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머리칼에 붉은 얼굴의 노년 여성들. 어딘가 낯설면서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알록달록하면서도 강렬한 색깔의 그림들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성원 작가는 그림책 『할머니, 우리 할머니』(소동, 2020)를 통해 기존에는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을 표현해냈다. 책을 예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는 그는 “예뻐서라도 책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었다”며 “그렇게 갖게 된 관심이 ‘위안부’에 대해 정교하게 정리된 책이나 자료로 옮겨 가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제목에도 작가의 염원이 담겼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위안부’피해자가 나와 다르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임을 이야기한다. “할머니들의 모습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아픈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이웃, 가족, 또는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내 주길 바라요.” 인터뷰 내내 한 작가는 ‘기억’을 강조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림’은 기억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작가의 손끝에선 색색깔의 여성들이 탄생했다. 그 화려한 외면 속에는 따뜻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강인하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할머니들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 더 많은 분들이 우리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광고나 영상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공연 작업도 하고,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전에는 주로 의뢰를 받아 작업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이번 책이 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첫 번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할머니, 우리 할머니』 책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분들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에 2019년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생업으로 바빠 미뤄뒀는데 더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죠. 숙제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하다 보니 더 많은 이들에게 공유하는 게 좋겠다 싶어 네이버 창작 프로젝트에 지원했고, 덜컥 당선되어 할머니 이야기를 3개월간 매주 연재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1년 넘게 정기연재를 했죠. 그 결과물들을 모아 책이 나올 수 있었어요.
Q. 숙제를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전부터 ‘위안부’문제를 그림으로 풀어야겠다고 다짐하셨던 건가요?
대학 졸업 때 작품 주제를 고민하다가 선택한 게 한국 근현대사였어요. 1920년대 후반에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그 시대를 그리게 됐고 그것이 시작이 됐죠. 주변에서 의뢰받아 작업할 때도 공교롭게 ‘위안부’문제와 계속 마주쳤어요. 그러면서 할머니들에 대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보게 됐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였죠. 그러다 보니 작업으로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책 작업을 하면서 겪은 변화가 있을까요? 또는 배운 점이 있다면요?
대상에 잘 다가가는 법을 배웠어요.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한 후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그를 온전히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대상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충분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란 걸 새삼 깨닫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기반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몸소 겪으며 깨달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Q.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 책을 출간하셨는데, 펀딩을 거친 이유가 있나요?
감사하게도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펀딩 도서로 선정을 해주셨어요. 저희도 한 번 더 홍보를 할 수 있는 기회라 놓치지 않았죠. 이밖에도 경기도 우수출판콘텐츠, 번역지원 사업, 멀티미디어전자책 제작지원 사업 등에도 선정돼 진행 및 준비 중에 있어요. 이번 작업에 참 많은 분이 함께해주셨어요. 출판사, 편집자, 동료 작가, 활동가분들을 통해 많은 걸 배웠고 함께하는 작업의 의미를 알게 됐습니다.
Q. 아주 강렬한 색깔로 할머니들을 그리셨어요. 이러한 표현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할머니를 예쁘게 그리고 싶었어요. 첫 출발이 김복동 할머니의 옆모습이었죠. 곱고 단아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그렸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까 그런 모습으로 담을 수 없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저도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니 너무 슬퍼졌고요. 그래서 이렇게는 이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기 연재를 하는 첫 번째 날 빨간 얼굴로 확 바꿨어요. 그 표현법이 할머니들의 강인하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에도 적합하다고 생각했고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죠. 그래서 이후로도 그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Q. 책에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통해 그분들의 목소리가 담기게 됐고, 또 그분들을 담기 위해 어떤 취재 과정을 거치셨는지요.
활동가분들이나 다른 작가 분들에 비해 제가 깊이 있게 접근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위안부’ 문제를 접해온 기간을 생각하면 제법 오래된 것 같아요. 대학 졸업전 때 근현대사를 그리며 아픈 역사를 바라보게 됐고, 그 뒤에는 TV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많은 자료들을 보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접한 것들이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현재 할머니들은 많이 연로하셔서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기억’을 위한 작업을 한다는 이유로 할머니들께 어려운 요청을 드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부 기록을 비롯해 30년간 활동해 오신 분들의 기록, 정의기억연대, 수요시위, 이외에 많은 책들을 통해 배우고 공부하며 기록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드는 데 동행해준 분들과 함께 내용을 구성했어요. 2차 피해가 되지 않을 내용을 선별해 담았지요.
물론 저의 노력이나 공부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피해자분들을 기억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할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한 입문서로 여겨주시면 좋겠어요.
Q. 그간 많은 자료를 찾아보셨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도움이 됐던 자료가 있나요.
도움을 받은 자료가 정말 많아요. 하나를 꼽기가 참 어렵지만 『25년간의 수요일』(윤미향, 사이행성)을 자주 언급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고 할머니들께서 어떻게 살아내고 또 노력해왔는지 알게 됐어요. 또 할머니들의 인권 회복 운동이 왜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고요. 이외에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안세홍, 서해문집),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김세진, 보리) 등과 같은 책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Q. 책은 크게 1부 ‘증언’, 2부 ‘기억’, 3부 ‘동행’으로 구성돼있죠. 그 안의 소제목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리하셨나요.
이 책이 그래픽노블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텍스트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소제목을 통해 할머니들의 스토리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Q. 2부 ‘기억’-‘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편에는 뉴욕 타임스퀘어에 여행 간 할머니를 상상하며 그리신 그림이 나옵니다. 배경으로 왜 뉴욕을 택하셨는지 궁금해요.
그 그림은 제가 뉴욕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작업한 거예요. 실제로 타임스퀘어에 가보니 굉장히 멋있더라고요. 이런 세계적인 관광지에 할머니들이 여행을 오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렇게 많은 전광판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내보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뉴욕에 간 우리 할머니’ 그림은 여러 가지로 제 마음과 기록의 방향성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작업이라 책 표지로도 사용하게 됐습니다.
Q. 할머니를 기록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하셨죠. 연출 방식이나 글쓰기에 있어 특히 조심스럽게 생각한 지점이 있었나요.
‘우리 어머니라면 이런 모습은 싫어하지 않았을까?’ ‘나라면 이런 건 싫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보는 게 기준이 된 것 같아요. 이 책은 상처를 겪고 굳건히 살아낸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이에요. 너무 큰 상처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2차, 3차 상처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상처에 집중하기보다는 할머니들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Q. 책 작업을 하며 무언가를 ‘깨닫게’ 된 순간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안산의 광덕고등학교 동아리 ‘웹툰그리기반’ 학생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작업을 소개하면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하게 됐죠. 근데 어느 날 학생들로부터 메시지가 온 거예요. “선생님, 우리가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전자파 차단 스티커를 제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가능하다고 했죠. 학교에 갔더니 다른 동아리 학생들까지 와있어 교실이 꽉 찼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설명을 했고, 그 후에는 아이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스티커를 제작했습니다. 완성본을 급식실 앞에 붙여놓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투표도 진행하더라고요. 득표수가 가장 많은 걸로 스티커를 제작해 축제 기간에 무료 배포도 했고요. 아이들은 슬퍼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어떤 주저함도 없었어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 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은연중에 배웠어요. 그래서 ‘위안부’운동이 왜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지를 또 한 번 깨닫게 됐습니다.
Q.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작가님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시나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학생들이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실제로 행동에 나섰듯이 말이에요. 어느 커뮤니티에서 제 작업을 보고 ‘할머니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따님이셨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걸 보고 찡했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라요.
Q. ‘위안부’라는 용어에 대한 고민도 책에 녹여내 주셨어요. 이에 대한 논의를 끌어내고 또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좋은 답을 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답인 것 같아요. 세상의 많은 일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한 번에 끝나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피해자 입장을 고려한 적합한 용어를 찾는 게 가능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용어를 사용했을 거예요. 근데 그러지 못했기에 아픈 역사를 배우고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해요.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배려와 관심은 삶을 보다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림은 예술 그 자체이기도 하고 때론 기록으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작가님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감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까요. 작가는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대상에 대해 느낀 바를 표현하는 사람이고, 그림은 고맙게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잘 그리는 것보다 뭘 그려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의 생각과 시선이 담겨야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이게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Q. 이어가는 작업으로 할머니들과 30여 년을 함께해온 활동가분들에 대해 그려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향 또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나갈 계획이신가요.
활동가분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고 각자의 삶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의 실제 삶과 시민들의 인식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살펴보고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책 작업을 하는 2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위안부’문제와 관련해서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활동해온 분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겠어요. 저로서는 짐작도 못 할 세월이죠.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그 존재와 활동의 의미를 재조명해보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한성원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8월 2일 월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3-22 1층 테르 프로미즈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 글쓴이 퍼플레이 강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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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플레이컴퍼니는 여성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퍼플레이’(https://purplay.co.kr)를 운영하고 있는 사회적기업으로, 문화 콘텐츠를 통한 성평등 가치 확산이라는 미션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