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주의와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 -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서평

정희진

  • 게시일2021.12.03
  • 최종수정일2021.12.03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다다서재

 

여성은 생명을 낳고(give), 남성은 생명을 파괴한다(take)… 이제까지 백인 남성은 유색인 남성을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으로 대상화해왔다. 이것이 문명의 원동력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이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의 요지는 간단하다. 지구(자연)와 당대 자본주의(인간 활동)는 공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인 저자 사이토 고헤이는 그간 환경운동의 대표적 구호였던, 지구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SDGs(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아편”이라고 말한다. 텀블러 쓰기 같은 일상의 운동 역시, “멸종에 이르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95쪽)고 비판한다. 

나는 “sustainable”이 “지속 가능한”이란 표현으로 번역된 것 자체가 그간 한국 사회의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유지 가능한”. 이 표현이 적절하다. 실상은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유지 가능한 발전”이었다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일찍 제기되었을지도 모른다. 지속은 없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자본주의와 지구는 동반자가 아니다. 현재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지구 파괴를 막을 수 없다. 저자는 경제 성장 신화를 버리고 규모 축소(scale down)와 속도 둔화(slow down), 감속주의(減速主義)를 주장한다.

이 책의 주장이 처음은 아니다. 서두에 인용한 보부아르의 말대로, 성차별과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공생 관계에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반자본주의 투쟁부터 영성 페미니즘까지 다양하지만 1970년대부터 에코 페미니스트들과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대상화 없이는 작동할 수 없음을 이론화해왔다. 이에 반해 저자의 방법론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양극화에 저항한 페미니스트들도 동참했던- “Read Marx, again(마르크스를 다시 읽자)” 운동의 생태주의적 버전이다(그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두번째테제, 2020)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본론』으로 ‘돌아가’ 대안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성장(脫成長) 개념을 도출해내고, 이른바 3.5% 이론을 제시한다. “전체 인구 중 3.5%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심으로 저항하면 반드시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회운동론이다. 독일의 녹색당도 인구의 5%가 녹색당에 가입하면 완전히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해왔고, 그들은 지금 ‘현실 정치’에 진출했다.

그간 탈식민 여성주의나 오리엔탈리즘에 저항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약점을 역사주의로 보았다. 즉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직선상의 단일한 시간 개념에 따른 시기 순서의 ‘하나의 역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원과 선두를 상정한 이러한 시간 개념은 발전주의의 원동력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진보(progress)라고 여겨졌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이 진보 개념은 절차적 민주화와 발전주의를 동시에 의미했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는 구호는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한국의 진보 세력이 발전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다.

한편 발터 베냐민, 요하네스 파비앙,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 역사철학자들이나 캐롤 길리건, 사라 러딕 같은 보살핌 이론가들은 ‘수레바퀴’의 지속 불가능성과 그 방향의 반(反)민중성을 제기해왔다. 하지만 자본가들과 그들에게 주체적으로 종속된 우리의 일상은 결국 지구 파괴 및 팬데믹(pandemic·세계보건기구(WHO)가 선포하는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으로,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과 직면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플랫폼 자본주의는 기존의 노동, 생산, 소비 등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면서 우리의 현실을 두 가지 문제로 압축했다. 실업과 기후위기가 그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지금 우리의 생존 조건을 압도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념에 따르면, ‘한계 없는 자본주의, 절대적(absolute) 자본주의’다.

이 글에서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 꼼꼼히 보고된 지구 멸망의 리포트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불편한 진실’을 운운할 때가 아니라 ‘진실’을 공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류가 이제껏(1800년대~) 사용한 화석 연료 중 절반은 1989년 냉전 체제 이후에 소모되었다(38쪽). 겨우 30여 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최상위 부자 26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과 같다(231쪽). 코로나로 인한 재난 편승형 자본주의로 2020년 봄 미국의 초부유층의 자산은 687조원 늘었다(252쪽).

전문가들은 지구 멸망 시기를 30년 내외로 보고 있다. 문제는 지구 멸망 자체가 아니다. 동시 멸망이 아니라 선차적 멸망이 문제다. 이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발전한(우주여행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난 2년간 경험했듯이, 인구의 99%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의미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는 『人新世の「資本論」』. 인신세(人新世)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에 해당한다. 인류세는 인간의 경제 활동이 지구의 지질 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책의 주장과 의미는 분명하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책이고 내용도 어렵지 않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의 의미를 묻고 싶다. 기후 위기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에 더 관심이 있다. 마침 이 책을 읽을 무렵 1991년부터 발행해왔던 『녹색평론』이 1년간 휴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사이토 고헤이의 작업은 한국과 일본의 지식 생태계의 상징적 차이는 아닐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사회화하기 어려운 이슈, 그렇기 때문에 왜곡되고 부차적으로 다루어지기 쉬운 의제는 생태주의라고 생각한다. 생태주의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환경(環境)이라는 글자 자체가 인간을 둘러싼 ‘배경’인가, 아니면 인간도 그 ‘배경의 일부’인가를 생각케 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태주의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인간의 이중적 조건에 대한 근본적 사유이다. 생태주의 ‘우산 아래’ 평화, 반전, 군사주의 비판, 여성주의가 논의되어야 한다.

오늘 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K 컨텐츠’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 현대사 전반을 지배한 식민주의 콤플렉스 ‘덕분이다’. 피식민 지배 경험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선진국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추격 발전주의는 해방 이후 후기 식민주의, 한국식 근대화의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앞서간’ 서구의 역사의 대기실로 상정했다.

경제 성장 외의 과제는 “나중에 해결할, 혹은 잘 살게 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라고 여겨졌다. ‘여성 문제’를 비롯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까지도 여성은 시민이 아니라 출산력 등 국가 자원의 일부로서 동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대중화로 이러한 남성 문화가 설득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역시 기후 위기의 당사자가 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당장 대통령 선거 이슈에서 환경과 노동 정책은 없고 일부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마치 미래를 좌우할 듯한 이 사회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주의적 발전주의, 개인의 능력과 출세가 공동체의 목적이 되어 기후 위기는 논의조차 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건설 자본은 폭력주식회사, 부동산 문제, 재벌의 금융업이 연결되어 있고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는 추종 불허의 자살 1위국이다.

발전주의와 젠더는 오래된 논의 주제다. 발전주의는 앞서 말한 대로, 성 중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성의 산물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근대의 남성성이 서구처럼 국내/가정(domestic)에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외세에 대한 공포/대항/억압/의존/우월 등 자기 타자화의 산물일 때, 이를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의 비유인 강자와 약자의 젠더화를 적용하여, 강자인 외세는 ‘남성’이고 약자 혹은 피해자인 우리(남성)는 ‘여성’이라는 피해의식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로컬에서의 실천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적을 누구로 상정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미래 지향의 추격 발전주의로는 탈성장을 상상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좌파, 진보 남성’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남성 문화가 환경 이슈를 기준으로 ‘이념적으로’ 분열되어야 한다. 남성들 간의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차이가 드러날 때, 즉 기후를 주제로 남성들 간의 계급투쟁이 일어나야 한다. 이때 당대 성차별이 ‘젊은 세대의 젠더 갈등’으로 위장된 현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정희진

여성학, 평화학 연구자. 문학박사.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부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 <『아주 친밀한 폭력』, 『정희진처럼 읽기』 등의 저자이며, 『한국여성인권운동사』(일본어로 번역), 『성폭력을 다시 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미투의 정치학』(일본어로 번역)의 편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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