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 없는 “정의의 집”과 진실 없는 역사 전쟁
지난 4월 28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학술 콜로키움 <증언 이후: 일본군'위안부' 피해 재현의 윤리와 폭력>을 개최하였다. 이번 콜로키움 말미에 발표자 중 한 명인 김수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대리 전장으로서의 한국 역사와 일본군‘위안부’”라는 말로 현재 일본군‘위안부’ 사회·인권·학술 운동이 맞닥뜨린 전쟁 같은 상황을 요약했다. 조금의 부족함도 지나침도 없는 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 그리고 국내외 정치와 국제 외교적 셈법의 격랑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두고 충돌할 때마다 그간 쌓아온 운동의 노력과 성취는 침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근래의 사건들로는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이른바 ‘정의연 사태’ 그리고 이번 콜로키움에서도 화두에 오른 ‘램지어 사태’에서 그 파장은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증언과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던 지난 30여 년의 경이로운 운동의 도정이 진상 규명과 사과, 화해 없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 막다른 길로 순식간에 뒤바뀌거나, 그녀들의 목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복화술에 의한 것인 양 그녀들의 운동 주체성과 진정성을 박탈하는 일들이 공공연히 벌어졌다.
이러한 형국 속에서 문득 60여 년 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날카롭게 스케치했던 정의 없는 “정의의 집(배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풍경이 떠올랐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서두에서 이른바 유대인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의 핵심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심판하기 위해 열린 예루살렘 재판이 ‘정의’를 다시 세운다는 명목하에 마치 한 편의 ‘쇼’처럼 수행되고 있는 양상을 꿰뚫어 보았다. 이 재판 이면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민족주의적(종족주의적) 이분법에 기초해 이제 막 건국된 이스라엘 국가의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시온주의적 욕망과 이 재판으로 인해 다시 거세어질지 모를 국제적인 반독일 정서에 대한 서독의 우려가 함께 요동치면서 정작 ‘정의’라는 본질이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유대인들의 분노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20세기 인류 역사의 전체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인간의 폭력성과 비이성적 광기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집합체인 아우슈비츠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아렌트의 교훈은 지금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맞닥뜨린 ‘진실 없는 역사 전쟁’, 그러니까 진실을 내세우지만 진실에는 관심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 역사 전쟁의 상황에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무용한 싸움으로부터 재발견이 요청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령 이번 콜로키움 라운드테이블에서 논의했던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모르고 있는가”와 같은 문제―를 설정하고 성찰함으로써 운동의 패러다임을 갱신해 나가는 쓸모 있는 지혜를 발휘할 때인 것이다. 콜로키움 1부 발표 중 「증언과 증언 ‘사이’를 청취하기: 증언의 사회적 의미 획득/부과 방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사를 다시 돌아보며 다양한 주체들의 초국적 연대가 갖는 역동성을 재발견하려 했던 하나의 시도, 2부 발표자 에밀리 정민 윤(Emily Jungmin Yoon)의 일본군‘위안부’ 증언에 대한 ‘찾은 시(found poem)’와 같은 또 하나의 시도 그리고 한국에서의 ‘위안부’ 전시가 부딪히는 비장소성과 고도의 정치적 대립을 동시에 넘어서기 위한 역사박물관의 도전적인 시도. 이런 시도들이 모이고 축적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싸움에서 우리의 문제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 ‘위안부’ 증언과 재현 근저의 ‘본질주의’ 문제
“일본군‘위안부’ 피해 재현의 윤리와 폭력”이라는 콜로키움의 주제가 시사하듯, 흔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험이라고 표현되곤 하는 ‘위안부’ 피해에 대한 재현은 종종 언어를 초과하거나 언어로는 유실되고 마는 경험을 언어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언어로 간명하게 재현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폭력적이지는 않은가 하는 등의 문제를 던진다. 이러한 문제의 근저에는 재현(representation)으로는 동일하게 재현전(re-present)할 수 없는 대상의 본질이 내재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에 법적 증거의 권위를 부여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그러한 본질주의가 작용한다.
이지은의 발표에서 언급되었던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삶과 경험이 ‘살아있는 증거’이자 ‘증거로서의 증언’으로 인식되는 경향은 ‘진상’ 규명이라는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목적과 연관성을 지닌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 또는 ‘본질’은 그 경험의 주체인 당사자에 의해서 드러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달리 말하면, 재현이라는 2차 과정을 거치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이 일본군‘위안부’ 문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은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이른바 사회적인 시선의 2차 가해를 감수하는 커밍아웃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을 촉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에 대해서도 지적하는데, 이 딜레마 역시 ‘위안부’ 증언과 재현의 본질주의가 낳는 모순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질주의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이 ‘위안부’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일정하게 규정된 전형적인 피해자상(피해자의 표상: representation)과 일치하지 않을 시, 오히려 그 당사자의 존재와 증언이 부정되는 모순 또한 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지은의 논의는 당사자의 삶과 경험을 ‘살아있는 증거’로 인식할 때 피해자 생애 전체에 ‘위안부’로서의 삶의 진실성을 강요하는 폭력이 가해질 수 있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한편 「귀 기울인 응시를 위하여―현대사박물관에서 ‘위안부’ 문제 재현하기」는 ‘위안부’ 재현의 한 방식인 전시가 맞닥뜨리는 비장소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위안소 유적지가 남아있지 않은 현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의 ‘위안부’ 전시는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동일한 장소 또는 바로 그 현장에 서 있는 체험’을 관람객에게 제공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박물관의 해법은 피해 생존자들이 스스로를 ‘살아있는 증거’로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 현장성의 부재를 그녀들의 육성과 육체성으로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김수진 학예연구관은 피해 생존자의 납판 초상과 증언하는 육성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하여 관람객이 그녀들의 존재와 이야기 그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재현 전략을 구사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육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재현은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실감이 마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인식에 앞서 주어지는 듯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토론자인 이나라는 피해 생존자의 “육체성과 현존성”을 경험하는 일이 피해 생존자들이 겪은 재난에 대한 역사 속 “침묵과 부재의 흔적을 지우는 일과 같지 않”다고 지적한다. ‘살아있는 증거’로서 피해 생존자들의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종종 램지어 사태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의 반격에 위태로워지는 현실은 현전에 대한 재현의 본질주의적 환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함을 역설한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 존재에 대한 진실의 문제는 단순하게 그 존재의 ‘본질’로 수렴되는 것도, 그것으로써 획득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알거니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남성중심주의의 역사와 정치·사회 제도, 권력 구조와 법체계가 복잡하게 얽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성에 대한 환상은 강력하여 다른 한편으로 영상 자료의 권위로써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증명하려는 경향으로 지속되고 있기도 하다. 3부 기조 발제 「공공 기억에서 시각적 자료 활용의 성별성」에서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조선인 ‘위안부’ 추정 여성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자료가 미디어를 통해 대중적으로 유통되면서 마치 그러한 영상 자료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사실 또는 진실을 판정하는 권위를 지닌 듯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는 경향을 짚는다. 여기에 비단 영상 매체의 기술이 담보하는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찰 국가’인 미국 정부가 보관한 자료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권위에 대한 신뢰가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쟁 ‘성범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발제자인 김한상이 지적했듯, 영상 매체를 통해 ‘위안부’의 성폭력 피해가 스펙터클로 소비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일본군‘위안부’ 증언과 재현의 본질주의에 내장된 윤리적인 문제가 쟁점화된다.
3부 기조 발제 이후 전체 토론에서 명확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존재론과 인식론의 근본 체계까지 검토해야 할 거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깔린 본질주의를 타파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론으로 아무런 구체적인 실천 방법도 이론적 해법도 없이 말하는 것은 이번 콜로키움의 결론도, 이 글의 주장도 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이 문제를 다양한 사안들 속에서 발견하며 인식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질주의적인 환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문제를 재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의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학술 연구와 운동의 방식은 ‘합의’나 ‘화해’처럼 명확한 매듭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매듭이 잘못 매듭지어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국을 맞이하지 않도록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끊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문제의 가닥을 고르고 얽힌 쟁점들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3. 증언을 연장하고 운동을 확장하는 일
“Why don’t you guys just get along? The guys: Japan and Korea. Meaning: move on” 이번 콜로키움에 참석했던 시인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A Cruelty Special to Our Species』의 권두 시편 ‘An Ordinary Misfortune’에 실린 어느 캐나다인 친구의 질문이다. 이 순진함을 가장한 폭력적인 질문의 구도,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마치 한일 양국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지나간 과거를 둘러싸고 반복되는 무의미한 싸움의 전장처럼 단순하고 납작하게 인식되는 구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포스트콜로니얼, 포스트모던, 트랜스내셔널 시대의 역사학, 사회학, 문학, 정치학 그리고 인권과 평화, 페미니즘 운동을 교차하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는 점은 그러한 노력을 더욱 강력하게 요청하는 요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납작하게 만드는 그들의 싸움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를 재발견하는 실천으로 증언의 연장과 운동의 확장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장과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정치·사회·문화적 실천은 결국 이번 콜로키움의 논의를 통해 그 문제성을 재확인한 재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광활한 침묵의 문학사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서사 아카이빙을 수행한 장수희의 작업이나 세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위안부’의 증언들을 ‘찾은 시’의 시적 발화로 재구성한 에밀리 정민 윤의 작업은, 난제로서의 일본군‘위안부’ 증언과 재현에 도전하는 시도이자, 앞으로 올 그러한 시도들에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 글쓴이 배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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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과학기술원 기초학부 조교수. 문학의 재현과 수행성, 정치성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문학의 혁명, 혁명의 문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