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서 뻗어져 나온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하 역사관)과 브랜드 희움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위안부’문제 해결과 피해자 관련 기록에 힘쓰고 있다. 또한 굿즈를 제작해 ‘위안부’문제 인식을 대중화하고, 쇼핑이 기부로 이어지는 일명 ‘착한 소비’에 대한 높은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현재 세 개 조직의 대표를 겸임하고 있는 서혁수 대표를 지난 12월 3일, 대구의 희움 역사관에서 만났다. 11월부터 새롭게 선보이고 있는 전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증언 展>(12월 31일 종료)뿐만 아니라 겸임 대표로서 맡은 바를 해내야 하는 만큼 그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빠 보였다.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서 대표는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느낌이 든다. (…) 앞으로 계속 가다보면 또 새로운 길이 나오지 않을까”라며 웃어보였다. 2019년 10월부터 대표를 맡아 2년 여간 활동해온 소회는 어떠한지, 현재 ‘위안부’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지, 또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Q. 현재 여러 곳에서 대표를 맡고 계시는데 각 단체 및 사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모태가 되는 건 시민모임입니다. 1997년 12월에 결성된 시민모임을 바탕으로 2015년에 역사관이 건립됐어요. 역사관이 들어서기 이전인 2012년에 브랜드 희움을 런칭했고요.
Q. 시민모임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저희가 세 가지 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려요.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무료진찰권이 제공됐다는 것이죠. 1995년 8월부터 곽병원의 곽동협 원장님께서 생존자들을 무상으로 진찰해주셨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희생이 바탕이 됐고, 또 하나는 대구여성회에서 ‘위안부’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생존자들을 조사하고 증언 녹취 작업을 했어요. 당시 대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생존자 실태 파악도 진행했고요. 그런 활동이 맞물리면서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를 챙기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됐죠. 그러면서 시민모임 사무소가 개설됐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면서 그분들의 유품을 모으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역사관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생겼어요. 하지만 쉽지 않았죠. 그러다 고려대의 사회적 공헌 동아리 인액터스(Enactus)와 함께 ‘위안부’ 관련 굿즈를 제작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의식 팔찌’를 만들게 됐습니다. 못다 핀 희망을 꽃피우자는 의미로 블루밍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이를 통해 얻은 수익금에 더해 김순악 님의 기부금 5000여만 원이 마중물이 돼서 역사관을 건립하게 됐어요.
Q. 역사관은 정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건가요?
역사관은 입장료, 희움 판매금액, 회원 정기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이외에는 외부 지원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관람객이 한 해에 1만 명 정도 되는데 코로나 이후 1000명으로 대폭 줄었어요. 이전에는 단체에서도 많이들 오셔서 굿즈에도 관심 가져주시고 전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주셨는데 지금은 그런 교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어 아쉽습니다.
Q. 시민모임, 역사관, 브랜드 희움이 하는 일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요.
시민모임은 ‘위안부’문제 해결, 생존자 지원, 사업 추진, 후원회원과의 교류 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역사관은 피해자 관련 중요 증언과 자료들을 많은 분에게 알릴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고요. 브랜드 희움에서는 굿즈 개발을 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유사한 굿즈가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보니 새롭게 바꿔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굿즈 제작에 나선 것은 희움이 최초이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굿즈뿐만 아니라 할머니 관련 출판 사업도 함께하고 있고, 모든 이익은 피해자를 위한 사업에 환원한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이나 기획, 제작 등이 만만치 않은 일이고 트렌드가 워낙 빨리 바뀌다 보니 어려운 지점이 있죠. 컨셉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쉽지 않아서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에 동참해야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하셨던 때는 언제였나요?
A. 젊은 시절 제 주위에 ‘위안부’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덕분에 할머니들을 만나게 됐고 개인적으로 몇 분하고는 친하게 지냈죠. 그러면서 그분들 옆에서 챙겨드리고 도와드리는 일을 했어요.
Q. 시민모임 측과는 예전부터 인연을 쌓아 오셨던 건가요?
A. 네. 행사에도 참여하고 한 번씩 글도 썼습니다.
Q. 이번 대표직은 언제부터 맡게 되셨는지요.
A. 2019년 10월부터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개인 사업을 따로 하고 있고 ‘위안부’ 관련 업무는 비상근으로 하고 있어요.
Q. 대표 겸임을 하느라 힘에 부치실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지요.
A. 이번에 처음으로 고민을 해봤는데요,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000년대 초에 시민모임 5년사를 발행할 때 모리카와[1] 씨가 투고한 글 중 일부분이에요. “문옥주 할머니에게 이끌려 시작된 이 조사를 앞으로도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대로 계속해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처럼 저도 지금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느낌이 들어요. 할머니가 곁에서 지켜보며 무언가 고갈될 때마다 하나씩 내려주시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그걸 너무나 믿는 게 책을 하나 내니까 또 어디서 새로운 증언이 나오더라고요. 이것이 다음의 연구거리다, 하고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이걸 하다 보면 또 새로운 길이 나오겠죠.
Q. 현재 역사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진행하고 있죠. 대표님이 총괄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역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지요.
A. ‘할머니의 방’을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했습니다. 그분들의 희노애락을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또 개인 사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식으로 담아내는 것이 좋을까 걱정을 했죠. ‘얼굴의 계단’에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잘 담겨 나와서 흡족했고요. 모든 게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실현된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문옥주 할머니와 관련해서는 강독회를 진행했는데 그분의 구술을 새롭게 읽어내는 과정이 보람 있었어요. 증언들을 일일이 뜯어보며 읽다 보니 저희가 적임자더라고요. 사투리 같은 표현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야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Q. 강독회가 그렇게 시작된 모임이군요.
A. 네. 올해 3월부터 모임을 가져왔고 『문옥주 지오그라피』라는 책도 냈습니다. 지오그라피라는 게 할머니가 다녔던 지역을 담아낸 의미도 있지만 그분은 어느 땅을 가든 이치를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곳을 가든 최선을 다해 살아내셨다는 생각이 드는 일화들이 참 많거든요. 신문 한 장에서 시작해 자료집을 엮게 됐는데, 덕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어요. 전문가들 의견도 더하고요. 이게 완전한 버전은 아니지만 이것으로부터 시작해 앞으로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엮어보려고 합니다. 문옥주 증언집이 지금 미국에서 번역되고 있거든요. 그럼 그 책을 보고 나중에 외국에서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Q. 모임에는 어떤 분들이 참여하셨나요?
A. 지역의 향토 사학자, 일본 문학 전공자, 권번 판소리 전문가, 구술 전문가 등 많은 분들이 계세요.
Q. 지금도 꾸준히 모임을 갖고 계시나요?
A. 네. 7차까지 모임 진행한 후 시즌2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1차로 펴낸 자료를 토대로 후속 연구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겠죠. 아직도 모을 자료가 많습니다. 모리카와 씨가 모은 자료도 일본에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함께 합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아직 못했어요. 모리카와 씨가 2019년에 돌아가신 이후 코로나 때문에 일본에 있는 자료도 아직 파악이 안 된 상황입니다.
현재 지오그라피에는 한국 관련 내용만 있지만 중국, 일본, 미얀마 길이 함께 이어져야 해요. 할머니가 어렴풋이 말한 장소를 저희가 다 알아냈는데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 때문에 더욱이 갈 수 없고, 중국도 코로나 이후 상황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죠.
Q. 시민모임의 활동은 주민 운동적 성격도 일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점 또는 난제라고 꼽을 만한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지요.
A. 이제는 주민 운동의 차원은 벗어난 것 같아요. 회원도 전국적으로 분포해있고 희움 굿즈도 전국에서 구매하시거든요. 이런 단체와 역사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주시는 분들이 전국적으로 많아진 것 같아요.
Q. 서울 중심적 구조 또는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기반으로 지역 운동을 주변화하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이러한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지역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진 않지만 생존자들이 계셨던 곳과 그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다 지방이에요. 지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죠. 그런데 중앙 단위에 관심이 쏠리다 보면 아무래도 소외되는 게 많아요. 한계이자 극복해야 될 점이죠.
Q. 한국에서의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운동과 사회적 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타깝다고 느끼시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A.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것들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생존자분들이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분들을 위해 뭘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결여돼있죠. 피해자 지원이나 ‘위안부’ 관련 사업에 대한 청사진이 준비돼있지 않은 부분, 문제 해결에 있어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부분들이 가장 안타까워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생존자들이 줄어들고 있거든요. 작년 3월에도 장례를 치르면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창 코로나로 심각했을 때 쓸쓸하게 보내드렸거든요. 너무 안타까워요. 하루 빨리 문제 해결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겠다는 조바심이 납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운동 30년이라는 측면에서 성과라고 생각하시는 점이 있을까요.
A. 오랜 시간 속에서 어떤 성과를 이뤘느냐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목표를 가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타임라인 안에서 무엇을 해낼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시급한 문제인 것 같아요.
Q. 혹시 현재 다른 지역 단체와의 협업이나 교류가 진행되고 있나요?
A. 최근에 조금씩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은 잘 정착된 느낌은 아니에요.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내 단체뿐 아니라 해외 단체들과도 지속적으로 교류가 필요하고요. 다른 피해국가의 단체, 학자 그룹, 역사관 등 교류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Q.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각각에서 가장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요.
A. 민간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해드리고, 정부에서는 그들의 바람이 담긴 정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그동안 저희가 일본 정부에 계속 요구해온 게 7가지 원칙(일본 정부의 범죄사실 인정,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추모, 책임자 처벌이 포함된 법적 책임)인데 이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가 관건이에요. 정부에서든 단체에서든 이 원칙을 실현시킬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내세우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계속 이런 저런 제안을 하는 거죠.
Q. 생존자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운동 방향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직면해야 할 현실인데 지금까지는 생각을 못해봤어요. 현재 생존자 분들이 살아계심에도 문제 해결이 어려운데 안 계신다고 생각했을 땐 더 어려울 것 같거든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Q. 대표 겸임을 하신 지 1년이 됐습니다. 그간 활동을 해오시며 행복과 보람을 느끼셨던 적은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A. 지난 몇 개월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는데 손에 잡힌 성과는 없는 듯해 안타깝기도 합니다. ‘위안부’문제 해결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시민모임의 역할을 생각하고 추진해나가는 것이 숙제로 남아있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바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야겠습니다.
Q. 앞으로 염두에 두고 계신 활동이나 계획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직함이 많은 만큼 그 역할을 다 해야겠죠. 시민모임은 ‘위안부’문제 해결, 회원과의 교류, 생존자 지원, 추모 사업 등에 힘쓸 테고요. 역사관에서는 새로운 전시를 계속 준비할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역사관을 확장할 수 있도록 구체화하는 게 계획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희움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서 어려움을 뚫고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이용수 할머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을 내는 데 일조하는 게 바람입니다.
각주
- ^ (편집자 주)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 대구 출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옥주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일대기를 1996년에 책 『문옥주, 미얀마(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文玉珠 ビルマ戰線楯師團の慰安婦だった私)으로 써냈다. 이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김정성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2005)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발간됐다.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서혁수 대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브랜드 희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장소: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 글쓴이 퍼플레이 강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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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플레이컴퍼니는 여성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퍼플레이’(https://purplay.co.kr)를 운영하고 있는 사회적기업으로, 문화 콘텐츠를 통한 성평등 가치 확산이라는 미션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