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란 무엇인가 〈2부〉 - ‘위안부’ 문제의 세대 전환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22.07.25
  • 최종수정일2022.11.27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룬 학술의 장이 마련될 때면 청년·미래 세션이 빠지지 않는다. 피해 생존자와 연결된 실질적 감각이 부재한 포스트 메모리(후-기억) 세대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실 여성학, 법학, 외교학, 사회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는 축적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공론화 이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곳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웹진 <결>은 이들의 관점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어떻게 의미화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좌담회 일자: 2022년 6월 22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황진경, 이안, 장소정
-대담: 백재예(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정치학과 박사과정), 송혜림(연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전소현(성공회대 국제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정희윤(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사학과 박사과정)



Q. 증언을 생존자에게 직접 듣지 못하게 된 시대가 도래한 만큼 남겨진 연구자들의 몫이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세대교체에 대해서도 계속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정희윤

포스트 메모리 시대라고 무엇이 달라질까 싶습니다. 재현의 문제, 실증주의적 이해의 폭력, 증언자가 증언자일 수 있게 하는 언어의 부재 등 현재 제기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요. 이는 ‘위안부’ 생존자들이 모두 돌아가신 이후에도 동일하게 잔존하는 문제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는 다른 전장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생존자들의 증언에 AI 기술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가치중립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러한 증언의 전시가 정세나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이루어질 경우, 폭력적이고 위험한 작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증언 이후의 재현물들이 특정한 구성과 배치의 결과이고 어떤 면에선 의도된 것인 만큼, 그 재현들에 어떻게 개입하고 증언이 증언일 수 있게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송혜림

정희윤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터랙티브 전시’에 다녀왔는데, 진화된 기술력과 이를 흡수하는 적극적인 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로 기록되느냐에 따라 기록물의 성격과 파급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시도 자체는 좋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시 내용 중 하나를 예로 들면, 제가 할머니에게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위안부’로 있을 때 계속 굶었어’라는 엉뚱한 대답으로 이어졌어요. 현재보다는 과거에 대한 질문과 답이 더 많았죠.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재현하거나 표상을 만들 때 여전히 과거의 경험에만 고착돼있고, ‘위안부’라는 경험 안에서만 이들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운동을 포함해 증언을 다루는 사회적인 담론 자체가 과거 경험에 고착돼있고, 그들을 증언자로 호명하는 경험에만 천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를 붕괴시키는 새로운 방식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전환의 이름으로 되어야지, 세대교체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소현

증언을 해석하고, 다시 말하고, 듣고, 쓰는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할머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는 과정이라면, 왜 미래 세대의 문제로만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어요. ‘내가 왜 위안부 문제를 계속해서 고민하지? 이것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지?’라는 의문에 도움이 됐던 게 영화 <보드랍게>(박문칠, 2022)였어요. 김순악 할머니의 이야기와 증언을 2010년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려주는 작품인데요, 할머니의 이름은 김순악이기도 하지만 마마상, 요시코, 위안부, 미친개, 순악씨, 깡패 할매, 술쟁이, 개잡년, 기생, 엄마, 사다코 등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보드랍게 아우르는 목소리들이 감동적이었어요. 개인 안에서 폭력의 경험이라는 게 매끄럽게 설명되기 어렵잖아요. 자기 안에 수많은 분열이 있을 것이고, 수많은 ‘나’가 충돌하는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그러한 경험들을 뒷세대 여성들이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고 자기 삶과 공명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분열시키는 목소리에 맞서 스스로를 수용하고 말해내는 과정이 지금의 페미니즘 활동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왼쪽부터) 백재예, 전소현 ©오늘의 나

 

백재예

세대교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세대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앞서 말했을 땐 내부적 해체라고 표현했는데요, 운동과 학계를 구성하는 구심점, 가령 고착화된 논의나 주장, 접근 방식들이 분화되고 해체되는 방식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정주의자들은 곡해와 오독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내부적 해체를 통한 세대교체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축적된 증언과 자료들을 성실하고 면밀히 독해하는 것을 통해 이 운동을 왜 시작했고, 어디로 가고자 했는지,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지닌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그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 혹은 기존에 해왔던 것을 폐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이야기를 종합하여 듣다 보니 ‘위안부’ 문제를 사회가 큐레이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대 전환 혹은 세대교체라는 말이 들려올 때 큐레이팅된 ‘위안부’ 문제를 해석/해체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여요. 그렇다면 결국 진정한 전환이란 생물학적인 미래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모두 학술 활동 외에도 다양한 외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문제의식이 어떻게 확장·연결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백재예

그동안 외부 활동을 따로 하지 않아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그간 유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를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와 인종·민족 문제 등의 교차 지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보편적 카테고리나 일본의 특수한 식민지배와 같은 특수성에 집중한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적은 서구 학계에 이 문제를 설명할 때면 늘 파편화시키지 않고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보다 광범위한 대중이나 학계를 대상으로 ‘위안부’ 문제의 복잡한 고민거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전소현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면서 화성외국인보호소 피해자 연대 시위에도 다녀오고, 장애 인권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게 됐어요. 외국인보호소 문제에서도 “한국이나 보호소 사람들은 보호라고 하지만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걸 보면서 “‘위안부’들을 보호했다”고 하는 부정론자들의 말이 떠올랐어요. 장애인의 삶을 시설화시키는 언어들이 장애인을 자기 의사 결정이 없는 무력한 존재로 재현하곤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위안부’ 피해자나 젠더 폭력 피해 여성들을 무력한 존재로 바라보려고 하는 시각이 오버랩됩니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여러 사안이 겹쳐있는 문제이고, 다른 사회운동과 연계‧확장될 수 있는 지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왼쪽부터) 송혜림, 정희윤 ©오늘의 나

 

송혜림

저는 스스로를 학술장에 있는 활동가로 정체화하고 싶어요. 현장에서 순간순간을 함께하고 물리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연대의 한 방식이지만, 책상 앞에서 필요한 말들을 계속해서 전달하고 외치려는 노력도 넓게 보면 외부적인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는 사회적으로 재현되는 재료들로 만들어지는 증언자의 표상을 문제 삼는 조사를 하고 있어요. 영화나 문학, 언론 보도에서 증언이나 증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또 그 과정에서 내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무엇인지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정을 자주 가게 돼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언어로서 증언의 기능을 가장 충실하게 강요하는 공간이 법정이기도 하고, 증언이 최종적으로 인정받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그 중요한 의미를 모두 가진 공간에서 증언자가 얼마나 잘 말할 수 있고 그들의 언어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한 현장 조사를 하며 책상 앞과 법정을 오가고 있습니다. 
 

정희윤

저도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 반성, 죄책감이 있지만 송혜림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책상머리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골과 관련된 인권 및 인종주의 담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 과거청산 활동을 하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단체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희생자들을 서울로 봉환하는 일을 하며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강제동원의 문제는 노동착취의 문제이기도 하고 현재로 끌어올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본 놈들 나쁜 놈들’로 귀결되는 비극적인 현상과 사회의 묘한 큐레이션에 대해 고민하게 됐습니다.

뼈가 갖는 강력한 의미가 있고, 모두가 뼈를 보면 외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뼈는 끊임없이 불화를 낳거든요. 어떤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윤리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고요. 뼈는 사람인가, 이것에 오늘날의 국적을 부여하는 방식이 가능한가, 망자에 대한 인권은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윤리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뼈라는 기억장치-매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위안부’ 문제는 늘 논란과 윤리적 불화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인데요. 박유하 교수의 『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문제를 보며 실증에 갇히지 않으려면 해석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됐고, 뼈를 통해 오늘날 이 사회에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이헌미, 장소정, 송혜림 ©오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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