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군사주의(militarism) 연구로 유명한 신시아 인로(Cynthia Enloe)가 1983년, 『카키색이 너에게 어울릴까?(Does Khaki Become You?)』라는 기념비 같은 저작을 통해서 여성의 삶이 군사주의와 서로 양립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 학문 영역에 비해서 국제정치학 분야에 있어서 젠더의 수용은 ‘많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遲刻)’은 국제정치학이 갖는 학문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은 이론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을 국가와 국제정치체제에 두는 경우가 많다. 즉, 국제정치학의 주요 이슈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국제정치체제 유지다. 또한 국제정치학은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 확보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가 안보와 세계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제기구나 국제법을 활용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정향이 있는 반면에, 군사력 확보 및 동맹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입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제정치체제를 분석의 대상으로 하는 것에는 큰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분석 방법으로서 젠더 수용이 늦어졌다는 점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국가와 국제정치체제에 초점을 맞추는 학문적 속성상 젠더 또는 여성(개인)의 수용을 꺼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냉전체제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 확보와 그것을 매개로 하는 권력(power) 행사에 학문적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젠더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로의 군사주의 비판은 시대를 앞선 혜안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실제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시작은 냉전 해체라는 국제정치체제의 변화에 따라 등장한 1990년대 초반의 후기구조주의 접근을 수용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국제정치학이 젠더를 분석의 도구로 수용하게 된 것은 국제정치학자들의 다양한 또는 대안적 방법론 모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해체에 따른 국제정치 현실의 변화는 국제정치학에서의 전통적 접근 방법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제정치학에서는 비판이론, 탈식민주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론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젠더 또는 페미니즘으로 국제정치학을 분석하는 방법도 나타났다.
1992년 안 티커너(J. Ann Tickner)의 『여성과 국제정치 : 국제안보 달성을 위한 페미니즘 관점(Gender in International Relations: Feminist Perspectives on Achieving International Security)』(한국어판: 안 티커너 지음, 황영주 외 옮김,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1)은 국제정치에서 젠더를 수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저작물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티커너는 국제정치학의 전통적 주제인 안보를 각각 국가안보, 환경안보, 경제안보로 세분한 다음, 안보와 관련된 전통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어 이 전통적 관점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해체한 이후, 젠더를 수용하여 ‘달리 보이는’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크게 두 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세대는 국제정치학이 갖는 전통적 방법론, 인식론, 존재론에 도전하는 비판적 입장을 갖는 접근이다. 이들의 노력은 90년대 초반의 후기구조주의의 학문적 세례와 함께 진행되었다. 티커너 이외에도 국제관계를 ‘관계의 국제화’로 재정의를 요구하는 크리스틴 실베스터(Christine Sylvester)의 『페미니즘 국제관계이론: 끝나지 않은 여정 (Feminist International Relations: An Unfinished Journey)』(2001)이 제1세대의 대표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세대는 1세대의 이론적 재구성에 힘입어 그것을 국제정치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응용해 나가는 경향이다. 제1세대가 국제정치의 방법론, 인식론, 존재론에 대항하는 방법론적 다양성을 모색했다고 한다면, 2세대는 이미 확보된 방법론적 다양성을 실제 국제정치에 적용하는 노력에 집중한 세대이다. 그 대표적인 접근으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저작은 한국인 2세인 캐서린 문(Katherine H. S. Moon)의 『동맹 속의 섹스: 한미관계에서 군사 매매춘 (Sex Among Allies Military Prostitution in U.S.-Korea Relations)』(1997년)(한국어판: 캐서린 H.S.문 지음, 이정주 옮김, 삼인, 2002)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대 구분 이외에도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일반 국제정치학 이론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국제정치(학)에서 여성의 존재 확인(경험), 남성의 경험을 추상화하는 국제정치(학) 비판(비판), 여성의 경험이 투영된 바람직한 국제정치(학) 만들기(규범) 등으로 그 특징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으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여성의 경험을 국제정치학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국제정치(학)에서 여성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은 행위자로서의 여성에 관한 관심일 뿐만 아니라, 극히 젠더화된 국제정치에서 여성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기존의 국제정치(학)가 갖는 기본적 가설 들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서 여성의 경험과 활동을 확인하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making the invisible visible)’노력인 것이다. 이는 인로의 공헌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다양한 저작물에서 신흥공업국의 경제발전에서 어린 여공들의 헌신, 외교 관계에서 외교관 부인의 가사노동과 공헌, 매매춘 여성들의 외화벌이와 국가 경제와의 상관성 등 국제정치에서 여성의 존재에 주목했다.
두 번째 특징으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기존의 국제정치학에 대한 매우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주로 국제정치학이 남성의 경험만을 추상화한다는 비판은 제1세대에서 제기되었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비판적 특징은 국제정치와 그 이론이 남성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여성을 포함하는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 국가의 권력 추구행위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볼 때는 ‘지배적인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의 이념형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가설 중 하나인 ‘국내-질서/국외-무질서’는 젠더의 사회적 구성과 극히 유사한 것이 된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를 국내-질서-남성성/국외-무질서-여성성이라는 이원적 대립구조로 병치하여, 국제정치이론 자체가 젠더화된 속성을 갖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세 번째 특징으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자들은 대개 규범적 입장을 갖는다. 부분적이며 왜곡된 남성의 경험으로 형성된 국제정치(학)는 여성의 경험과 인식을 통해서 개선시켜 나가야만 한다. 권력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지배적 남성성을 가진 남성과) 다른 경험은 현재의 무질서한 국제정치 현실을 바로 잡는 데 적절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국제정치를 국가 권력 추구 및 안보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 국제정치에서 인간의 보편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으로 그 관심을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티커너의 저서에서, 안보(security)는 국가의 안전(safety of state)이라는 제한된 정의(definition)에서 벗어나 젠더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제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펼쳐진다.
이렇듯,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자들의 노력은 그 이론에서 다양한 성취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도약 중 하나는 군사주의 비판과 페미니즘 평화이론이라고 할 것이다. 인로가 보여준 관심과 같이, 군사주의와 여성의 삶과의 길항관계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학)의 궁극적 가치인 국가 안보 쟁취를 위한 군사력 의존은 군사주의의 재생산과 함께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만다.
“국가 안보와 결합한 군사주의는 외부 적과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국민 보호를 핑계 삼아, 남성 우위의 기존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유지·강화하는데 핵심적 기제로 작동한다.”[1]
제2세대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소개한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는 1970년대 미군 군사기지촌 인근의 ‘양공주’로 명명되는 여성들의 육체가 어떤 방식으로 국가 안보를 위하여 ‘이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를 담고 있다. 미군 철수에 대응하기 위하여 매매춘 여성에게 ‘깨끗한 성(clean sex)’을 강제하고 그를 통해서 국가 안보를 구현하고자 하는 1970년대 국가의 군사주의적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폭력적 국가의 속성을 확인하게 되지만,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에서 보면 여성의 몸으로 체현(體現)되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국제관계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수용은 어떨까? 한국의 활발한 페미니즘 운동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국제정치학 분야는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되고 있는 강한 가부장제를 가장 큰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더군다나 국제정치학 분야는 국가 권력 및 안보를 다루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관여를 극도로 저어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도 남북한의 대치 상황은 국제정치이론에서 현실주의 관점이 우선시되어 페미니즘적 시도를 ‘순진한’ 것으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제정치학을 다루는 대표적인 학자들이 특정 국가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페미니즘적 접근을 대단히 낯설어했을 가능성도 높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그동안의 국제정치에서 다루지 못한 영역에 혜안을 제공할 수 있다. 전통 국제정치이론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양국의 외교 갈등의 원인으로만 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의 시각을 채용한다면 ‘위안부’와 관련되는 한일 양국 간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다른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국가의 외교 문제로 그 관심을 두는 대신에, 각 국가 내부의 젠더 구조와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양국 간의 갈등 구조를 완화 또는 격화시키는지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여전히 낯선 학문적 여정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 국제정치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면서 국제정치학의 젠더화된 측면을 비판하고, 무엇보다도 폭력을 종식하고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각주
- ^ 황영주(2021), 앞의 책,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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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황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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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외국어대학교 외교전공 교수. 젠더(국제)정치, 정체성의 정치, 시각의 정치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