치프레이즈들은 당시 ‘윤금이’를 민족의 일원으로 확장할지언정 ‘기지촌’이라는 장소를 제거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시민운동가와 여성 운동가들이 사건이 발생한 장소인 동두천에서 시위를 이어갔으며, 언론에서는 끊임없이 사진이 생산된 ‘장소’인 기지촌에 대한 심층 취재와 담론이 생산되었다. 비록 더 많은 시민들의 호응[2]을 받게 하기 위해 ‘순결한’ ‘누이’라는 상징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윤금이의 사진은 기지촌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금이’를 살해한 케네스 마클의 구속과 재판이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그녀의 시신 사진은 점차 그 사회적 역할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10여 년 만에 미선이·효순이 사건(2002)으로 다시 불특정 대중 앞으로 불려 나오게 된다. 이번에는 ‘미군 범죄’라는 키워드로 또다시 대중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992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사진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 즉 지시하는 대상과 그 의미의 관계가 좀 더 단순해지고 도구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진이 ‘기지촌’과 맺고 있던 장소적 지표 관계가 희미해졌다는 점이다. ‘윤금이’는 오직 끔찍한 감정을 유발하고, 따라서 미군에게 분노할 용도로 쓰였는데, 이 과정에서 ‘윤금이’는 ‘벗은 여성의 몸’이라는 도상적 기호, 즉 보편적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상징이 강화되었고 많은 여성들에게 성적 수치심과 불쾌감, 모욕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반미운동의 목적으로 ‘윤금이’ 사진을 시위에 사용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당시 우리가 알고 있던, 당사자들인 기지촌 여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이 이미지를 ‘폭력적’이라며 보기를 괴로워하는 기지촌의 젊은 활동가들에게 ‘이런 것도 못 보고 우리를 어떻게 이해해, 더한 것도 얼마나 많은데’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대신 기지촌 여성들은 ‘창녀’들이 미군에 의해 죽어 나갈 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시민들이 순결한 중학생들이 죽자 자신의 일처럼 마음 아파하며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고 ‘윤금이’ 사진은 당사자들의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반미운동을 위해 선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었다가 폭력적이라는 강한 비판을 받고 점차 시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윤금이’의 사진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윤금이’ 사진을 어떤 경우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목소리로 확장되었고, 점차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을 겪으며 ‘보지 않을 권리’까지 말해지고 있다. ‘윤금이’ 사진은 기지촌의 지표성을 점점 상실해 가는 방향으로 잔혹한 도상의 이미지, 즉 정치적 맥락이 지워진 포르노그라피적 이미지로 우리 앞에 다시 재의미화된 것이다.
기지촌에서 여전히 생존해 있는 여성들과 계속 영화를 만들어 가는 입장에서, 나는 ‘윤금이’ 사진의 도상적 재현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시하는 측과, 이에 대한 비판으로 ‘이미지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계속 누락되고 삭제되는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윤금이’ 이미지를 금지함으로써 사진에서 훼손된 시신이 가리키는 것, 시신을 촬영한 구도가 말해주고 있는 것, 시신이 누워 있던 방이 말해주는 것 등, 프레임 내부가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프레임 밖의 장소, 즉 도상이 지시하는 의미를 둘러싼 첨예한 정치적 문제들을 더이상 섬세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범죄의 도구이자 목적이 되었던 디지털 성폭력 사건들과 ‘윤금이’ 사진이 만들어진 역사성은 같지 않다. ‘윤금이’ 사진은 범죄의 도구나 목적이 아니라 범죄의 결과로 생겨난 이미지였으며, 그녀의 사진이 불쾌감과 수치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윤금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정들은 오직 우리가 무엇을 선정적이고 선정적이지 않다고 느끼는지 결정하는 사회적 담론의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윤리적이다’라는 말을 하기에는 무언가 덜컹거린다. ‘윤리적’인 이미지, 윤리적 재현이라는 말 또한 ‘선정적이다’라는 말과 유사하게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는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더 ‘윤리적’이 된다고 믿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미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1985)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사진기록을 단 한 컷도 사용하지 않고 증언만으로도 학살이라는 문제와 생존자에 대한 매우 성찰적인 미학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장 뤽 고다르가 벌인 유명한 ‘재현의 정치’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이미지에 대한 금지의 욕망 뒤에는 ‘재현 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학살의 고통을 유대인의 것으로 독점하고, 다른 문화권이나 민족의 학살과 비교하지 못하도록 위계를 두려는 욕망, 즉 고통의 독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은 9.11테러사건이나 이라크 전쟁 중 사망한 민간인과 미군의 시체가 미디어에 유통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시체 사진이나 가난한 국가의 재난으로 발생한 시체 사진은 미디어에서 자율적으로 유통시키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공의 기억에서 무엇을 누락시키고 건져 올릴지 결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락하는 행위야말로 권력의지이며, 우리에게 한정된 서사를 강요하는 폭력은 아닐까? 우리에게는 누락할 권리가 아니라 오직 해석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각주
- 글쓴이 김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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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2004년부터 미군 기지촌의 인물과 공간을 다룬 다큐멘터리 작업과 다양한 시각예술 작업을 해왔다. 장편 다큐멘터리 데뷔작 〈아메리칸 앨리〉(2008)로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뉴아시안커런츠 부문 오가와 신스케상을 수상했으며, 두 번째 장편 〈거미의 땅〉(2013)은 핫독스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 이흘라바국제영화제,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19년 작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일본 이미지포럼 영화제에서 테라야마 슈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