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2부

신기영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수

  • 게시일2019.03.18
  • 최종수정일2024.05.29

‘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3.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연대회의」를 비롯한 국제적 시민연대가 주체가 되어 해결을 요구해왔다.

‘위안부’ 문제의 피해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여성·시민단체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각 국가의 시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부상했을 때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일의 시민들이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한국 및 아시아 각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초기부터 가장 진지하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알 수 없던 1990년대 초부터 아시아 각국의 피해상황에 대한 조사,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수많은 생존자 증언회 개최를 비롯하여, 특히 각국의 생존자들이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시작하자 재판 지원을 위해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각국단체들과 생존자들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재일교포여성들은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재일조선인 생존자를 지원하고 한일단체의 가교 역할도 하였다.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은 생존자에 대한 정보공유와 공동의 활동을 위해 「아시아연대회의」라는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공동행동을 취해 왔다. 1992년 서울에서 제1차 회의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는 2000년의 도쿄여성법정의 개최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에 대한 책임 인정과 생존자 구제에 대한 요구가 계속적으로 묵살되자 시민들의 손으로 민중법정을 연 것이었다. 이 도쿄여성법정에는 1990년대 초 구 유고 및 르완다 내전을 재판한 국제전범법정에서 활약했던 국제법과 전시 성폭력 전문가 및 재판관들이 참여하여 3일간에 걸친 재판을 진행했다. 아시아 국가와 네덜란드 등 9개국에서 64명의 피해자가 원고로 참여하여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책임자들을 기소하였다.

이 재판 과정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들이 겪은 다양한 피해 상황이 상세히 드러났고, 여성법정은 이러한 증언들을 사실로 인정하여 국제법에 따라 기소된 책임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가해자 처벌만이 정의를 회복하는 수단은 아니지만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재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대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루면서 형성된 국제규범이었다. 사실 인정, 사죄,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추도사업, 책임자 처벌과 같이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및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이 제시한 해결 조건은 그와 같은 인권규범의 축적에 기반한 것이었다.

아시아연대회의는 이후에도 일본 정부에 해결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특히 2014년 5월 31일에서 6월3일까지 동경에서 열린 제12차 회의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후퇴를 막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많은 생존자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가는 와중에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이 이미 일본 정부가 인정한 고노담화마저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폄훼하는 발언을 일삼는 데 대한 대처를 강구한 것이다.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 2014년 도쿄에서 아시아 및 네덜란드의 ‘위안부’ 문제 활동가 및 생존자들의 연대회의가 개최되었다. (출처 : 梁澄子(Yang Ching Ja)씨 제공)

 

연대회의 참석자들은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사죄는 누가 어떻게 가해행위를 했는가를 가해국이 정확하게 인식하여 책임을 인정하고 이를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표현으로 국내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표명하고 그러한 사죄가 진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후속 조치가 수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죄로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과 책임인정 및 해결책을 요구하였다.

1) 사실과 책임을 인정.

-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이 군 시설로 위안소를 입안, 설치하고 관리, 통제했다는 점
-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성노예’가 되었고, 위안소 등에서 강제적인 상황에 놓였었다는 점
-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식민지, 점령지, 일본 여성들의 피해는 각각 다른 양태이며, 그 피해가 막대했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
-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당시의 국내법 및 국제법에 위반되는 중대한 인권침해였다는 점

2) 위의 인정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

-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사죄: 사죄의 증거로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
- 진상규명: 일본 정부의 보유자료를 전면공개하고 일본 국내외에서의 새로운 자료조사, 국내외의 피해자와 관계자의 증언조사를 실시할 것.
- 재발방지 조치: 의무교육 과정의 교과서 기술을 포함한 학교교육, 사회교육, 추모사업 실시. 잘못된 역사인식에 근거한 공인의 발언금지 및 공인의 발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공식적으로 반박할 것 등.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가 일본 정부에 대해 요구했던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죄는 2015년 한일합의에서 ‘위안부’ 문제의 합의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한다는 의미로 역이용되고 말았다.

 

4. ‘위안부’ 문제는 국제기구의 권고 및 다국적 의회의 결의안을 통해 국제적인 승인을 확대하였다.

일본은 다양한 국제인권조약의 체약국이다. 예를 들면, 1985년에 여성차별철폐조약에 가입하여 체약국이 되었고 이에 따라 체약국의 의무인 조약이행에 대한 정기보고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왔다. 여성차별철폐조약 이외에도 인종차별철폐조약, 자유권규약, 사회권규약, 고문금지조약, 아동권리조약, 장애인권리조약, 강제실종자조약을 비준했다. ‘위안부’ 문제가 대두한 이래, 여성단체들은 이들 인권조약위원회에 ‘위안부’ 문제를 개진했다. 조약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심사보고서에서 거의 모두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권고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 중에서도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 및 한국의 단체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활동한 위원회로, 1994년 1월의 2,3차 통합심사 소견에서 가장 먼저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였다. 국제인권조약위원회들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조치를 촉구하는 권고는 2015년 외교장관 합의 직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영구적인 해결을 선언한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국제인권기구들은 이 문제를 해결되었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다만, 1990년대의 탈냉전기에 유엔 기구와 인권규범에 대해 기대했던 역할은 사실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제기구는 특히 일본과 같은 선진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강제력과 규범적 정당성이 없어 아직도 일본 정부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인권기구의 지속적인 권고로 인해 2000년대 후반에는 캐나다, 미국 및 유럽의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새로운 종류의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국제사회의 인식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5. ‘위안부’ 문제는 기림비 건립 및 문화 활동을 통해 자발적 지역운동으로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많은 생존자가 돌아가심에 따라 “해결”에서 “기억”으로 활동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현 일본 정부는 생존자에 대한 해결에는 소극적이면서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의 활동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소녀상 철거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국면이 오히려 시민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역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세를 교육하고 기억하는 일이 중대인권침해의 재발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 기림비와 박물관은 기억을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최초의 기림비인 평화비(일명 소녀상)는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하여 제작되어 서울주재 일본대사관의 맞은 편에 설치되었다.

이 소녀상은 「수요집회」라는 상징적인 시민들의 집합 장소와 시간의 제약성을 무한정으로 확대하였다. 평화비는 이를 보는 개인들 각자가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되어 지역주민들이 건립한 새로운 기림비가 전국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 크기도 형태도 다양하여 그 지역이나 설립자에 따라 지역화된 기림비가 건립되고 있다. 

미국 뉴저지주의 포트리에 위치한 헌법공원의 ‘위안부’ 기림비 (출처 : Linda Hasunuma 제공)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Fairfax County)에 있는 ‘위안부’ 평화공원에 설치된 기림비 (출처: Mary McCarthy 제공)

 

사진에서 보듯 나비형태나 다양한 모습의 여성은 모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억이 로컬화(지역화)된 형태이다. 처음 서울에 평화비가 건립되었을 때만 해도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특정 이미지로 고정할 것이라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권”이나 “‘위안부’ 문제” 그 자체가 지역성과 시간성을 초월하는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 시민들은 각자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위안부’ 문제에 공감하고 그 의미를 재사유한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주체, 기억하는 방식, 그 기억의 내용은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6.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미투시대에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으로 확대하였다.

2017년 말부터 미투운동(MeToo·성폭력 고발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위안부’ 문제는 다시 한번 새롭게 사유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강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성폭력의 사회적 구조를 깨우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전쟁 후에도 수십 년간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생존자들이 침묵시켰던 가부장적 사회구조는 수많은 일상적 성폭력을 재생산하면서 아직도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미투에서 드러난 여성의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피해자 비난, 그리고 여성의 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젠더 권력 구조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잘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을 지원해 온 이들이 ‘위안부’ 생존자들이야말로 최초의 미투운동가라고 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미투의 상징적 존재인 이토 시오리(프리랜서 저널리스트)는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녀 자신이 가해자에 대한 재판을 힘들게 진행하면서도 전세계의 성폭력 피해자들을 취재하고 기록하여 성폭력의 실태와 구제방안, 그리고 생존자들의 용기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삶과 투쟁은 이토와 같이 미투를 외친 21세기의 생존자들에게도 용기와 위안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이제 생존자들의 피해와 해결로 축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한 국가의 정부가 종결을 선언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여성인권의 세계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처음부터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그들을 지원한 아시아 여성들의 연대에 의해 세계화되었다. 이제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들을 수십 년간 지원해 온 시민들은 기억과 교육을 위해 또 다른 긴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유네스코 인류기억 유산 제정을 위한 국제연대의 노력이나 한국에서 뒤늦게 발족한 정부지원의 연구소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세계 시민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펼치고 있는 창조적이고 로컬화된 기억과 교육활동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그러한 자발적인 지역활동의 세계적인 확산에 의해 앞으로도 유지되고 계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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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신기영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수. 한일여성운동비교연구, 젠더와 정치대표성, 미투의 비교연구를 진행중. 한중일 여성정치학자 공동연구네트워크운영,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편집위원, Journal of Gender Studies 편집장

 

kiyoungshin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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