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1085통의 엽서와 1만 589명의 시민, 그리고 감동의 오사카 활동가들

  • 게시일2023.11.06
  • 최종수정일2024.04.24

1만 589명과 2만 1085통. 두 달간 엽서쓰기 운동에 참여한 경남도민과 그들이 모아준 엽서의 숫자이다.

한일강제병합 100년, 광복 65주년이 되던 2010년 9월부터 11월까지 경남도민 엽서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국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의 엽서 쓰기 운동이었다. 이렇게 모은 엽서를 ‘위안부’ 피해자 세 분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직접 전달할 계획이었다. 

두 달 동안 운동을 진행하며 엽서를 한 통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홍보하고 부탁하러 다녔다. 그런데 그때 겪었던 어려움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또 닥치기 시작했다. 바로 엽서의 수신인란에 일본 중의원 200~300여 명의 이름을 써넣는 일이었다. 2만여 통의 엽서를 일일이 가려내고,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골고루 배달되도록 수신인란에 각각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문제는 2만 1000여 통이라는 양이었다. 내용상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엽서들을 걸러내야 했는데, 지나친 분노와 혐오의 표현이 담겨 있거나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된 내용, 심지어 욕을 써놓은 엽서 등을 빼내고도 2만 1000여 장이나 되었다.

이 운동을 추진해 온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두 단체는 형편도 거의 똑같았다. 유급 실무자 한 명 없이 무급 대표 혼자서 회계를 비롯한 모든 실무를 해야 하고, 전화도 받고, 기자회견문도 쓰면서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93세, 89세, 81세의 고령의 피해자 할머니들을 일본에 모시고 갈 준비를 하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많은 양의 엽서를 일본까지 가지고 갈 인력도 필요하던 터라 고민 끝에 젊은 힘을 빌리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창원대학교 학생동아리연합회가 다행히 도움을 주겠다고 하여, 대학생 10여 명이 일주일 정도 수업이 끝난 뒤 모였다. 덕분에 엽서 분류와 일본 의원들의 이름을 써넣는(실은 그려 넣는) 작업을 출국 이틀 전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피해자 세 분을 모시고 출국 기자회견을 했다. 2만 1000여 통의 엽서와 경상남도 내 14개 지역의회의 일본군‘위안부’ 결의문, 이 결의를 촉구한 9000여 명의 서명부와 함께였다.

엽서를 보내 온 시민들의 대부분은 경상남도 내 청소년들이었고, 그 청소년들의 80%는 여학생이었다. 이 엽서를 쓴 청소년들은 이제 20대 후반에서 30대가 되었을 터이고, 13년이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문제 상황이 더 후퇴해버린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11월 25일,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을 모시고 청년 활동가 두 명, 피해자 지원활동가 한 명과 함께 두 단체의 대표는 도쿄의 중의원회관을 찾았다. 이날은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이기도 해서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2010’이 그 전해인 2009년부터 진행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1억 명 서명운동의 결과를 공유·보고하는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바로 그 대회장에 일본의 ‘위안부’ 운동 사회가 잘 모르는(실은 한국 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경남의 낯선 단체가 ‘위안부’피해자와 함께 참석한 것이다. 

이 대회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과 경남의 두 단체까지 모두 4개 단체가 한국에서 참여했고, 일본 측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입법해결을 요구하는 120만인서명실행위원회,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2010, 전시성폭력문제연락협의회가 행사를 주최, 주관했다.

피해생존자는 경남의 세 분과 대구의 한 분(이수산), 서울의 한 분(길원옥), 일본의 한 분(송신도)까지 모두 6명이 참석했는데, 행사의 1부 순서에서 길원옥, 송신도, 이수산 세 분이 피해자 발언을 하셨다. 2부 행사는 일본 국회에 대한 서명 제출과 각 단체들의 활동 보고가 진행됐다. 정대협이 한국의 서명 활동을,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대구의 서명 활동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 경남의 활동을 보고했다. 이 활동 보고와 한일 각 단체의 서명부, 그리고 경남도민들의 탄원 엽서를 일본 관방장관에게 전달했다. 이는 통영의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복득 할머니와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의 송도자 대표가 맡았다. 

이 행사 후에는 일본 중의원회관 정문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참여했는데, 맞은편의 일본 측 반대 집회의 큰 확성기 소리가 혹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피해자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 경남에서 모시고 간 세 분도 모두 일본어를 알아들으셨고, 그중 한 분은 청력을 거의 상실하셨지만 플래카드에 쓰인 글은 읽으셨을 텐데 차마 여쭈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인 11월 26일 오전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을 방문했는데, 할머니들께서 그곳 활동가들의 친절한 응대와 편안한 분위기에 말문이 열리기 시작하셨다. 한국 출발 이후 가장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아쉽게도 이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피해자를 모시고 가면서 어떻게 기록이나 촬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반성과 함께 후회막급이다. 

이날 오후에는 오사카로 갔다. 간사이네트워크 소속 단체 활동가분들의 따뜻한 환대 덕분에 그동안 겪은 어려움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24일 송신도 할머니 생신 잔치에서도, 25일 도쿄 중의원회관에서의 국제서명제출행동 행사 및 집회에서도, 한국이나 일본의 행사 참가자들(국회의원, 단체 활동가 등)에게도 제대로 된 인사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할머니들을 향한 환대와 정성은 긴장하고 위축되어 계시던 할머니들의 기분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간사이네트워크 조직 차원에서는 논의 끝에 할머니들을 공식적으로 모시진 못했지만, 네트워크 소속의 몇 단체와 활동가들이 할머니들의 증언 행사를 정성껏 준비하고 맞이해 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하고 고마운 일이다. 마음을 다해 환영해주고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신경 써주는 모습들이 눈빛에서, 말씨에서, 움직임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2010년 11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대표(가운데)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임정자 님의 증언을 대신 읽고 있다. ⓒ이경희

2010년 11월 26일 일본 오사카의 간사이네트워크 소속 단체 활동가들이 준비한 증언 행사에 참석한 모습 ⓒ이경희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되신 임정자 할머니와 김복득 할머니께서 증언하실 때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오사카 지역 활동가들의 표정은, 할머니의 아픔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음을 알게 했다. “(…) 일본 장교가 지 말 잘 안 듣는다고 이층에서 나를 집어던졌어요. 그때 가슴뼈를 다쳐서 아직도 이렇게 아파요”라는 임정자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흐느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들은 타성에 젖은 내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할머니들과 몇 년 동안 함께 다니며 서로 부대끼느라 피해자들의 그 깊은 고통과 아픔에 무던해진 내가 부끄러웠다.

짐작건대 오사카 증언회는 그동안 절대로 입을 열지 않던, 한 번씩 슬쩍 여쭈어볼라치면 얼굴을 돌려 버리던, “그런 말 묻지 마라” 하시던, 어떤 자리에서도 발표나 증언을 하시 않으시던 할머니의 마음을 열어놓은 게 분명했다. 

 “나도 저래 할 수 있다고. 나도 써 논 것도 있고, 저래 할 수 있다고.” 

이 말씀은 할머니를 오사카로 모시고 간 뒤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상처의 치유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고, 마땅히 사죄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속 깊이 박힌 상처와 수치, 낮은 자존감의 단단한 자물쇠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것이리라. 오사카에서의 일정은 우리 할머니들의 표정을 밝고 당당하게 해주었고, 이동하는 버스에서, 숙소에서 흥겨운 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게 했다.

성의를 다해 할머니들을 모셔주신 오사카의 방청자 선생님을 비롯한 활동가분들의 그 따뜻함은 아직도 가슴 깊숙이 생생히 남아 있다. 이 고마움을 다시 한번 전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2010년 두 달 동안 2만 1000여 통의 탄원 엽서를 보내주신 1만 589명의 경남 청소년들을 떠올린다. 지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청소년 시민들이 주인공들이고 희망이다. 13년이 지난 지금, 마치 일제강점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암울한 이 시대에, 아직도 유급 실무자 한 명도 둘 수 없는 지역 단체가 기댈 언덕은 바로 이런 청소년들이자 시민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앞으로 필요하면 2만 통이 아닌 20만 통도, 200만 통도 청소년들과 시민들은 만들어 낼 것이다.

덧. 사실 피해자들을 모시고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비용의 80%를 경남도에서 지원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경상남도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행사를 공식적으로 지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전해에 치른 지방선거에서 지역 시민단체들이 야권후보 단일화 운동을 전개하여 그동안 보수 일색이던 경남도정 역사상 처음으로 야권 후보가 경남도지사로 당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권 단일화 운동에 앞장섰던 시민단체에서 김두관 도지사에게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정책이 없어 소외되었던 경남도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과 위로의 자리를 요청하여 마련했고, 이 자리에서 경남도일본군위안부역사관건립도 제안하고, 피해자들의 일본 내 증언 활동 지원을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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