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노운 걸>(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17)
드라마 / 벨기에, 프랑스 / 아델 에넬 출연 / 106분
얼굴을 마주하기
얼굴을 마주하고 응답한다는 것은 무얼까? 너무 당연해 어떤 의도로 물어보는지 의아할 수 있는 이 질문은 ‘비대면’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지금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실시간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를 마주할 때, 앱을 이용해 배달을 시킬 때, 매장에서 키오스크로 무언가를 주문할 때, 소셜 미디어에서 직접 대면해본 적은 없지만 그의 타임라인을 구독해 온라인 정체성은 알고 있는 이가 ‘힘들다’고 슬쩍 흘릴 때, 현관문의 모니터나 CCTV로 누군가의 얼굴을 대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마주하고 응답하는가? 모니터의 얼굴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현대사회는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더 즉각적이고 상시적으로 만나고 연결되어 있지만 ‘응답’은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의 ‘응답’은 도나 해러웨이[1]가 ‘책임(responsibility)’은 곧 ‘응답가능성(response-ability)’이라고 했을 때의 의미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만나는 방식이 다양하고 복잡해질수록 응답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외면할 방법도 많아진다. 그럴 때 복잡한 여러 과정의 단계에서 놓치게 되는 것은 목소리가 작거나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나 약자일 가능성이 많다.
죄책감의 통증과 죽음의 공모
현대 유럽 사회에서 소외되고 주변화된 인물의 뒤를, 흔들리는 핸드헬드[2] 카메라로 바싹 붙어 쫓아왔던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서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전작들이 하층민이거나 사회적 약자였던 것과 달리 <언노운 걸>의 주인공 제니(아델 에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엘리트 의사이고 여러모로 흠 잡을 데 없는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는 의사로서 직업적 전문성을 인정받아 좋은 경력이 될 연구소에 채용되어 곧 이직할 예정이고, 병환으로 은퇴한 노의사를 대신해 임시로 3개월 일한 동네 병원에선 그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에 노래를 지어 불러주는 어린 환자가 있을 정도로 환자들에게 헌신적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벨기에는 주치의 제도를 갖고 있다. 제니는 동네 병원의 주치의로서 주로 소소한 병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들, 노환이나 당뇨병에 따른 합병증으로 병원까지 오는 것도 힘든 사람들, 노동현장에서 다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살뜰히 돌보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제니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게 된다. 병원 진료 시간이 끝난 늦은 저녁 벨소리가 울리지만 제니는 문을 열어주려는 인턴 줄리앙(올리비에 보노)을 제지하고 환자를 거부한다. 그리고 다음 날 벨을 눌렀던 이가 아프리카계 십대 소녀였으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경찰에게 듣고 알게 된다. 병원 CCTV에 찍힌 소녀의 얼굴을 대면한 제니의 죄책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한순간의 무관심과 고집스러운 냉담으로 소녀의 죽음에 동조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제니는 뒤늦게라도 그녀의 벨소리에 응답하기로 선택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소녀의 이름을 밝혀내고 가족을 찾아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고자 한다.
그러나 제니는 동네 사람들과 경찰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자신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제니는 소녀의 이름을 찾아가고 죽음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의 역할을 자처하는 동시에 의사로서 죄책감에 기인한 통증을 진단한다. 소녀가 죽은 날 그가 자기 아버지와 있던 것을 목격한 소년 브라이언(루카 미넬라)은 지속적으로 복통과 구토를 느낀다. 제니는 브라이언을 진단하던 중 죽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맥박이 급격하게 빨라지는 것을 보고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소녀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브라이언의 아버지(제레미 레니에)는 요추통증이 극심해지자 한밤중에 제니를 부른다. 소녀의 언니는 제니의 탐문에도 동생에게 성매매를 강요한 남자친구가 두려워 모른 척하다 나중에 죄책감을 호소하며 제니에게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다. 그밖에 소녀에게 돈을 주고 자기 아버지와 섹스를 하게 한 캠핑카 주인, 십대 소녀의 성을 산 노인, 범죄를 숨기려 탐문을 그만두라고 위협하는 동네 범죄조직, 마약수사 때문에 소녀의 죽음에 무관심한 경찰들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 제니의 탐문을 방해한다. 소녀의 죽음도 그렇지만, 소녀가 죽은 후 그녀의 이름을 밝히는 데도 촘촘한 방해가 있다. 여기서 죄책감과 무관심은 더 이상 개인적 심리나 상태가 아니다. 소녀의 죽음과 그녀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데에는 공동체와 시스템의 공모가 있다. 빈곤과 범죄가 만연한 사회에서 성매매를 하는 남자들과 그들의 비밀을 지켜준 소년, 10대 소녀를 인신매매하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범죄자들, 피해자 여성의 죽음에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경찰들 그리고 한순간의 냉담함으로 환자를 거부한 의사 제니까지. 소녀의 죽음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상황은 하나의 원인에 있지 않다. 그들의 ‘한순간’, 그들 각자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모여서 소녀의 죽음을 야기하고 그녀를 익명의 상태로 만든다. 제니는 소녀가 그저 부조리와 미스터리로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해 흩어져 있는 냉담하고 폭력적인 순간들을 엮어내 ‘펠리시 콤바’라는 소녀의 이름과 서사를 찾아준다.
“죽어도 끝난 게 아니다”: 응답의 윤리
소녀를 위협해 추락하게 만든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제니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어차피 소녀의 죽음을 되돌릴 수도 없고 자신만 모든 것을 잃을 거라며 진실을 묻어버리자고 한다. 그러나 제니는 “죽어도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괴로운” 거라며 소녀가 “지금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다”고 답한다. 제니는 뒤늦게라도 그녀의 벨소리에 응답하기를 ‘선택’하고 ‘실천’한다. 제니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사적이고 심리적인 죄책감을 넘어서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 그 어느 벨소리 하나 놓치지 않을 거라는 단호한 의지를 담아서. 제니는 전도유망한 연구소를 포기하고 수가도 높지 않고 일만 많은 동네 병원에 남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아예 거처를 병원으로 옮겨 한밤중에도 벨소리가 울리면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들을 진찰할 뿐 아니라 죄책감에 못 이겨 털어놓는 고백을 끈질기게 듣는다. 내실에도 모니터를 설치해 모든 방에서 현관문 밖을 볼 수 있게 한다. 병원 현관문 벨소리뿐 아니라 다른 환자를 진료하거나 탐문을 나설 때도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그는 모두 응답하려 한다. 제니는 병원 문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앞서 판단하지 않고 모두에게 문을 열어 놓기로 한다. 그의 이런 선택과 의지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내었음에도 외면 받는 또 다른 소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자신의 사적인 일상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제니의 희생적 헌신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적 선택이 과연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도움의 모든 목소리를 듣겠다고 나선 제니가 오만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각자 영역에서의 영향과 책임감은 무시해왔던 관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한순간의 무책임한 외면과 판단이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 아닌가? 개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에 응답하고 끝내 무엇이라도 해보려 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구원인 것처럼 영화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제니와 줄리앙의 관계를 통해 유능함과 전문성은 응답하는 능력과 별개라는 사실을 피력한다. 효율적으로 응답하려던 제니의 선택은 소녀의 벨소리를 무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턴인 줄리앙은 달랐다. 대기실에 있던 환자의 경련에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패닉이 된 줄리앙은 의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다. 제니는 유능한 의사가 되기 위해선 환자의 고통 앞에서도 침착함과 냉담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충고한다. 줄리앙은 그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버린다. 미안한 마음에 그의 고향까지 찾아간 제니에게 줄리앙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겪었기에 자신과 같은 이들을 돕고자 의사가 되려 했지만 타자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패닉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감정적인’ 줄리앙은 경련에는 대응할 수 없었지만 소녀의 벨소리에는 응답하려 했다. 제니는 줄리앙의 ‘취약함’이 문제라고 보며 그를 교육시키고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효율성과 유능함은 때때로 도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든다. 타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한 번밖에 울리지 않은 소녀의 벨소리처럼 선명하지 않을 수 있으며 효율적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기 위해선 ‘취약함’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각주
- 글쓴이 조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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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문화 연구자로서 페미니즘 비평, 디지털 영상문화,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영상물등급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운영위원, project38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원본 없는 판타지』, 『소녀들: K-pop, 스크린, 광장』, 『한국 다큐멘터리영화의 오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