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하〉

홍윤신

  • 게시일2020.10.07
  • 최종수정일2024.04.09


2011년, 수요시위 1000회를 맞아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앞선 2008년에 윤정옥이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 현지에 '위안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146곳 이상의 '위안소'가 존재한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를 목격하고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전해온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추모비로 '위안부'를 기억하는 사람들

오키나와에는 이시가키섬, 도카시키섬, 요미탄촌, 미야코섬에 각각 민간에서 세운 '위안부' 추모비가 있다. 오키나와에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사람들, 그 증언을 들은 활동가, 예술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추모비를 건립했다.

오키나와전 중에 이시가키섬의 많은 주민들이 말라리아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이시가키섬의 향토사 연구자 오타 시즈오는 이시가키섬의 오키나와전 실태를 수 년간 조사하며 주민들의 증언을 그림과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던 중 그는 기록만으로는 추모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와하라라는 지역에서 '바바하루'라는 가명으로 불린 '위안부'의 죽음이 그랬다. 전후 일본군은 이 섬을 찾아와 전우들의 유골을 수습해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바바하루로 불렸던 이는 인적이 드문 후미진 밭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오타 시즈오는 조사를 통해 바바하루가 죽었을 장소를 특정해 그 곳에 나무로 된 추모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다. 1998년에 '유혼의 비(留魂之碑)'라 명명된 이 추모비 앞에서는 매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이 때마다 민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 증언을 요구하는 불청객들이 있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현재 위령제는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다.

배봉기가 동원되어 '위안부'로 생활하기도 했던 도카시키 섬에는 1997년 한국의 영화감독 박수남이 주도하여 세운 '아리랑 비'가 있다. 박수남은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인 <아리랑의 노래: 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년)를 제작했다. 윤정옥의 취재기와 박수남의 영화 등을 통해 배봉기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기자들과 연구자들, 조사자들이 오키나와의 민가에 방문해 함부로 사진을 찍는 일이 늘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집단자결'[1]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한 이 섬은 방문객들에게 마냥 우호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주민들은 일상이 침범당하는 상황에 예민해졌고, 사생활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단기간 방문해 모든 것을 찍고 알아가려는 태도는 주민들의 일상을 위협하기 쉽다. 따라서 기자, 연구자, 조사자들로부터 자신의 삶의 내밀한 영역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경계심을 외부인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전시폭력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영역을 보호하려는 이중의 노력을 해왔다. 주민들의 경계의 눈초리는 배봉기를 비롯한 많은 '위안부'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도카시키 섬의 아리랑비(1997년 건립)/  사진 : 홍윤신



한편 침묵을 강요당한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인‧군속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들은 해방 후 오키나와를 방문해 추모비를 직접 세웠다. 오키나와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결성한 '태평양동지회'는 1986년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오키나와 이야기』(2016년, 역사비평사)의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 교수와의 피해자 증언 모임을 통해 주민들과 교류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1999년, 경상북도 영양군에 '태평양 전쟁・오키나와전 조선반도 출신자 한의 비(이하 '한의 비)'가 세워졌다. 2006년에는 같은 추모비가 오키나와 요미탄에 세워졌다. 요미탄은 미군의 상륙 거점이었으며 오키나와전 중에 '집단자결'의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한의 비' 디자인은 오키나와의 조각가 긴조 미노루[2]가 맡았다. 요미탄의 '한의 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추도문이 새겨져 있다.

요미탄의 ‘한의 비’ (2006 년 건립) 오른쪽에 ‘위안부’를 위한 추모글이 새겨져 있다. / 사진 : 홍윤신



별도의 제작자없이 주민들의 기억 만으로 추모비가 세워진 사례도 있다. 2008년 미야코섬에 세워진 '아리랑 비'와 '여성들에게'(한국어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라는 이름의 추모비이다. 우연히도 필자의 조사가 이 추모비들의 건립에 작은 계기를 만들었다. 끝으로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미야코 섬의 ‘아리랑비’와 ‘여성들에게’ (2008년 건립)/ 사진 : 홍윤신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억하는 미야코섬 사람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던 당시에 상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곳이 미야코섬이다. 오키나와전 당시 미야코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이에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적은 지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6년, 오키나와전 연구자로서 오키나와 나하에서 비행기로 30분 정도 떨어진 미야코섬에 처음 방문했다. 이 곳은 오키나와전 당시 3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주둔하여 섬 전체를 일본 항공시설로 만든 '항공기지의 섬'이기도 했다. 필자는 항공기지 주변 마을 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주민들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옛 일본군 비행장 활주로가 있던 노바루 부락의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바위 옆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농부를 만났다. "그 돌이 무엇인가요?" 그저 지나가듯 물었을 뿐이다. 슬리퍼에 허름한 추리닝을 입은 농부는 바위 옆에서 자라나고 있던 작은 꽃들에게 물을 주며 대답했다.

"이 곳은 조선인 여성들이 빨래하러 가다 잠깐 쉬던 곳이라오."

그 농부의 이름은 요나하 히로토시였다. 기적과도 같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아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며 질문한 내게, 자신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야코섬에서 가장 큰 '위안소'가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소년시절 섬에서 나는 고추를 따다가 조선인 여성들에게 몰래 가져다주곤 했다는 추억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기지도, '위안소'도, 아무것도 없는 넓은 허허벌판에 커다란 현무암을 놓아 그녀들을 추모하고 있노라 했다. 예전에는 현무암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여성들이 잠깐씩 쉬다가 '위안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요나하 히로토시는 이 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필자는 그가 허허벌판에 노인 혼자서는 운반하기 힘들었을 커다란 돌을 가져다 놓고 홀로 '위안부'들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는 왜 그토록 이 장소를 기억하고 싶어했을까?

필자는 이 조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나하에서 생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키나와 평화투어를 하고 있던 윤정옥을 만났고 요나하 히로토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윤정옥이 생존하는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를 가장 처음 조사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윤정옥은 오키나와 방문 초기에 도카시키섬에서 유령이 되어 떠돈다는 '위안부', 하루에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했다. 하루에가 떠올라서였을까? 윤정옥 역시 미야코섬에 추모비가 건립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한편, 필자의 미야코섬 현지 조사는 의도치 않게 지역 내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필자의 조사 현장을 본 미야코 시의원 한 명이 시의회에서 '종군위안부' 지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이 '종군위안부'는 피해자도 꺼려하는 용어라며 반대했다. 가열되는 논쟁 속에서 사회를 보던 당시 시장이 "우리집 옆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라는 말을 하였고, 여당 의원들은 중립을 지켜야 되는 시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종군위안부' 지도 제작 논의 사실 자체가 시의회 회의록에서 삭제됐다. 이 소식을 들은 미야코섬 여성운동가들은 시의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조사자인 필자를 초청해 강의를 열었다.

초청 강의에는 그동안 필자에게 증언을 해 준 많은 주민이 모였다. 필자의 간단한 조사 내용 발표가 끝난 뒤 여성운동가들이 미야코섬 시의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참가한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손을 들고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랑을 부른 뒤 울먹이듯 말했다. 

"이 노래는 그때 그 여성들이 부르던 거에요. 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 하죠? "

아리랑에 대한 응답처럼 '위안부'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사쿠다 겐토쿠(1927년생) 씨는 필자가 미야코섬을 방문할 때 마다 옛 '위안소' 터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곤 했다.[3] 사와다 도요조(1939년생)씨는 본인을 군국주의 소년이었다고 소개하곤 했는데, 우물에 빨래하러 가는 여성들에게 돌을 던진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4] 그밖에도 다 떨어진 여성들의 옷을 꿰매어 준 사연, 몰래 여성들에게 차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나눠준 사연 등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후 윤정옥, 나카하라 미치코, 다카자토 스즈요를 대표로 하는 '오키나와, 한국, 일본, 미야코섬 '위안부' 문제 공동조사단'이 꾸려졌고, 멤버가 확대된 만큼 증언 수집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공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130여 곳의 '위안소' 가운데 17곳이 미야코섬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미야코섬에는 물이 귀하여 조선인 '위안부'와 현지 주민이 함께 우물을 사용했고, 우물을 매개로 주민, 특히 여성 주민들과 '위안부'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초기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마치 아이돌인양 일본군이 주최하는 행사에 불러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공동조사단은 위의 증언들을 모아 '위안부'를 본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최초의 증언집을 편찬했다.[5]

미야코섬 공동조사단의 활동 소식은 오키나와 본섬에까지 알려져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가 요나하 히로토시를 만나고 2년이 지난 2008년, 허허벌판에 놓인 현무암은 '아리랑비'가 되었다. 요나하가 가져다 놓은 그 모습 그대로,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기억의 돌인 아리랑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바람이 새겨졌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이 근처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츠가 우물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잠시 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비참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비를 후세에 전하고 싶다

- 추모비, 아리랑비 요나하 히로토시 

아리랑비 뒤에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세운 세 개의 추모비가 아리랑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이 비석들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점령지 및 식민지 피해자들이 사용한 11개 지역의 언어[6]와 베트남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비석에 베트남어의 비문을 추가한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가한 가해성 역시 함께 기억해야 된다는 윤정옥의 바람이기도 했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력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염원합니다. 

- 추모비, 여성들에게

미야코섬에서는 매년 9월 주민들이 주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이 추모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행사이다. 이 소중한 기억의 공간에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가 부른 아리랑 노래를 기억하는 주민들과, 그들의 증언을 들은 한국, 일본, 오키나와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어우러져 아리랑을 부른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비문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로, 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염원으로 미야코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센삐'와 '압파라기' 여성 사이에서 


필자는 오키나와의 '위안소' 조사를 12년간 진행하며 많은 증언을 들었고 많은 '위안소'를 보았다. 때로는 주민들이 그려주는 그림이나 기억에 의지해 '위안소' 위치를 점으로 찍어 나타낸 '위안소' 지도로, 때로는 '위안소'로 사용된 건물과 장소에서 과거 '위안소'로 쓰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이 본 '위안부'에 관한 기억들과 만났다.

군인들은 '위안부'를 '조센삐'(삐는 여성의 성기를 낮잡아 부르는 속어로, 일본군이 '위안부'를 부를 때 '위안부'의 출신지역에 삐를 붙여 '~삐'라고 부르기도 했다 -편집자 주)라고 불렀다. 그 어감 그대로 오키나와 주민들이 '위안부'를 차별적 언어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 하에서 '위안부'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버려졌는지를 기억하기에 오키나와 주민 그 누구도 이 여성들이 일본군과 '동지'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야코섬 사람들은 '위안부'들을 '압파라기'(아름다운 여성)라 부르기도 했다. 군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피부가 하얀 조선의 여성들은, 태양볕에 검게 그을린 섬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 여성들에게는 우물까지 빨래하러 가는 길에 잠시동안 자유가 허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야코섬 주민 누구도 이 여성들이 자유 의지로 이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3만 명 이상의 군인이 주둔한 고립된 섬은 철조망 없는 수용소였으며, 이 섬에서의 짧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언을 통해 말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민들의 증언과 진중일지 등의 일본군 군사자료를 분석해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2015년, 인팍토 출판회)를 펴낸 바 있다.

일본군'위안부'와 '집단자결' 피해자 모두 전시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일본군을 따르거나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다. '종군위안부'나 '집단자결'이라는 말은 피해자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적 설명이 필요한 불완전한 용어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구조적인 폭력을 가시화하여 대항언어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그 자체가 운동과 연동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위안부 당사자가 아닌 '위안부'를 목격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운동과 연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김학순의 증언과 소송은 한국은 물론 일본의 여성과 시민운동을 결집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일본의 법적 배상과 공적 책임을 묻고 한국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운동이 일본 내에서 전개되었다. 그 정점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오키나와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 펼쳐졌다.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운동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목격자 증언의 공간화'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배봉기를 첫 '위안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배봉기들의 이야기를 공간의 기억으로 남겨 놓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증언에는 그 어떤 법적 효력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투박한 지도 안의 점들로, 그림으로, 때로는 돌과 나무로, 자신의 집, 마당, 마을에서 자행된 가해의 역사로 기록되었고, 오키나와 주민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역사의 가해성 안에 위치짓는 역할을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긴 세월 배봉기를 기억하고, 조선인 여성들을 기록하고 추모해 온 오키나와 주민들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는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이 아름다운 타자들은 굳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머문 공간을 기억하며, 혹시 섬 내부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의 삶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민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기억의 공간화는 위안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함께 '본 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켜야만 드러나는, 주변화된 기억을 가시화하는 #with you 방식의 운동인 것이다. 이런 듣기 방식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러한 듣기 방식으로 증언대 위의 모습으로 피해자의 이미지를 고착화하거나,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오랜 시간 운동 및 연구를 해 왔던 이들을 손쉽게 재단하고 비판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타자입니까?" 라고.

 

각주

  1. ^ 일본군 사령부는 패전이 임박하자 집단자결이라는 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했고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요된 집단자결로 목숨을 잃었다. 집단자결은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전시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없는 용어이므로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2. ^ 제작자인 긴조 미노루는 <표현의 부자유전>을 둘러싼 일본 내의 ‘위안부’ 논의 탄압에 항의하며 2019년에 '아리랑의 시 – 군위안부 상'이라는 목조 추모상을 완성하기도 했다.
  3. ^ 2007년 5월 11일, 지모리(地盛) 위안소 옛터, 2008년 1월 12일 지모리(地盛)의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4. ^ 2008년 1월 12일, 미야코 하나키리(花切)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5. ^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12개의 언어로 새긴 여성들에게 (戦場の宮古島と「慰安所」―12の言葉が刻む「女たちへ」)』홍윤신 편, 난요문고, 2009년
  6. ^ 한반도, 일본, 중국‧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괌, 티모르, 미얀마, 태국

연결되는 글

글쓴이 홍윤신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객원연구원. 2004년부터 12년간 오키나와전의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2015, 인팍토 출판회) 및 "Comfort Stations" as Remembered by Okinawans during World War II(2020,Brill)를 출판했다.

yunshin.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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