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전범 진술서를 읽으며 드는 단상(斷想)들

이선이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게시일2022.11.25
  • 최종수정일2023.08.21

일본군‘위안부’ 중국 피해자와의 만남

자주 뜨거운 감자가 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중국인 피해자를 처음 접했던 것은 딩링이라는 중국 작가가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 소설은 중국문학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휴양을 위해 마을에 온 ‘나’가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중국공산당 스파이로 활동하다 병이 들어 돌아온 주인공 ‘전전’과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형태로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피해 여성 전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조차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전전의 고통을 이해는 못 하지만 공감한다. 때때로 피해자의 피해를 전유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듯이. 이 소설이 쓰인 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의 언어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다면 당시 전전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자리에서 사유하는 것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딩링이 전전을 그린 후 50여 년이 지나 현실 속 중국의 전전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강하게 울린 이에 허우둥어라는 피해자가 있다. 그는 마을 촌장이 일본군에게 제공한 여성이었다. 폭력이 행사되는 장에서조차 자신보다 약한 이를 위한 희생을 감내했다고 다른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의 폭력 희생자였다는 이유로 2차, 3차 피해를 겪어내야만 했던 여성이다. 허우둥어의 피해가 과연 ‘위안부’ 피해인가라는 논의가 전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연속선에서 본다면 그 차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전장이 된 중국으로 군대와 함께 조선과 일본의 일본군‘위안부’들이 끌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은 중국의 여성들을 강간하고, 강간센터(위안소)에서 지속적으로 폭력을 자행했다. 강간과 강간센터, 위안소 사이에는 실질적인 간극이 놓여있지만, 일본군이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을 ‘전투의 보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폭력의 연쇄 사슬 끝 실행자 일본군 전범
 

피해자 구술 자료가 말하는 폭력의 참상을 읽어 가다 보면 그 끔찍함으로 인해 가해자인 일본군에 생각이 미친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떻게 전쟁터로 왔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토록 잔인한 일이 가능했을까?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여 『악한 사람들(Evil Men)』(제임스 도즈 지음,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20)을 저술한 제임스 도즈는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인 동시에 평범하고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며 우리는 “자유롭고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역설은 전장에서 행해진 일본군의 폭력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 같다. ‘악은 사악하고 무언가 다른 것’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무엇으로 나와 우리의 외부에 둘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이 특정한 ‘환경’과 만나면 (남성) 누구나 일본군 전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이 불편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가해자 일본군을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에서 ‘난징의 강간’을 필두로 일본군의 강간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중국의 푸순과 타이위안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190명 중 842명의 자필진술서를 묶어 2015년과 2017년에 출간된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의 자필진술서 선편(中國欓案館藏 日本侵華戰犯筆供選編)』(이하 『선편』)이 있다. 이 자료집의 중문 요지를 분석한 이코 도시야에 따르면 위안소 관련 진술을 한 전범은 23명이다. 그 외 강간 관련 진술을 한 사람은 모두 591명이며, 강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자는 251명에 그친다. 전체 수록 전범 842명 중 65%가 강간 관련 진술을 한 것이다. 일본군의 압도적 다수가 범했거나 목격한 강간보다 ‘위안부’에 대한 폭력이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맥락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봄, 2018)에서 “전시에 강간 이야기는 이용 가치가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이상 여성의 말을 믿어주거나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을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주제로 간주할 정치적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강간은 적을 악마화하여 ‘전쟁에 뛰어들 감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것이 여성에 대한 강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피해자 여성의 자리에서 전장의 강간을 문제 삼는 일은 그다지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때로 그런 시도는 위험시되기도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자주 뜨거워진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여성만 겪는 특수한 비극’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되어 앞으로 나가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개조’와 ‘세뇌’ 사이에서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


『선편』에 실린 전범 자필 진술서는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1000여 명의 전범들에게 행한 ‘학습’과 ‘인죄탄백(認罪坦白,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다)’ 운동 과정에서 작성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자필 진술서를 토대로 특별군사법정을 마련하여 1956년 전범재판을 진행했다. 랴오닝성 선양과 타이위안에서 열린 특별군사법정의 기소자는 45명이었다. 나머지는 즉각 석방되어 귀국했다. 운동 과정에서 나온 진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또 하나의 과제이다. 진술서 작성 과정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전후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의 전범들은 버젓이 살아남아 전후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 인물들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쇼와 일왕을 들 수 있고 지금도 일본의 천황제는 사회 구성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근저에서 묻지 않는 것이 일본 사회의 주요 흐름인데,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의 군사 법정에서 불기소된 자들은 곧바로, 기소된 자들도 형기를 다 마치지 않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전원 귀국했다. 귀국한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중귀련 멤버들은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일을 통하여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왔다.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이들과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그들이 중국에서 세뇌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중국의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어 ‘생각’을 하게 되는 일본군 전범들 ⓒ백정미

 

중국 정부는 학습을 통한 사상 개조라고 말한다. ‘세뇌’와 ‘개조’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중귀련 증언자들은 전범관리소 수감 이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를 떠올리게 하여 인상적이다. 전범 관리소에서 레닌의 『제국주의론』,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 노로 에이타로의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등을 읽었다고 한다. 문맹의 전범에게 동료 수감자가 글자를 가르쳐주고, 어려운 책은 대학 출신 동료가 가르쳐주었다. 이에 대해 중귀련의 멤버 다카하시 데쓰로는 “우리는 전범이 되어서 처음 인간다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책을 읽고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나바 이사오는 중귀련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귀국 후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그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죽였는지 점점 더 알게 되었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했어요. 진짜 악마였다는 걸”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배우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번역, 한길사, 2006)에서 아이히만이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군 전범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군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상당히 컸고 그럴수록 잔인해졌다. 다케우치 유타카는 군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성병으로 인한 전력 상실을 막기 위해서 부임지마다 위안소 설치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단지 군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전범관리소에 들어온 이후에야 생각이 미쳤다고 말한다. 나카이 큐지는 1897년 생으로 메이지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쿄지방재판소 등에서 민·형사 사건 판사로 있다가 만주국의 진저우 등지 지방법원에서 재판관으로 있었다. 그는 만주국의 사법관료였기 때문에 죄목이 살인, 약탈, 학살, 강간 같은 ‘전쟁범죄’가 아니라 법관으로서의 직무 수행이었다. 그는 법관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법부 업무를 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전쟁과 식민지배(=괴뢰국)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데 그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카이는 만주국 법관으로서 했던 일들에 대해 자필 진술서에서 범죄행위로 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범죄라고 여겼을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의 행위는 타인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의 순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파급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우리가 행위를 선택하면서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안의 악화에 어느 정도의 브레이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위태롭다고 한 공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 세계의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중국의 사상개조가 ‘강력한 심리적 강압체계’였던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중압감으로 자살에 이른 전범도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 행위를 보다 확장된 관계 속에서 생각하도록 해 자신의 일들이 누군가에 대한 ‘범죄’였음을 인정시킨 운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이선이 필자가 편역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세창출판사)를 2022년 12월 중 발간 예정입니다. 
글쓴이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논문으로 「중일전쟁시기 딩링(丁玲)의 일본군 성폭력재현과 1956년 전범재판 그리고 피해자 증언의 의미」, 「일본군의 성폭력에 대한 일고찰: 중국산서성피해자의 구술을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딩링: 중국 여성주의의 여정』,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역서)『일본군 중국 침략 도감 : 일본군 ‘위안부’와 성폭력』(역서) 등이 있다. 

sunyi36@hanmail.net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