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와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헌법재판소 입구 바깥에 위치한 ‘민주주의의 불꽃(Flame of Democracy)’은 시민들에게 “억압과 불의로부터 자유로운 삶”에 대한 권리를 상기시키며 영원한 빛을 밝히고 있다. 2011년 남아공 전 대통령이자 전 세계적 아이콘인 넬슨 만델라에 의해 점화된 불꽃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에 맞선 남아공의 오랜 투쟁을 상징한다. 또한 남아공 내 성평등 증진을 위한 포괄적 기틀을 제공하는 1996년 진보 헌법을 기념하는 의미 역시 지닌다. 하지만 2023년, 쿨루마니 갈렐라(Khulumani Galela) 캠페인에 참여한 여성들은 이 불꽃 바로 옆에서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TRC)의 ‘미완수 과업’에 관심을 촉구하며 법원 앞 야외 취침을 강행했다. 이들이 관심을 끌고자 하는 ‘미완수 과업’에는 남아공에 만연한 성폭력과 젠더 기반 폭력이 포함된다.
남아공에서 “여성과 아동의 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끊임없는 전쟁”은 수많은 충격적 통계 수치들로 드러난다. 남아공 경찰청(SAPS)에 따르면 2023년 1월부터 3월까지 총 10,512명이 강간 피해를 신고했다. 이 수치는 성폭력 경험을 경찰에 신고한 사람들의 수로, 남아공 의학연구위원회(Medical Research Council)는 실제 성폭력 피해자 수는 9배가량 더 높을 것으로 본다. 남아공은 남편, 연인, 전 남편, 전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여성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그 수는 여느 국가의 5배에 달한다. ‘변화를 위한 여성(Women for Change)’의 2022년 통계에서는 남아공에서 총 3,843명의 여성이 살해당했으며, 8시간에 한 명 꼴로 발생하는 여성 사망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파트너에게 살해당한다. 현지 학자인 품라 쿠올라(Pumla Quola)는 자유를 향한 헌신으로 충만한 남아공이 “모든 안전 가능성을 위협하는” 젠더 기반 폭력의 “악몽”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심각한 수준의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수치스러운 일”로 규정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대통령은 남아공에 만연한 “여성과의 전쟁”을 코로나 바이러스에 비교하기도 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강간, 가정 폭력, 아동 살인이 증가했다는 통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남아공이 맞서야 할 두 번째 팬데믹”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남아공의 높은 성폭력 범죄 비율과 ‘강간 문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분석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남아공의 오랜 폭력의 역사, 지속적인 사회적·경제적 배제, 여성의 권리 획득에 대한 반발 등과 연관 지었다. 그러나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지적했듯, 남아공 사회에 자리 잡은 이러한 환경이 “성폭력을 정상화하거나 간과하는 지배적 사회 규범을 기반으로 번성하는”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남아공이 이러한 폭력을 다루는 데 실패해 왔음은 아파르트헤이트 붕괴 후 과거사 해결의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던 그 선구자적 지위에 비추어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1997년 7월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TRC 청문회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성평등위원회(Commission of Gender Equality) 초대 위원장인 덴지웨 음틴소(Thenjiwe Mtinso)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과제는 정의와 인권, 특히 젠더 정의와 젠더 인권 보호를 위한 지속적이고 일관된 투쟁입니다. 이미 대량학살 수준에 도달한 이 무섭도록 심각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을 해결해야 합니다.” 2023년인 현재에도 이러한 폭력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적 접근이 필요하다.
남아공에서의 젠더와 변화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두 인종, 젠더, 계급, 성적 지향, 문화 측면에서의 소외와 예속을 기반으로 한다. 이에 대응해, 1994년 수립된 새로운 민주정부는 남아공의 학대적인 과거를 뒷받침해 온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남아공의 새로운 사회 기틀을 이루는 1996년 헌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국가는 인종, 젠더, 성별, 임신, 혼인 여부, 민족 또는 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 지향, 나이, 장애, 종교, 양심, 신념, 문화, 언어, 출생 중 어느 하나 이상의 이유로 특정 개인을 직간접적으로 부당하게 차별해서는 아니 된다.”
헌법 외에도 1998년 제정되어 2022년 개정된 가정폭력, 성범죄 및 관련 문제법 등 젠더 기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법과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남아공의 성과 중 하나는 집권당인 아프리카국민회의(ANC)의 자체 할당제를 통한 공직에서의 여성 대표성 달성이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부 시절에는 국회의원 중 (백인) 여성 비율이 3%에 불과했지만, 1994년 첫 민주 선거 이후 여성 의원 수가 10배로 증가했다. 2009년에는 여성이 전체 의석 수의 44%를 차지하여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여성 의원 비율을 기록했다. 한편, 2000년 이후 높은 성폭력 발생률에 대응해 성폭력 생존자 지원 개선을 위한 ‘투투젤라 케어센터(Thuthuzela Care Centres)’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센터 중 일부는 의료 및 법률 서비스뿐 아니라 심리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원스톱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렇듯 젠더 권리 보장을 위한 새로운 기틀이 구축되는 가운데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폭력과 불평등이 급증하는 상황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젠더 감수성을 반영한 법률과 헌법적 기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은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다. 2022년 기준으로 남아공 여성의 41% 이상이 실직 상태이며, 아프리카 여성의 71%가 빈곤선 아래의 생활환경에 놓여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30%에 달하는 임금 격차를 경험하고 있다. 아만다 가우스(Amanda Gouws)가 지적했듯 경찰과 법원이 일관되게 법을 시행하고 집행하지 않는다면 법은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재원 부족, 부실 교육, 불충분한 감수성 교육도 현재 구축된 인프라의 가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품라 쿠올라는 “강간 생존자들은 1994년 이후의 사법 체계가 정의를 실현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꿈과 희망은 1994년 이후 몇 번이고 배신당해야 했다”라고 말한다.
헌법 질서가 위배되고 있다는 인식과 함께 분노가 확산되자, 2020년에 〈젠더 기반 폭력 및 여성 살해에 대한 국가 전략 계획(National Strategic Plan for Gender Based Violence and Femicide; NSP-GBVF)〉이 마련된다. ‘#완전한 중단(#TotalShutDown)’ 운동을 통한 이행 압박 아래, NSP는 젠더 기반 폭력의 방지와 가해자 처벌을 포함해 여러 영역에 대한 정부 개입을 약속한다. NSP는 용납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한 폭력에 대한 항의가 고조된 가운데 출범했다. 그러나 피나 코디상(Phinah Kodisang)이 지적했듯, 이 계획은 남아공의 권력자들이 “젠더 기반 폭력에 양분을 공급하는 가부장적 규범에 맞서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준비”를 갖추는 것을 포함, 여러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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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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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교(UCT)의 정의와 변화 프로그램(ustice and Transformation Programme) 의장. 이행기 정의 관련 실무자이자 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행기 정의, 젠더, 평화 구축에 관한 광범위한 저서를 출간했다. 최근 저서로 젤케 보에스텐(Jelke Boesten)과 공저한 『Gender, Transitional Justice and Memorial Arts: Global Perspectives on Commemoration and Mobilization (젠더, 이행기 정의, 기림 예술: 기림과 동원에 관한 세계적 관점)』(런던: Routledge, 202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