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1부

신기영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수

  • 게시일2019.03.19
  • 최종수정일2023.09.21

‘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외쳤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선언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3여년 간의 국내외 상황은 한일 정부 간의 양자 합의라는 틀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과연 얼마나 적절한 접근이었는지를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정부가 일본 정부와 협상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가장 많은 수의 ‘위안부’ 생존자가 등록된 한국정부는 이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성폭력과 같은 중대한 인권문제에 피해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할 것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한일 양국은 석연찮은 비밀협상으로 피해자와 시민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서둘러 문제를 종결하는 데에 역점을 둔 합의를 해버렸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목적에 종속된 ‘위안부’ 문제 해결의 협상에서 여성인권과 성폭력, 그리고 피해국 정부의 역할은 과연 어느 정도 고려되었을까?

한일합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스스로 생존자이며 평화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남은 생존자들도 몇 분 되지 않는 2019년 봄,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합의의 역풍으로 인해 오히려 지금 ‘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수요집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참여자가 늘어나고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보다도 ‘위안부’ 문제에 더 공감하고 있다. 이제 남은 우리들에게는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 책임의 인정과 같은 가해자의 반성을 통한 “해결”의 틀을 넘어 이 문제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필자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와 한일관계라는 국가 및 국익 중심의 인식적 틀로는 포괄할 수 없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이라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주장해 왔다. ‘위안부’ 피해자의 범위는 최대 피해국인 한국을 넘어, 일본이 전쟁했던 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인도네시아 주재의 네덜란드 여성들에게까지 이른다. ‘위안부’ 문제는 그 자체가 국제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은 90년대 초 빈번했던 민족분쟁에서 전쟁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성폭력을 범죄화하는 국제여성인권규범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20세기에 발생한 국가에 의한 여성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되었고,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집단적 기억을 통해 재발을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인류의 공동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는 초국가적인 성격을 가지는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여기서는 아래에서 논하는 여섯 가지 측면에서 초국가적이고 글로벌한 성격을 검토한다.

 

1.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국가의 공통의 전쟁피해이다.

먼저 ‘위안부’ 문제의 피해상황을 보자. ‘위안부’ 문제는 한국(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광범위하고 공통된 전쟁피해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일본군 위안소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출처: http://womenandwar.net/kr/what-is/)

 

위안소 분포지도에서 보듯 그간 연구에 의해 밝혀진 위안소만해도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수백개가 넘는다. 일본, 조선, 대만의 ‘위안부’는 주로 군의 관여하에 강제 모집되고 운영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현지여성들을 모집하거나 납치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거나, 현지여성을 납치나 폭력으로 제압하여 가두고 강간하였다. 이렇게 수만에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아시아의 여성들이 위안소의 ‘위안부’ 또는 전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피해를 숨기고 살아오다가 1991년 김학순의 증언으로 그 일부가 “‘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아시아 미해결의 아시아 공통의 과제로 남아 있다.


 

2.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여성인권규범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1991년 ‘위안부’ 문제가 김학순의 증언으로 가시화된 이후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곧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어 199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세계여성인권규범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90년에 한국여성들이 처음으로 이 문제를 일본 정부에 정식 제기했을 때 일본 정부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국가책임을 부인하였다. 그러자 지원단체들은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해 유엔 인권기구에 문제제기를 하기로 하였다. 1992년에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일본 시민단체도 같은 해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 그리고 5월에는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강제연행 노동자 문제와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당시 인권소위원회의 ‘중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 특별보고관 테오도르 반 보벤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12월에는 국제인권기구의 전문가들이 동경에서 한국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공청회를 열었다. 당시 유엔에 한국 측과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던 일본인 변호사에 따르면 일본 관련 다른 어떠한 인권 문제들도 그만한 주목을 받은 예가 없었을 만큼 ‘위안부’ 문제는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한다.

여성 폭력문제를 다루던 글로벌 여성인권 네트워크의 반응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1993년의 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에 큰 분기점이었는데 ‘위안부’ 생존자들은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서 직접 증언하는 등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탈냉전 이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인권 문제에 기존의 인권 레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기 위해 개최된 만큼, 이 회의에서 세계여성단체들은 기존 인권 레짐이 남성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를 내걸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그해 12월에는 유엔 총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철폐 선언(Declaration of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의 최종 결의사항에는 여성단체들의 주장을 반영해 유엔 인권위원회(UNCHR)에 여성에 대한 폭력실태를 조사하는 특별보고관 제도(Special Rapporteur on Violence against Women)를 신설할 것이 포함되었다. 1994년에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가 그 첫 번째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녀는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여성폭력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최초의 유엔기구의 보고서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을 받으며 글로벌 인권 문제로 이슈화되었다. 1995년에는 베이징에서 제4차 유엔 세계여성회의가 열려 여성폭력 문제의 근절이 주요 과제로 논의되었으며 ‘위안부’ 문제도 계속해서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졌다.

1990년대 초는 특히 보스니아 전쟁 및 르완다 내전과 같은 민족분쟁에서 집단 강간 및 강간소와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 두 전쟁은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범죄를 재판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재판 과정에서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은 전쟁을 위해 계획된 수단임이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계획된 성폭력은 ‘인도(人道)에 반하는 범죄’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국제상설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1998년 로마조약에서 강간, 성노예화, 강제매춘, 강제임신과 불임, 성폭력 등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정의하고 국제법사에서 여성인권에 대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렇게 1990년대는 여성인권과 전시 성폭력과 관련된 국제규범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였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많은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후 1996년에 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에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 채택된 맥두걸 보고서, ILO 보고서, 인권고등판무관 연례보고서 등에서 ‘위안부’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위안부’는 성노예(sex slave)로, 위안소는 강간소(rape center)로 개념화되었다. 특히 맥두걸 보고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불처벌의 문제를 다루고 범죄 책임자 처벌을 포함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들에 기반하여 지금까지 많은 국제인권기구들이 일본 정부에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수많은 권고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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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신기영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수. 한일여성운동비교연구, 젠더와 정치대표성, 미투의 비교연구를 진행중. 한중일 여성정치학자 공동연구네트워크운영,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편집위원, Journal of Gender Studies 편집장

 

kiyoungshin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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