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술 증언록은 소설로 다시 쓰여야 했는가 - 김숨의 『한 명』을 중심으로

소영현연세대 젠더연구소 전문연구원

  • 게시일2019.10.20
  • 최종수정일2022.11.28
이 글은 『구보학보』(2019)에 실린 『목격-증언하는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과 2019년 예테보리 국제도서전 프로그램 북에 실린 “When Literature Inquires the Gender of Labor”의 일부를 요약하고, 지난 8월 22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콜로키엄(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 김숨의 소설을 중심으로)에서의 논의 내용을 참조하여 수정한 글이다. 유익한 질문을 해주신 토론자 권김현영 선생님과 콜로키엄에 참여했던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현재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2015년 한일 ‘불가역적’ 합의 이후 지난 몇 년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문화적 재현물은 크게 증가했다. 김숨의 ‘위안부’ 서사인 『한 명』(현대문학, 2016)과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2018)와 함께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 2018)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도 그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출간물이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문화적 재현물의 관심은 대체로 전시 성폭력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 자체에 집중하며 본격화되었다. 사건이 삶에 드리운 영향은 대체로 지워진 채로 다루어졌고, 일본군‘위안부’는 소녀나 할머니로 등장하거나[1] 분절된 시간을 단절적으로 사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단 한 명의 일본군‘위안부’ 생존자가 남은 상황을 가정하는 소설 『한 명』과 중국의 위안소 풍경을 당대의 시간 속에서 다룬 소설 『흐르는 편지』에서도 일본군‘위안부’는 분절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로 등장한다. 끌려간 소녀들 열에 아홉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 그녀들은 식모살이를 하거나 병들거나 망가진 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점차 운동가로서의 면모에 집중하거나 조력자로 시선을 돌리는 식 혹은 담론 자체를 논평하는 식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에 비하면 김숨의 소설은 소재적 차원에서 트라우마적 사건 자체에 여전히 집중하는 편이다. 김숨 소설의 성취와 한계는 소설의 재현이 보여주는 표면적 특질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위안부’의 표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평가는 문화적 재현물의 차원에서 정당하지만, 문학적 재현물이라는 차원에서 좀 더 섬세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문화적 재현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 갈라지는 지점, 즉 김숨의 ‘위안부’ 서사가 갖는 문학적 의의를 검토함으로써 그 차이에 대한 부족한 논의를 보충하고자 한다. 재현의 원리와 재현된 표상을 구분하면서, 소녀와 할머니로 다루어진 표상에 대한 평가에서 나아가, 왜 김숨 소설이 소녀와 할머니를 등장시키는지, 그 효과가 무엇인지를 문학적 논의 지평 위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향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학적 성취의 진전을 위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지점이다.  

재현물은 언제나 시대가 허용하는 재현의 한계 안에서만 구현된다. 문학적 재현물은 시대적 한계 인식의 리트머스인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재현물의 성취 여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다루었는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자 했느냐는 질문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누락되기 쉽지만, 최근의 문화적 재현물은 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의 문제를 바라보는 방법론적 차원의 관심을 공유한다. ‘위안부’ 문제를 현재화하려는 시도로 압축되는 방법론에 대한 공통의 관심은 시대의 인식적 한계의 최저선을 보여주려는 시도로써 다루어져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현재화하려는 방법론적 시도가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한 명』을 중심으로 보자면 김숨 소설의 의미는 ‘위안부’의 문학적 재현을 재개했다는 사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새롭게 열린 한국문학의 논의 지평과 만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현재화하려는 김숨의 방법론적 고민은 트라우마적 폭력과 고통의 재현의 불/가능성론에 회피 없이 대결하는 방식으로 깊어지고 있다.       

 

『한 명』 표지 ©현대문학

 

소설로 쓴 구술 증언록 

개별 희생자로서의 ‘위안부’뿐 아니라 ‘위안부’를 둘러싼 ‘문제’ 자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김숨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에서 시작된 일본군‘위안부’의 증언(“내가 피해자요”)을 각주 형식으로 소설 안의 말로 옮기고 그 말을 이어받은 수많은 다른 증언들(“나도 피해자요”)을 소설의 형식으로 구성해낸다. 김숨은 트라우마적 사건의 현재적 지속성, 그 분절 없는 고통의 감각에 좀 더 충실하면서, 민족과 젠더 그리고 인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뒤얽혀 있는 ‘위안부’ 서사를 통해 시민-작가로서의 윤리를 실천한다.   

김숨의 ‘위안부’ 서사는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재현 방식을 피하면서도 갖가지 폭력이 새겨진 신체를 통해 제국과 전쟁의 폭력성을 가시화한다. ‘위안부’의 몸, 폭력과 억압이 새겨진 소녀의 몸,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허기와 고통, 헤어날 수 없는 죽은 이들에 대한 꿈과 살아 돌아온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수치심과 죄의식을 전한다. “만주 위안소 이름을 모르지만, 자기 피와 아편을 먹고 죽은 기숙 언니의 이빨이 석류알처럼 반짝이던” 것을, “삿쿠에 엉겨 있던 분비물에서 나던 시큼하고 비릿하던 냄새”와 “검은깨를 뿌린 듯 주먹밥에 촘촘 박혀 있던 바구미의 개수까지”(『한 명』, 151쪽), 고통의 생생한 감각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 

『한 명』이 ‘증언에 나서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자를 내세운 ‘위안부’ 서사라는 사실은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증언록의 말들은 소설 내에서 증언이 이루어지기 이전 기억의 형식으로 불려 온다. 작가는 공적인 발화가 이루어지기 전, 증언 이전의 침묵을 들여다보고 그 침묵이 말을 찾지 못한 ‘증언 이전의 증언’임을 독자에게 전한다. 그리하여 피해 생존자를 만나러 나선 (그녀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라는 것을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자 “살아 있”는 사람(『한 명』, 143쪽)인 ‘다른’ 생존자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밝히는 증언이 될 터인데)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소설 전체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술 증언록을 이루게 된다.

증언의 기록은 구술된 목소리를 문자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증언자의 목소리가 기록자의 문자로 변환되는 바로 그 과정은 증언의 기록에 기록자의 관점과 입장이 새겨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미 일본군‘위안부’의 증언 채록 과정은 증언자의 사투리가 표준어 문자로 기록되거나 입말이 문어체로 기록되는 변형 혹은 정반대로 ‘~했다’ 체의 기록이 점차 입말을 살리는 쪽으로 바뀌었다[2]. 이러한 변화는 단지 표현의 변화만이 아니라, 증언자의 ‘교차적이고 중층적인’ 역사성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채록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3] 

『한 명』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재현적 시도를 넘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의 의미, 즉 발화 주체의 위치 설정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따지자면 그 고민은『한 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 『한 명』을 출간하던 시기에 발표된 단편소설 「녹음기와 두 여자」(2016)에서 소설 내 채록자로 등장하는 조윤주가 ‘위안부’의 증언과 채록에 대해 갖게 되는 태도에서 방법론을 둘러싼 좀 더 직접적 고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을 하는 그녀의 기억만큼이나, 증언을 받아 기록하는 내 기억도 중요하다. 나는 녹음기로 녹음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의 옷차림을, 안색을,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눈동자의 흔들림을, 시선에 담긴 감정을, 몸짓 하나하나를. 손으로 아무리 밀어도 꿈쩍 않는 바위덩어리 같은 침묵을. 
기억해두었다가 녹취를 글로 풀 때 함께 풀어 넣어야 한다. 괄호 속 설명으로든, 말줄임표로든, 느낌표로든, 행간으로든, 각주로든.

(「녹음기와 두 여자」, 69쪽.)  

 

그녀는 어쩌면 매순간 증언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그 어떤 기척으로, 침묵으로……. 탄식, 비명, 흐느낌, 발광, 침묵도 증언의 한 방식이므로.

(「녹음기와 두 여자」, 75쪽.) 

 

글자를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의 기억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기억과 어떻게 다른가. 자기 자신을 잊고 과거의 경험을 모두 지운 사람의 기억은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가. 녹음기에는 기록되지 않는 것들, 목소리 사이를 채웠던 몸짓, 표정, 침묵은 과연 복원될 수 있는가. 증언과 채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녹음기와 두 여자」는 이러한 질문과 성찰 속에서 증언자와 채록자의 자리가 선명하게 구분될 수 없으며 모두가 증언자-채록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증언자를 인터뷰하면서 증언자가 되어간다.”(「녹음기와 두 여자」, 72쪽) 그러나 증언과 구술이 갖는 특성에 대한 이러한 환기는 해석자에 의한 증언의 변형과 왜곡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아니다. 어떤 증언에도 그것으로 다 소진되지 않는 증언자의 삶이 남는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녹음기와 두 여자」에서 다섯 번에 이르는 방문마다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한 정 할머니가 유일하게 했던 “다 잊었다”(76쪽)는 말은 채록자에게 “다 기억하고 있다”(76쪽)는 말로 들린다. 다 잊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며, 사실 “기억하는 것이 망각하는 것”이고 “역으로 기억하지 않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 수치스러운 기억, 소름 끼치는 기억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잊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 할머니는 “그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76쪽)고 조심스럽게 확신한다.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다. 다변이었던 문 할머니의 부음을 알리는 아들의 전화로 채록자에게 증언의 의미는 다시 되새겨진다. 함경도 출신 혈혈단신으로 알고 있던 문 할머니로부터 의붓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없으나, 아들은 할머니가 자신의 얘기를 채록자에게 여러 번 했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채록자를 기다렸다는 아들의 말은 할머니의 말을 믿지 못했던 채록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퍼즐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잇고 이어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육하원칙과 기승전결에 집착”했던 당시의 자신에게 문 할머니의 기억은 논리적이지 못한 데다 일관성이 없는 말들로 들렸고, 결국 할머니의 녹취된 구술은 증언록에 실리지 못했다. 매번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던, “아무에게도, 친정어머니에게도 못했다면서 들려주었던” 반복된 이야기들은 끝내 녹음기에 저장된 채로 미완의 증언 원고로 남겨졌을 뿐이다. 

 

텅 빈 도로에 서늘한 정적이 감돈다.
……내가 다 얘기해줄게, 내가 다 얘기해줄게, 내가 다…….
이중창을 부르듯 문 할머니의 목소리에 정 할머니의 목소리가 겹쳐 도로 위를 떠돈다.

(「녹음기와 두 여자」, 98쪽, 강조: 김숨)

다섯 번의 만남 동안 침묵으로 증언을 완강히 거부한 할머니와 “내가 다 얘기해줄게” “하나도 안 잊었어”(94쪽)[4].라는 말을 증언 사이에 추임새처럼 넣으며 매번 기억을 각색한 할머니, 채록자가 맡았던 두 구술자 사이에서 침묵과 증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녹음기 앞에서의 침묵은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서의 침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기억들을 말로 하지 않는 사이에, 무엇을 말하지 않기 위해 다른 무엇을 말하는 사이에, 말들 사이에 남겨진 공백으로서의 침묵은, 어쩌면 구술이 “침묵을 덮는 과정”에 다름 아닐 수 있음을 환기한다.[5] 

증언이 침묵과 말들 사이에 놓인 어떤 것이자 침묵들과 목소리들을 겹쳐 듣는 채록자의 자리에서나 사후적이고 구성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라면, 녹음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할머니의 일관된 침묵은 증언인가 아닌가. 채록자의 녹음기에만 남겨져 있으며 증언 원고로 완성되지 못한 할머니의 말들은 또 구술 증언인가 아닌가. 발화 주체의 위치설정을 둘러싼 성찰이기도 한 이러한 인식은 결국 증언자나 증언의 말을 대상화할 수 없으며, 채록이란 ‘이미 언제나’ 구술 혹은 침묵에 연루되어 있다는 인식의 수긍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 말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자리가 바로 증언의 영역이라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지적처럼[6], 「녹음기와 두 여자」를 통해 김숨은 채록자 혹은 작가의 자리가 대상화도, 대신 말하는 방식도 아닌 채로, 죽은 자들과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에게 목소리를 내어주는 방식 속에서 확보된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이 목격-증인의 자리에 대한 인식이 바로 기억되지 않는 기억의 귀환을 시작하고자 하는 김숨 소설의 출발지이다. 

 

 

침묵을 증언하고 기억을 복수화하는,
귀환의 서사

물론 그 증언이 현재의 삶을 잠식한 과거 경험의 무시무시한 폭력성으로 포착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녹음기와 두 여자」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완강하게 증언을 거부한 정 할머니를 두고 짚었던 작가의 말처럼, “그녀가 위안부 시절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시절 일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그러니까 여기서 “기억의 주체는, 그녀가 아니라 위안부 시절 경험들”(「녹음기와 두 여자」, 77쪽)이다. 그리하여 김숨 소설은 ‘대신 말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침묵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침묵으로 남겨진 참혹한 경험에 소설의 공간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 명』은 여성으로서 겪은 전쟁의 기록, 전쟁을 겪으면서 폭행이나 질병으로 죽은 이들, 전쟁이 끝나자 버려지거나 학살당한 이들, 수효를 확인할 수 없으며 생사를 확인할 수 없고 그리하여 망각도 애도도 할 수 없는 이들과 그 삶을 서사 안쪽으로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그 한마디를 평생 기다렸다는 이가 그녀는 아무래도 군자 같다.
침묵하던 그이는 갑자기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벗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미주 6)면서. 맨몸뚱이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그이는 블라우스 안에 입은 속옷마저 훌렁 벗더니 배 한복판에 녹슨 지퍼처럼 박힌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애기만 긁어냈으면 내가 애기 낳고 살잖아. 그런데 애기보까지 싹 들어냈지 뭐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애기 낳으려고 별 지랄을 다 했잖아. 절에 가 공양도 하고, 삼신령께 빌기도 하고 그랬잖아, 굿도 하고.”(미주 7)

그곳에서 열여섯 살이던 군자가 애를 가져 배가 불러오자 그들은 말했다.
저년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곱고 더 써먹어야겠으니, 저년 자궁을 들어내라.(미주 8)

 

미주 6) 김영숙(1927년생,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슬픈 귀향 1부-북녘 할머니의 증언」. 이토 다카시, 뉴스타파 『목격자들』 제공 
미주 7) 김복동(1927년생),『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2』
미주 8) 리경생(1927년생,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슬픈 귀향 1부-북녘 할머니의 증언> 『한 명』 14~5쪽, 259쪽)
-『한 명』의 미주 중 

 

‘위안부’의 증언을 인용하는 방식은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영화 <귀향>(조정래, 2016)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영화 <귀향>과는 달리 소설 내에서 미주의 형식으로 출처를 표시할 뿐 아니라 글자 모양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증언의 말에 새겨져 있는 본래의 자리를 지우지 않는다. 증언들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하지만 이어붙인 자리를 표식처럼 남겨둔다. 소설 내부에 인용 흔적을 남겨놓는 증언의 재구성 방식은 소설 내부에 구술 증언의 목소리‘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플래시백 기법으로 과거와 현재를 인과관계로 연결 지어버리는 방식이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영혼의 애도로 해소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하고 무엇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개인의 불운으로 다룰 위험이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영상 재현물과 언어 재현물의 차별적 지점은 뚜렷해진다고 해야 하는데, 한 사람의 목소리로 발화됨으로써 증언의 복수성이 지워지는 <귀향>의 방식과 달리, 『한 명』에서 목소리‘들’은 한 인물의 전쟁 기억으로 축소되지 않으며 반대로 각기 다른 기억이 미주를 통해 화합될 수 없는 불규칙적 단층을 이뤄 복수성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허윤의 지적처럼 “300여 개의 각주는 잔인한 성폭력과 끔찍한 트라우마를 묘사하면서 이것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팩트’로 사용”된다[7]. 이 섹슈얼리티 재현의 폭력성을 전면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기억의 복수화의 효과로 『한 명』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인해 과거로 이끌려 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기록으로만 남은 존재들, 기록에도 남지 못한 존재들, 어딘가로 사라진 존재들[8]을 복원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집단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와 복원될 수 없는 폭력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생존자를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를 복원한다는 오해를 가로지르며 국가폭력이자 젠더 폭력의 피해를 폭로하고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귀환 자리를 마련해주는 매개자를 통해, 그녀들의 삶의 비극성과 귀환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재적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9] 그렇게 김숨의 소설로 완성된 증언록은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지금 이곳에 ‘위안부’의 자리를 마련하는 귀환의 서사가 된다. 

 

2019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제2차 콜로키움 포스터

2019년 8월 22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해당 주제로 콜로키엄이 열렸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제 2차 콜로키움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후기

 

각주

  1. ^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허윤의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성성의 곤경-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여성과역사』, 2018)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 고혜정·서은경·신영숙·여순주·조최혜란,
  3. ^ 양현아,
  4. ^ 김숨,
  5. ^ 정지영,
  6. ^ 冨山一郞(임성모 옮김), 『전장의 기억』, 이산, 2002, 94~96쪽
  7. ^ 허윤,
  8. ^ 정진성,
  9. ^ 권명아,
글쓴이 소영현

연세대 젠더연구소 전문연구원. 문학평론가. 한국근현대 문학문화 전공. 논문으로 <포스트 미투 운동과 시민-독자의 자리>, <참여 과잉 시대의 비-시민 정치과 광장의 탈구축>, <징후로서의 여성/혐오와 디아스포라 젠더의 기하학>, <그림자 노동의 (재)발견: 자본과 노동의 성적 분할과 계급 위계-식민지기 ‘남의집살이’ 여성의 노동을 중심으로>, <야만적 정열, 범죄의 과학: 식민지기 조선 특유의 (여성)범죄라는 인종주의> 등이 있다. 저서로는 『올빼미의 숲』, 『하위의 시간』,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공저로는 『#문학은_위험하다』, 『비평 현장과 인문학 편성의 풍경들』,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감성사회』, 『감정의 인문학』, 『集體情感的系譜: 東亞的集體情感和文化政治』, 『Bonjour Pansori!』 등이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