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이로 인해 총 3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한국인은 7만여 명에 달한다. 원폭 피해는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내려오기에, 현재 피해자들은 4세대에 걸쳐 후유증을 앓고 있다. 1996년 경남 합천에는 이들을 위한 지원시설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마련되었고, 합천 곳곳에는 지금도 피해자들이 퍼져 살고 있다. 합천의 또 다른 이름이 ‘제2의 히로시마’인 이유다. 이처럼 이 문제는 현재 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2017년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핵무기에 대한 보도가 쏟아질 때도 그 무기로 인해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실제로 원폭 피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사진작가 김효연은 원폭 피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의문을 갖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전한 말(“전쟁이 나면 비행기는 타지 말고 무조건 기차를 타고 와라. 서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몸만 와야 해.”) 때문이었고, 어머니가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갖게 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이자 작가의 할머니가 겪은 역사가 있었다.
“할머니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자라셨어요. 한의원 집 딸이었던 할머니는 일본으로 징용 간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죠. 18살에 임신해 부산으로 피난 오기 전까지 한국말을 거의 못 하셨어요. 전쟁 막바지에 치달을 때쯤 히로시마 외곽지역이 계속 피격당하니 불안해진 두 분은 밀선을 타고 할아버지의 고향인 부산으로 넘어오셨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아이는 사산됐다고 해요. 그리고 부산에서 갖게 된 두 번째 아이는 유산되었죠. 그러니 한국에 와서 얼마나 많이 아프셨겠어요. 할머니의 부모님 두 분 모두 원폭으로 돌아가시고, 작은오빠만 유일하게 살아남으셨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이동이 자유로워졌을 때 할머니에게 히로시마행을 권유했지만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셨대요. 그곳에 가면 상실을 마주해야 했으니까요. 행복했던 때를 기억에 남겨두겠다고 하셨죠.”
개인의 역사는 곧 가족의 역사이자 한 국가의 역사다. 김효연 작가는 자신의 가족으로 인해 갖게 된 ‘의문’에서 그치지 않고 작업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물론 그 길로 가기까지 쉽지 않았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때때로 엄습하는 두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된 작업은 〈감각이상〉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Q. 〈감각이상〉은 외할머님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작업이지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은 나중에 형성된 맥락이에요. 실제로 작업을 결심하게 된 건 합천에 내려간 후이고, 이 문제에 의문 갖기 시작한 건 2017년 가을입니다. 북한에서 실시한 6차 핵실험 때문에 관련 기사가 끊임없이 나올 때였죠. 뉴스만 보면 3차 전쟁이 발발할 분위기였어요. 저희 부모님은 부산에 계시는데 그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어요. 전쟁이 나면 비행기는 절대 타면 안 되고, 무조건 기차를 타고 모든 걸 버린 채 몸만 와야 한다며 강경하게 말씀하셨죠. 저희 어머니가 평소에 밝은 성격이시라 그 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어요.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느껴졌죠. 북한 핵실험 뉴스와 어머니의 말이 교차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의문을 갖게 됐어요.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이 그렇게 많았다는데 왜 뉴스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을까. 그래서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해 책을 뒤져가며 한두 달 정도 원폭 피해를 조사했어요. 그러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발견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생각의 가지를 넓혀갔습니다.
그리고 2017년 말, 복지회관에 직접 가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때서야 할머니가 강하게 작용했죠.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저기에도 많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경험의 부재 때문에 무섭기도 했습니다. 내가 운동가도 아닌데 그곳에 가서 무얼 할까,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지만 결국엔 갔어요. 2018년에 카메라 하나 메고 내려갔는데 그게 작업의 시작이 됐습니다. 실제로 가보니 서울에서의 자료조사는 평면적인 것에 불과했고, 제가 다룰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복지회관 내에 일반인 출입 금지인 수장고가 있는데 사무장님께서 그곳을 보여주셨어요. 원폭 피해자들의 신상 자료와 그들이 원폭 당시 겪었던 것을 일부 서술한 기록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자료가 5001개에 달했어요. 그것을 마주했을 때 엄청난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지인들과 상의를 했지만, 이런 작업을 하게 되면 소위 말해 ‘인이 박힌다’며 걱정했어요. 앞으로 피해자에 대해서만 다뤄야 하고, 원치 않더라도 앞에 나서야 할 수도 있는데 감당할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는 영웅적인 역할을 바라지도, 할 능력도 안 됐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 달 정도 고민하다 합천에 다시 내려갔고, 그때 작업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Q. 할머님의 개인사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민족으로서 갖는 의미가 다를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기에 그 의미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시는지요.
2018년 여름, 배를 타고 히로시마에 가면서 ‘이 길을 할머니가 봤고, 70년이 지난 뒤 내가 보고 있구나. 언젠가 내 자식도 보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대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몸소 배웠죠. 개인적으로 봤을 때 할머니의 역사는 참 슬퍼요. 시대의 거대한 흐름 때문에 원치 않는 긴 여정을 거쳐야 했고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오셨죠. 그것이 개인으로서 갖는 의미라면, 한 민족으로 봤을 땐 역사적으로 희생당한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죽음과 가난, 고생을 견뎌야 했고 본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채 돌아가셔야 했으니까요.
Q. 작업하는 과정에서 할머님이 많이 떠오르셨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나요.
할머니는 작고 인자하셨어요. 저를 따로 불러 사탕을 쥐여 주거나 일본 노래를 부르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집안을 다니셨죠. 저희 엄마가 고등학생 때 할머니가 계단에서 떨어지셨다고 해요. 그때의 충격으로 실명되셨는데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으셨어요. 제 도록에 실려 있는 짧은 소설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찍이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은 눈이 멀고 만다. 할머니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종종 눈을 떴다.” 장혜령 작가님에게 제 이야기와 그동안 수집한 원폭 피해 자료를 종합해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드렸거든요.
Q. 할머님과 함께한 추억이 많으신가요?
초등학교~중학교 때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이들 사진에서, 특히 비행기를 들고 있는 여자아이의 사진에서 애틋함이 묻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그 나이 때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기 때문이에요. 할머니 집에 가면 늘 손을 잡고 놀았어요. 밥을 먹을 때도 할머니가 항상 제 손을 잡고 계셨고요. 10살쯤의 기억이 많아서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어릴 때의 저를 만난 것 같아요.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때 당시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작업할 때 자신을 투영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저에게는 그런 존재였던 것 같아요.
Q. 작가님이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하고 도록에도 실어주신 말(“그럼 우리는 유령이야? 우리가 있는데 아무도 모르잖아.”)을 한 아이가 그 여자아이인가요?
맞아요. 그때 그 순간은 저에게도 영화 스틸컷처럼 남아있는 순간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순간적으로 모든 게 멈춘 느낌이었죠. 아이는 그 말을 하고 뛰어갔는데 저는 멍하니 생각했어요. ‘맞아, 내가 이 작업을 해오면서 하지 못했던 말이 그거였어. 이 사람들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유령이구나.’
Q.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나요?
아니요. 저는 아이들과 촬영할 때마다 이유를 설명해줘요. 그때도 촬영하면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합천에서 나고 자랐고, 어머니도 원폭 피해자 2세대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원폭 피해자인 줄 알고 있었어요. 본인들이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서울의 언니 오빠들은 이 문제를 잘 몰라. 그래서 이모가 알리려고 사진 찍는 거야”라고 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럼 우린 유령이야? 왜 우리가 있는데 다 몰라?” 그 말을 듣고 얻어맞은 느낌이었죠. ‘그렇네. 유령 같은 사람들이었네. 여전히 문제가 많은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구나.’ 그래서 그때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악몽도 꿨고요. 할머니들과 사진 찍을 때도 전쟁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러다 보니 전쟁 한복판에 있는 꿈을 꿨어요.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죠. 그래서 내가 과연 이 작업을 끝낼 수 있을까,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버팀목이 됐습니다.
Q. 작업 제목이 ‘감각이상’입니다. 말 그대로 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뜻할 텐데, 제목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목을 정하는 게 어려워서 이런저런 단어를 찾아보다가 어느 날 ‘감각이상’을 검색해보게 됐어요. 의료대백과사전에 나오는 단어인데 그 뜻을 들여다보면 경험이 베이스가 돼요. 어떤 사람의 경험에 과도하게 자극이나 결핍이 생기면 정상적이지 않은 걸 정상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있는 걸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죠. 말 그대로 감각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그게 지금의 상황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경험이 베이스가 된다는 것도 좋았고요. 제가 합천에서 본 모든 이들이 겪었던 그 일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흘러온 것과 70여 년이 흐른 뒤 가족의 기억만을 품고 그곳에 던져진 제가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했던 변화가 감각이상이라는 단어와 딱 맞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들과 제가 서로를 만나 변했고, 제 작품을 만난 누군가도 변화를 경험하겠죠. 그래서 ‘경험’과 ‘변화’라는 두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고 감각이상을 제목으로 선택하게 됐습니다.
Q. 작업하며 거리감을 조정하는 게 어렵다고도 하셨습니다. 작업 초기에는 사진에 분노가 담겼지만 뒤로 갈수록 피해자분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변화했다고요.
제가 원폭 피해자의 후손은 아니지만 완전히 외부자가 아니었던 건 원폭으로 가족을 잃은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에요. 처음엔 너무 가까이 들어가다 보니 사진에 아픔이 짙게 묻어났고, 거기서 달아나기 위해 멀리서 찍으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죠. 멀리 떨어진 채 관찰만 해서는 이 문제의 복잡함과 피해자들의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담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거리감을 조정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100% 체감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관람자들이 이 문제에 다가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숨 쉴 수 있는 틈이 필요했던 거죠. 너무 아프게만 다루면 들여다보지도 않고 도망가버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강력한 자극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궁금증을 갖고, 생각하게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제 작업이 관람자와 피해자 사이의 부드러운 통로가 되는 거죠. 그 통로로 걸어 들어와 스스로 공부하다 보면 1초라도 더 기억하고, 한마디라도 더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이 문제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분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보냈던 시간이 작가님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나요.
그분들과 가까워지는 데 6개월 정도 걸렸어요. 제가 히로시마에 갔다 온 후에야 마음을 열어주셨죠. 그러고 나서 다운증후군인 피해자 2세대분을 찍게 됐습니다. 처음으로 1세대 분들의 가족을 소개받고, 복지회관 2층(피해자 생활 공간)에도 올라가고, 시설에 입소하지 못해 합천에 퍼져 사는 분들의 주소를 받아 복지회관 외부로도 나가게 됐어요. 촬영을 하지 않더라도 같이 밥 먹는 사이가 되고, 2019년 이후에는 3~4세대 아이들까지 찍게 됐죠.
이 작업을 하면서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집 앞 개울가에 누군가가 종이배를 띄워서 가봤더니 종이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시커멓고 커다란 바다 앞에 혼자 서있는 기분이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 바다를 편하게 걸어 다니는 느낌이에요. 작업을 시작할 때의 감정과 작업에 완전히 흡수됐을 때의 감정, 그리고 어느 정도 마무리한 후 드는 감정이 다 달라요. 미래에 어떻게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장하다고 생각할 것 같기는 해요. 고무적인 것이 있다면, 장혜령 작가님이 원폭 피해를 주제로 다음 장편소설을 쓴다고 하셨어요. 이 문제가 이렇게 다른 분들에 의해 전해지다 보면 제가 닿지 못했던 곳으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피해자분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Q. 피해자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나누셨을 텐데, 그중에서 작가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성분들의 말이 참 아프고 마음에 남아요. 피폭 증상 중 여성분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게 유산이에요. 할머니 중 한 분이 연달아 세 번 유산과 사산을 경험하셨는데, 사산한 채로 나온 마지막 아이가 파란색이었다는 거예요. 푸른색이었던 건 배 안에서 호흡이 부족해서 그랬겠죠. 그런데 원자폭탄이 플루토늄이라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은 폭발하기 직전에 푸른빛을 내요. 할머니는 모르고 하신 말씀이었지만 플루토늄의 ‘푸른색’과 할머니의 “애를 낳았는데 애가 퍼렇더라”라는 말이 참 아프게 와닿았어요. 이외에도 차마 풀어낼 수 없는 잔인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 많아요.
Q. 사진을 다루기 전에는 영화 현장에서 일하셨다고요. 영상 작업을 하다가 사진으로 활용 매체를 바꾸게 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영화를 그만두고 개인 작업을 시작했어요. 상업영화판에 있을 때 미술팀장으로 있었는데, 그때 제 취미가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200컷으로 쪼개는 것이었죠. 화면을 캡처해 각 프레임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주인공의 표정, 조명과 소품 등을 분석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것을 떠올리다 보니 정지된 프레임 안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사진으로 넘어왔죠. 그런데 공부하면 할수록 사진과 영화는 다른 매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시간성이 완전히 다르거든요. 영화는 앞뒤로 서로 연결되는 반면, 사진은 시간이 멈춰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앞뒤 상황을 상상하게 만들어야 했어요.
Q. 영화와 비교해 사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 재미는 무엇이었나요?
한 장면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제 작업이 사진과 잘 맞는 것 같아요. 관람자가 제 사진을 보고 모든 걸 알지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원폭 피해라는 문제가 워낙 거대하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얽혀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정리되기 힘들어요. 그래서 사진을 보고 각자의 안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문제를 정립해보길 바랐습니다.
Q. 원폭 피해는 현재 진행 중이지만, 대부분 이 문제를 모른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정부가, 또 개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개인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노력하겠어요. 우선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교육과 조사, 연구가 동시에 진행돼야 해요. 기본적인 것이 이뤄져야 시민들이 정보를 접하고, 그러면서 궁금증과 관심을 가질 수 있겠죠.
Q. 원폭 피해자분들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와 지원이 있어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또한 한국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합천과 히로시마를 오가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을까요.
피해자들이 일본 내에서 치료를 받거나 무료 변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제가 히로시마에서 피해자분들을 만날 때도 평화단체를 통해 도움을 받았고요. 흥미로웠던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평화단체라고 하면 통일 단체를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원폭과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히로시마 내 원폭 피해자 집단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조선인협회와 남한협회로 갈라져 전혀 소통하지 않고 있었어요. 이건 원폭 피해와는 다른 문제지만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이었습니다. 참 많은 것이 얽혀있는 문제라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Q.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삶’, ‘피해자의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작가님께서도 작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셨겠죠. 이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품을 통해 다 했습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 작품이 저 없이도 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에 의해, 혹은 다른 형태를 빌리더라도 이 이야기가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는 절대로 반복되어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해요.
Q. 4세대 아이들을 앞으로도 추적 촬영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이외에 품고 계신 다른 계획도 궁금합니다.
아이들의 어머니들과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추적 촬영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꾸준히 안부를 묻고 내려가서 사진을 찍는 거죠. 시간이 쌓이면 결과로 나타날 겁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전쟁과 기후위기로 인한 멸종에 맞서는 인간의 행위와 의지에 대해 작업하고 있어요. 노르웨이, 미국, 한국 등 3개국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며 영상, 사진 작업을 하고 있고, 올해 9월에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신작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Credit
인터뷰어/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인터뷰이: 김효연
사진: 오늘의 나
일시: 2023년 4월 6일 목요일
장소: 카페 무대륙(서울 마포구 토정로5길 12)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 글쓴이 김효연
-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대의 대부분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고 공부하며 보냈다. 현재는 잊혀지거나 감추어진 사건, 장소가 개인과 집단의 삶에 가져오는 변화에 관심을 두고 사진과 영상매체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그 세대를 추적한 작업으로 제12회 상상마당 KT&G SKOPF 올해의 최종작가(2019)로 선정되었다.
- 글쓴이 퍼플레이 강푸름
-
퍼플레이컴퍼니는 여성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퍼플레이’(https://purplay.co.kr)를 운영하고 있는 사회적기업으로, 문화 콘텐츠를 통한 성평등 가치 확산이라는 미션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