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맥락에서 평화를 ‘여성’이라는 열쇠 말로 읽어낼 때 크게 두 관점이 교차된다. 하나는 평화 구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를 강조하는 현실적 입장과 다른 하나는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평화적 상태는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며 여성주의적 평화 담론에 천착하려는 시각이다. 예컨대 한반도 평화와 여성의 ‘역할’을 질문할 경우에는 안보 의제나 평화 구축 과정이 남성 행위자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여성 참여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 도출하고자 한다. 반면에 여성주의적 평화를 강조할 경우에는 한반도의 반평화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가부장성과 위계 서열 등을 문제시하면서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평화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밝혀내는 것에 논의의 무게 중심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두 관점을 굳이 구분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여성의 참여와 여성주의적 평화 구성이라는 두 축이 단계적이 아닌 동시적으로 상호 연관성의 맥락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녹록하지 않은 한반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평화 구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 증진을 강조해 온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과연 여성주의적 평화를 탐색하는 데도 비등하게 역량을 모아 왔는지 성찰적으로 반성해보자는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두터운 담론과 토론이 부재한 까닭에 여성 참여를 넘어서는 여성 평화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져보자는 뜻이다.
먼저 두 입장의 차이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선 여성 참여를 강조하는 입장은 반평화 상태에서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는 여성이 평화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식민과 전쟁, 거기에 이어진 분단체제까지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인 한반도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을 역사화하고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와 구호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지하듯 2000년에 발표된 유엔 안보리의 ‘여성, 평화와 안보를 위한 결의안 1325호’가 이러한 시각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유엔 1325호 결의안은 예방, 보호, 참여, 구호와 재건 등 네 가지 핵심 영역 아래 전쟁이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여성 인권 침해는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평화 구축 및 재건의 모든 과정에서 성인지 주류화를 강조한다. 또한 평화와 안보 의제에서 여성의 참여를 강조하고,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향상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최근 결의안에서는 ‘전쟁’을 군사적 분쟁으로만 협소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나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극단주의와 테러리즘과 같은 ‘전쟁과 같은’ 상황으로 확장한다. 안보 문제는 이제는 국가 수준에서 발생하는 국가 간의 전쟁에서 지구적 수준의 위기와 일상의 폭력 등과 결합하여 더욱 복잡하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에 평화도 국가 중심의 전통 안보 영역 밖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문제에 적극 조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유엔 1325호 결의안과 이후 후속 결의안은 안보 문제의 영역이 복잡해지고 있음을 문제시하면서 여성이 마주하고 있는 다층적 현실을 성주류화를 통해 타개하여 평화에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국제적 조류에 따라 한국 여성계는 한반도 안보와 평화 의제에서 지속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요구해왔다. 남북 대화가 본격화되었던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남북 여성 사이의 대화가 이뤄졌으며 이를 통해 정전체제 내에서 남북 여성이 경험하는 불평등이나 가부장성을 문제시하고자 했다. 특히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다른 아시아 피해여성과 함께 북한 여성과의 대화와 연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남북 대화에서 여성의 참여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으며 전통 안보 혹은 경제교류협력이라는 패러다임에서 여성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다뤄져왔다.
이것의 이면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남한 당국자와 시민사회에서 여성 어젠다에 대한 시급성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나 통일의 문제를 국가 수준이나 민족 문제로 접근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끼어들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대화와 교류 상대인 북한 여성들의 경험과 위치가 남한 여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 여성들이 젠더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을 때 북한 여성들은 체제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이를 공감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북한 여성의 위치가 국가와 가정의 책임이라는 이중의 부담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상대적 자율성도 존재했던 까닭이다. 더 큰 문제는 북한 정권의 규율체계나 정치적 레토릭으로부터 독립적인 북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안타깝게도 여성 참여에 기반을 둔 한반도 평화 구축은 남북 모두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이후 남북 사이의 대화와 교류가 멈추게 되자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에 여성의 역할을 찾기란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일본군 성노예, 한국군 ‘위안부’, 그리고 미국군 ‘위안부’와 같은 전쟁 폭력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연대는 지속되었지만 한반도 정전체제 극복과 평화 안착을 위한 남북 여성 사이의 활발한 토론이나 실천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어젠다가 평화 담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여성 참여라는 목표는 평화를 위한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통일이나 평화 담론 지형에 여성주의적 접근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못했다. 국가 수준에서 논의되는 통일, 평화 담론에서 젠더 폭력이나 불평등의 문제가 제한적으로 다뤄져온 까닭에 여성의 위치에서 경험되는 평화의 다층성에 대한 논의도 진전되지 못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정전체제와 군사적 긴장이 지루하게 지속되면서 남한 여성들에게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남한 여성들은 가상 세계를 포함한 일상에서의 성폭력과 위협, 직장이나 학업에서의 성차별이나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성규범 등에 대해서는 반평화적인 문제로 감각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 중이며 이로 인해 여성들의 위치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는 충분히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군사 중심의 ‘안보’ 문제이며, 이에 여성주의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는 패배의식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한반도의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과 위협의 대부분은 정전체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성 중심적 문화와 권력은 정전체제라는 ‘불완전한 국가’를 빌미로 유지되고 있으며, 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권력도 국가 안보라는 틀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다시 말해 분단 문제 극복이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평화에 근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맥락에서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상과 문화의 폭력과 정전체제라는 구조가 결합되어 있는 한반도적 비평화 매커니즘을 밝혀냄으로써 평화의 상을 다층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실상 ‘전쟁이 지속되어 온’ 한반도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은 때로는 직접적인 성폭력과 성착취로 가시화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비가시적인 문화와 관습의 모습으로 여성들의 삶과 의식을 옥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는 단순히 두 국가 사이의 관계 개선 혹은 통일을 의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구축된 사회 전반의 폭력과 위계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 평화 만들기의 과정이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축이 바로 젠더인 것이다. 그만큼 여성주의적 평화란 분단과 일상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젠더 위계를 무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미시적 문제로 분단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며, 동시에 분단이라는 국가 수준의 폭력을 일상과 연관 시켜 사고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남북한 여성들 사이의 유다른 경험을 아우르는 여성주의적 평화 담론도 필요하다. 지난 교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남북 여성들이 현재 위치한 세계는 상당히 다르지만 이들이 여성주의적 평화라는 더 큰 미래를 공유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만들어내는 진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진전될 수 있는 상태를 한반도 평화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위해 더욱 다양한 상상력들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핵과 미사일 같은 안보 영역에서의 평화도 어려운데 여성주의적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다소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단계적으로 평화에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조언도 덧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비전이 부재한 상황에서 현실적 수준에서의 평화 실천이나 평화 운동은 방향을 잃고 표류해왔던 것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남북 간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는 요즘, 모두들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한반도 평화 구축의 근본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현실적 참여와 운동에 분주해 잠시 뒤편으로 미뤄두었던 여성주의적 평화에 대한 토론을 이제라도 시작했으면 한다. 앞이 보이지 않을수록 근본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말을 되새겨보도록 하자. 가장 멀어 보여 주저했던 방법이 목표로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 글쓴이 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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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북한 사회문화와 북한이탈주민의 이주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갈라진 마음들: 분단의 사회심리학』(창비, 2020) 외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