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가

이혜령

  • 게시일2022.07.28
  • 최종수정일2022.08.01

이 글의 제목과 내용은 다음 졸고에서 추린 부분이 많다.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 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오혜진 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논의가 장미대선으로 당선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활발했던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가 몇 분 남았는가가 각별한 관심사였다. 2017년 7월 23일 김군자 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신문은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는 헤드라인으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1면 기사를 내보냈다.[1] 그 후로도 여러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기정사실화되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외에 다른 전쟁 또한 유발될 것 같은 신냉전의 세계정세 속에서였다. 2022년 5월 2일 또 한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자 운동가이셨던 김양주 님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가 올라왔다. 김양주 님의 부고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과정은 지역과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위안부’ 문제가 더 활성화되는 정치적, 사회적 연결망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2] 그 기사는 2022년 5월 2일 정부 등록자 240명 중 11명이 생존해 있음을 아울러 보도했다.[3] 기사는 1면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2017년에는 정부 등록자가 239명이었는데, 그 사이에 등록자가 1명 늘어 240명이 되었지만 피해 생존자는 이제 11명이다.

부고와 함께 셈해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숫자는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중 살아있는 이들의 숫자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란 1993년 6월 11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과 함께 피해자 신고, 심의, 결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자를 뜻한다.[4] 이것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셀 수 있게 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피해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정작 피해 생존자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진행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운동해왔던 생존자들에게서도 주장되는 바이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는 “살아있는 내가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요즘 잠이 오지 않는다. ‘할머니들 다 죽기를 바라느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할머니들 소원이라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5]
  
그런데 애초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 존재였던가? 어떻게, 얼마나, 어디에서 모집, 동원되었는지 그 전모를 증명할 증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국내외 역사부정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며, 발굴 및 공개된 증거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기에 그 주장은 과장되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따위의 증거 부족, 증거 부재야말로 ‘위안부’는 셀 수 없는, 애초에 그 삶과 죽음이 셀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음에 대한 역설적 웅변 아닌가. 20만 명을 상회할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조선인 ‘위안부’는 그 추정치가 일본군, 일본군 부대의 숫자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6] 일본군‘위안부’에 비해 일본군으로 동원된 조선인 수의 추정은 아주 구체적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 가운데 최저치를 적용하면 육군특별지원병 16,830명, 학도지원병 3,893명, 육군징병 166,257명, 해군(지원병 포함) 22,299명 등 군인 동원 총수는 209,279명이라고 한다.[7]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세세히 셈해질 수 있었는가? 다카시 후지타니는 “조선인의 전시동원으로 인해 이들은 직접적으로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이 되었다. 즉 조선인들은 생명관리권력(bio-politics)과 통치성의 레짐 안으로 편입하게”[8]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그들의 죽음까지 셈할 수 없었다는 데서 문제가 있으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는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 자체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비단 조선인 ‘위안부’에 국한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셀 수 없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셀 수 없는 자들을 셀 수 있는, 가시적이고 기지적(旣知的)인 존재로의 범주화는 피해 생존자 김학순(1922-1997)의 커밍아웃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과 거기에 조응한 한국 정부의 지원에 따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신고 및 등록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고 및 등록은 피해자/생존자를 셀 수 있는 범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고와 등록 절차에는 커밍아웃이라는 과정이 수반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등록은 커밍아웃으로서의 증언, 증언으로서의 커밍아웃을 공신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장치였다는 점에서 운동을 안정화, 규범화하는 데 기여하였다.[9] 증언의 집적인 일본군‘위안부’ 증언집은 신고와 등록의 절차를 밟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바다를 이룰 만큼 ⓒ백정미


그런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 주어진 대상자 등록이란 최종적으로는 심의와 결정, 통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라는 진술이 심의 결과 부정되어 등록되지 못한 분들은 과연 없었을까? 해봄직한 상상 아닌가?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이나 목격자 등 제3자의 증언)가 있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대상자 등록 신청은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진 것일까? 결정을 통보받지 못한다면, 그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서의 이 법의 제정과 시행 과정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다. 법의 제정과 시행 또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출현과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를 한국 정부의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해 있는 상황은 이제 한계 지점에 이른 것 같다. 지금까지 효과를 발휘했던 범주화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중층적이고도 복합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증언한 피해 생존자 배봉기(1914-1991)의 삶은 이 지점에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군이 통치하던 오키나와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자 1975년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오게 되었음을 증언함으로써 ‘특별 재류’ 자격을 얻게 된다.[10] 임경화는 “이로써 배봉기는 30년 만에 국가에 등록되었다”[11]라고 썼다. 배봉기의 삶은 보이지 않게 살았던, 즉 셈해질 필요가 없었던 존재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비인구적 성격을 삶 자체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한 성격은 한편으로 침묵됨으로써 생겨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김현경은 “귀환하지 않은/못한 일본군‘위안부’”인 배봉기의 삶과 죽음은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라는 힘이 주조했으며 미국, 일본, 남한 간의 위계질서의 착종 속에서 일분군‘위안부’ 문제를 비가시화하고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고 있었음을 날카롭게 논증하였다.[12] 미국 신탁 통치하 오키나와 조선인을 불가시화화하는 법적 구조의 포위망 속에서, 또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삶과 전쟁 경험, 전후의 고통을 발화할 수 있는 장이 없었기 때문에 배봉기의 삶은 가시화될 수 없었다. 1975년 공적 증언에 의해 배봉기의 삶이 알려졌으나, 냉전의 남북 체제 대결 구도가 일상화된 남한 사회에서 그즈음 조총련 활동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청중은 없었다. 나아가 그의 유골의 소유권을 두고 민단과 조총련은 배봉기를 대신하여 말하고자 함으로써 배봉기의 목소리를 지우고 말았으며, 남한에서는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이슈화가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계 안에 있지 않은 ‘위안부’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로 그의 주검과 귀향을 둘러싼 논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한다.[13]
 
국가의 경계 안에 있는 ‘위안부’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이 비가시화와 침묵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인가의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국내 반페미니즘 정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고해진 신냉전에의 편승 기류가 심상치 않다. 여성가족부 사이트에 시, 도별 지원 대상자의 수를 써넣은 간단한 도표는 언젠가 축소되어 마지막 한 명조차 유명을 달리해 사라질 날을 초조하게 또는 공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나마 등록자가 240명이었음을 그 표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헌미는 240명과 20만 명 사이에서 ‘가라앉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 이헌미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말을 언급했지만, 나는 도미야마 다에코(1921-2021)의 그림 <바다의 기억> 시리즈가 떠올랐다.[15]

남태평양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죽어서도 살아있는 ‘위안부’들과 해골들, 일본군, 총과 사물들, 샤먼과 원주민들, 물고기와 새, 나무들. 그 존재들을 셈할 수 있는가? 배봉기와 김학순, 그리고 결코 계량화될 수 없는 증언들이 열어젖힌, 전쟁 속에서의 살아남음과 목격한 죽음들, 강간과 모욕과 멸시와 가난, 체념과 침묵, 그리고 원망과 의지의 카오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처음인 것처럼 반복해야 하는 자맥질일 것이다.

도미야마 다에코 작가의 ‘바다의 기억’ 연작 중 <남태평양 해저에서> 이미지는 다음 기사를 참조 >> 한겨레, 일본 100살 거장의 ‘기억’…야만 들추고 약자 보듬다, 노형석 기자, 2021.03.24.

 

각주

  1. ^ 『경향신문』,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 2017.7.23. 
  2. ^ 다음을 참조. 정갑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양주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7 게시일: 2022.06.10 최종수정일: 2022.06.14  
  3. ^ 『한겨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양주 할머니 별세…생존자 11명」, 2022.5.2
  4. ^ 등록 절차와 관련된 법은 2002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다. 2018년 법률명 등이 바뀌어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시행되었으며 2020년 일부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률 제정은 정대협 운동의 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 2014, 59-62쪽.
  5. ^ 『한겨레』, 「주일대사 내정자 만난 ‘위안부’ 피해 이용수 할머니…“죽기 전에”」(김규현 기자), 2022.6.21 
  6. ^ 강정숙, 「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10, 75-80쪽 참조. 특히 표2-2 군‘위안부’총수에 대한 여러 의견, 79쪽 참조.
  7. ^ 대일항쟁기간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편,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124쪽. 다음에서 재인용.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이트 https://www.fomo.or.kr/kor/contents/40
  8. ^ 다카시 후지타니, 박선경 역, 「죽일 권리, 살릴 권리: 2차 대전 동안 미국인으로 살았던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살았던 조선인들」, 『아세아연구』 제51권 2호,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2008, 23쪽. 
  9. ^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별지 제1호서식) (개정 2018.6.5.)>인 <대상자 등록신청서>에는 신청인(피해자)의 신원과 함께 ‘일제하 당시 생활했던 상황’에 대한 란이 마련되어 있다. ‘강제동원 연도(년, 월)’, ‘강제동원 장소’, ‘귀환 연도(년, 월)’, ‘귀환 장소’, ‘강제동원 상황’, ‘현지 생활’, ‘귀환 상황’, ‘현재 생활’에 대한 진술을 해야 한다. 신청인 제출서류로는 다음 세 가지가 제시된다. 1. 재외 국민등록부 등본 1부(국외 거주자만 해당합니다) 2. 보호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보호자가 대신 신청하는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3. 그 밖에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 목격자 등 제3자 증언 등) 
  10. ^ 임경화, 「마이너리티의 역사기록운동과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부’」, 『대동문화연구』112,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20, 493~495쪽. 
  11. ^ 위의 글, 494쪽. 
  12. ^ 특히 “포스트식민 냉전체제”라는 용어와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는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는 데 있어 활용된 방법적 개념과 관련한 대목을 볼 것.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한국여성학』제37권 2호, 한국여성학회, 2021, 208~214쪽. 
  13. ^ 위의 글, 216~229쪽 참조.
  14. ^ 이헌미, 「당신의 이름은」,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6 게시일: 2022.06.07 최종수정일: 2022.06.08 
  15. ^ 5.18 광주의 화가로 더 잘 알려진 도미야마 다에코는 윤정옥, 이효재와의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세대였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의 문제를 ‘위안부’를 주제로 한 <바다의 기억> 시리즈를 1986년 완성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나베 유코, 「월경하는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의 인생과 작품 세계: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페미니즘의 교차지점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제21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1, 94-101쪽 참조.
글쓴이 이혜령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동아시아학과 교수. 주요 저서(공저)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 『두 조선의 여성: 신체·언어·심성』(혜안, 2016) 『백 년 동안의 진보』(소명출판, 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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