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험에 소유격을 붙여 ‘00의 증언’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폭력성을 느낀다. 생각과 감정을 포함하여 움직임이나 행위에 관한 영역을 경험이라고 한다면, 마치 몸에 옷을 걸치는 것처럼 경험이 어떠한 말을 걸치는가라는 점은 지극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처음부터 ‘00의’라는 주어 아래 두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질문하게 된다.
‘00의 증언’이라는 설정은, 모든 움직임과 행위를 00이라는 주어의 것으로 총괄하라는 일종의 명령이다. 동시에 그것은 위의 질문을 배제하고, 움직임과 행위에 촉발되어 시작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닐까.
금기된 사랑을 둘러싸고 안티고네의 죄를 인정하게 하려는 신문(訊問) 장면에 대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행위자가 그 행위와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행위와 행위자의 연결됨을 언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논했다. 그는 이 주장에서 어떠한 말을 말로서 승인할 것인가, 어떠한 말을 사전에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서가 발동하는 점을 분석한다.[1] 또한 발화를 사전에 배제하는 질서는 법과 이성애주의적인 친족 구조의 공범 결과다.
그러나 증언대에 선 안티고네는 이 주장을 끝까지 거절한다. 거부하며 신문에 노출되는 이 경험은 “지금에라도 누군가에게 달라붙을 것만 같다”.[2] 그리고 경험에 자신의 소유격을 붙이는 것을 거절한 채, 안티고네는 산 채로 매장된다. 증언에 관한 폭력이 여기서는 생매장인 것이다.
버틀러가 지적하는 주장에는, 굳이 자신이 그 행위를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장이 이미 질서를 갖는 이상, 그 비약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사태는 시작과 동시에 먼저 심판에 의해 정지당하게 된다. 생매장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죄인인가 아니면 구제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 아니다. 증언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려 하는 비약의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경험으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의 모습에 대한 고찰이다.
주장에 있어서 주어는 사전에 준비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이나 행위에는 사전에 준비된 주어가 달라붙어 주장되고, ‘00의 경험’으로 말해진다. ‘나’는 이 주어에 이미 선취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주장이 ‘나’를 덮치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된다.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흑인의 삶의 체험”을 통해 이러한 주장에 저항하며 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3]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단지 ‘나’라는 주어의 회복만은 아니다.모든 움직임이 “검둥이”라는 주장 속에서 말해진다. 파농은 이 문제를 “삼인칭 인식”이라고 말한다. 행위가 전부 삼인칭의 소유격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이 삼인칭은 변화가 없는 속성으로 자연화되어 있다. 또한 이 자연화하는 인식에는 때때로 과학이 이용된다. 그리고 이 자연은 ‘나’의 신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신체는 자연화에 저항하며 “나 자신을 사물로 삼는다”.[4] 이 점이 바로 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경험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경험으로서 산란하는 것이다. 나만의 일도 아니며 또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초점적 확장은 과정으로서 계속되어야만 한다. 파농은 책 마지막 부분에 “아아 나의 신체여, 언제까지나 나를 질문하는 인간이게 하소서”라는 기원으로 이러한 접속을 도모해나간다.
‘나’는 처음부터 이 지점에서 선언되는 것이며, 경험은 단수형이든 복수형이든 간에 주어의 소유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러붙게 되며,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산란과 복수화를 짊어지면서 새로운 관계를 갱신해 나아가는 힘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검둥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끝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또한 복수로 만들어 주어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서는 주장이 계속된다. 경험에 있어 논점은 소유격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러한 힘이다. 즉, 공통 항목이 만들어내는 우리가 아니라, 공통 항목으로는 총괄할 수 없는 곤란함을 끌어안는 우리가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30여 년 전 다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우리’를 향한 출발점을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통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해러웨이가 분투했던 과학 혹은 객관성이라는 것은 경험을 둘러싼 주장을 짊어진 지식이며, 삼인칭 인식이며, 자연화하는 사고이다. 그리고 자연화로부터 어떻게 몸을 떼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러웨이를 “상황”이라는 장소로 향하게 한다. 이 지점에 해러웨이는 말, 즉 지식을 재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파농과는 전혀 다른 문체지만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 역시, 언어적 주장에 저항하면서 시작의 장을 찾아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해러웨이가 향한 장소는 제한된 세계이며, 그 성격은 “부분적”이다. 이곳에서 “부분적 광경” 혹은 “제한된 목소리”에 기반한 말이 생겨난다. 몸에 옷을 걸치듯 경험에 걸쳐지는 것은 이러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대 일부’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말하는 전체 속의 부분이 아니다.
집합적 범주가 아니라 움직임이자 운동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부분성은, 자기 완결적인 부분성이 아니라, 상황에 놓인 지식이 가능하게 되는 각 각의 결합 혹은 뜻하지 않은 시작을 위한 부분성이다”.[5] 개개의 장소는 시작의 장이며 동적인 모습 안에 있다. 주장에 저항한다는 것은 복수의 범주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태를 확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경험이 말을 걸칠 때, 요점은 말의 일반적 유형이 아니라, 말과 함께 생성하는 어떤 상황과 시작, 그것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관계성에 있다. 이러한 일들이 기존의 상황과 관계성과의 경합 안에서 발생하는 이상, 말은 유형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다. 말은 말로서 승인되지 않은 말을 포함하여 개개의 관계성 안에서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말의 모습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시작의 일단(一端)을 짊어지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경험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며, 해설의 대상도 아니다. 경험이 움직임이자 상황 혹은 관계성의 생성이라는 의미는, 그것을 말로 하려는 ‘나’ 자신이 그 움직임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의 일단을 감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황적 지식”을 함께 확보하려고 하는 태도, 즉 앎이다.[6]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번역 : 정유진(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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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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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샤대학교 글로벌스터디즈 연구과 교수
저서로 ‘전장의 기억(이산, 2002)’,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 ‘유착의 사상-오키나와 문제의 계보학과 새로운 사유의 방법-(글항아리, 2015)’, ‘시작의 앎 -프란츠 파농의 임상-(문학과지성사, 2020)’, 공저로 ‘동아시아 냉전의 문화(소명, 2017)’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