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남과 북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함께 만나는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가 3월 6일부터 11일까지 여성가족부 지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최로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에서 열렸다.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에서는 북측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리경생(1917~2004)을 비롯하여 김대일(1916~2005), 곽금녀(1924~2007) 등 14명과 김복동(1926~2019), 황금주(1922~2013), 윤두리(1928~2009) 등 남측 피해자 10명의 사진과 증언이 전시되었다. 일본의 포토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伊藤孝司)가 북측을, 다큐멘타리 감독 안해룡이 남측 피해 생존자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학순이 기자회견에서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임을 증언한 이래 남과 북의 ‘위안부’ 피해자를 기록한 사진이 한 자리에서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북측 피해자 사진이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최초이다.
아래의 인터뷰는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와 관련하여 전시 전 안해룡 감독과 이토 타카시 작가가 이메일로 나눈 서면 인터뷰로, 이토 타카시 작가가 어떻게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담고 있다.
안해룡
조선인의 강제동원이나 군인, 군속,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에 관해서는 어떻게 취재하기 시작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저는 처음에 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처음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본인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다가 조선인도 피폭을 당했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갔었지만 조선인 원폭피해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 문제는 반드시 취재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원폭피해자를 처음에 취재했고, 한국에 가서도 원폭피해자를 만났습니다. 이 취재 때문에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안해룡
그러면 한국인 원폭피해자 이후에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힘든 고통을 겪은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들을 취재하고, 이후 이런 인연으로 강제동원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에도 자주 가게 되었지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취재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1991년 10월에 처음으로 실명으로 일본군‘위안부’의 피해를 실명으로 증언한 김학순 씨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91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문스크랩을 하면서 취재를 계속했습니다.
안해룡
북한까지 방문해서 취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을 가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군인 군속,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을 취재했고, 한국 이외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돌며 일본에 의한 전쟁 피해자들을 취재했습니다. 그런 곳도 취재를 해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계속해서 전부 다 취재했어요. 유일하게 가지 못했던 곳이 북한이었어요. 1991년에 신청을 해서 이듬해인 1992년에 강제연행 등을 조사하는 그룹이 북한에 간다고 해서, 거기에 참가해서 처음으로 갔어요.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10명 정도를 만났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밖에는 취재를 할 수가 없어서 저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취재를 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단독으로 간 것이 1998년이에요.
안해룡
두 번째 방북을 해서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평양과 원산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그리고 강제동원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군인 군속으로 전선에 끌려간 사람들, 종교탄압을 받은 불교도, 기독교들을 취재했어요.
안해룡
취재 때 가장 인상에 남은 사람이나 장소는 어딘가요?
이토 다카시
그때 가장 많이 만난 것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인데요. 그녀들도 해방 후에 일본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몇 십 년 만에 만난 일본인인 저에 대해서 자신의 원한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을 심하게 추궁했는데요. 남성인 저에게는 굉장히 괴로운, 듣다 보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취재를 했지만 굉장히 괴로운 취재였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북한 정부 관계자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피해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나던 북한 정부기관 관계들이 통역을 해주었는데요. 가끔 여성이 통역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어요. 할머니들의 비참한 경험을 듣고 저에게 통역을 해주면서도 그녀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는 슬픔과 분노가 저에게 전해졌어요. 통역자 본인의 감정도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피해자 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 여성들도 그것에 대해서 굉장한 비참함을 느낀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안해룡
북한의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한국의 피해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북한의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일본군에 의해 끌려간 지역이 한국과 북한의 피해자들이 미묘하게 달랐어요. 북한의 피해자들은 만주나 중국 대륙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한국의 피해자들은 대만이나 미얀마 등 남쪽으로 끌려간 경우가 많지요.
안해룡
북한에서 만났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가운데 인상이 남는 분이 계신가요?
이토 다카시
1998년에 만난 정옥순 할머니입니다. 처음에 만난 그녀는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어요. 굉장히 멋쟁이 할머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머리에 있는 상처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어요. 일본군이 그녀의 몸 전체에 문신을 새겼어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위안소에서 도망치려다 들켜서 군인들이 몸에 문신을 새긴 거예요. 가슴과 배, 그리고 입 안까지 아이가 낙서를 한 것 같은, 무얼 새겼는지 알 수 없는 문신이었어요. 그녀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자신의 혹독한 경험을 내게 남김 없이 털어놓았어요. 들으면서 말이 나오질 않았어요.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일본인인 저를 향해서 자신의 원한을 풀듯이 이야기를 했고, 중간에 일어서서 저에게 다가왔어요. 저로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제 눈앞에서 하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의 고통이 정말 절실히 전해져왔습니다. 정말 괴로운 취재였어요. 그녀들이 얼마나 참혹한 경험을 했는지 정말 가슴속에 새겨졌다고 할까요? 그런 취재가 되었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피해를 당했지만, 이 가운데 할머니들이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체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아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매우 비인도적이고 잔인했다는 것이 그녀들이 받은 피해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몇 분을 만나셨나요?
이토 다카시
1992년에 처음으로 4분의 할머니들을 만났고 그 후 모두 14명의 할머니들을 만났어요.
안해룡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 할머니들이 있나요?
이토 다카시
2017년에 취재를 하러 갔을 때 만날 수 없을까 요청했어요. 하지만 제가 만났던 14명 중 13명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고, 나머지 한 분도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안해룡
여러 차례 한국과 북한에 가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해오셨는데, 오랜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이나 북한의 피해 할머니들이 처음에 저를 대할 때 굉장히 경계를 했어요. 이는 일본인 남자가 인터뷰를 하러 왔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물건을 던진 할머니도 있었고, 저에게 역으로 질문한 할머니도 있었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을 이야기 하면서, 저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가 인터뷰를 당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어요. 몇 번이나 만나서 얘기를 하는 가운데 신뢰관계가 생겨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어요. 저도 그녀들과 진심으로 마주 대하고 인간끼리 정면으로 부딪쳐서 서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입장이 있지만 사람 사이에서 정말 마음을 서로 나눈 것 같았어요. 이분들이 잇달아 돌아가시고 있는 것이 괴롭습니다.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토 다카시
역시 그녀들, 할머니들이 당한 피해는 너무나 심각했어요. 예를 들어 전후 해방 후에 육체적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다는 사람도 있고, 결혼한 경우에도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경우도 있어서 계속 과거의 경험을 숨겨왔다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실제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로 심각한, 말도 안 되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 역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어떻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국교가 단절되어서 국교정상화 회담을 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도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북일 관계가 악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예요. 저는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신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저질러진 매우 중대한 일본의 범죄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이 범죄 행위에 대해 일본이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는 한, 이 피해를 당한 사람, 가족,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계속 비판할 것이고, 이는 다음 세대까지 계승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이 과거에 대해서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일본의 미래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취재를 이렇게까지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토 다카시
일본 내에서도 저처럼 이렇게 일본의 과거의 가해를 계속 기록하는 것이 지극히 보기 드문 존재가 되었어요. 일본 사회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의 피폭자와 처음 만난 뒤 계속 이 문제를 취재를 해왔는데요. 그 만남이 없었다면 저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하나의 운명과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일본 내에서 저 혼자일지라도 일본의 가해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주보고 확실하게 기록하는 저널리스트가 있어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도 있구요. 이렇게 취재한 것이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아서 한국이나 북한, 아시아에서 피해를 당한 나라의 사람들과 제가 취재한 내용이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번역 안해룡
행사개요
제목 사진전 <남과 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일시 2019년 3월 6일(수)~3월 11일(월)
장소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
주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관 아시아프레스
- 글쓴이 안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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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룡은 사진가이며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전시기획자 등 텍스트와 사진, 영상을 넘나들면서 작품을 만들고 잇다. 1995년부터 한국, 중국, 일본 등에 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사진과 영상에 담는 기록 작업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다이빙벨>을 감독했다. 현재는 일본에 있는 재일 한국인의 역사, 조선인이 관계한 일본 현지의 전쟁 유적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badasaram@gmail.com
- 글쓴이 이토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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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타카시는 포토저널리스트다. 1981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오가면서 원자폭탄 피해 실태를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약 7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피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본은 물론 한반도에 사는 피폭자들을 취재했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취재한 피해자는 8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말한다.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일은, 일본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이토 다카시는 일본의 과거를 일본인이 직접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분노와 슬픔을 정면에서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