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KT 케이블 TV 서비스인 올레TV 영화 검색어 카테고리 중 하나가 ‘성폭행 영화’라는 사실이 논란이 되었다. ‘성폭행 영화’ 카테고리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조정래, 2016)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역사적 고통, 실재한 피해를 재현할 때의 윤리가 창작자와 수용자(그리고 플랫폼)에 왜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한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다룬 작품들은 이렇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집중해왔고, 그에 따른 문제가 불거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듣기 시간』(김숨, 문학실험실, 2021)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게 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경청하게 한다.
소설가 김숨은 『듣기 시간』에 이르기까지 몇 년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고통을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듣기 시간』 단행본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설명을 빌리면 『한 명』(현대문학, 2016)에서 김숨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발언을 300여 개의 각주로 인용함으로써 소설을 일종의 ‘증언 아카이브’로 활용하는 실험을 수행한 바 있으며,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 2018)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는 인터뷰어가 거의 개입하지 않은 채로 피해자들의 증언이 날것 그대로 소설의 재료가 된 ‘증언 소설’ 혹은 ‘인터뷰 소설’이다. 같은 해인 2018년에 발표된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역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서간체 형식의 역사소설이다. 증언을 기반으로 하는, 증언 자체가 소설의 육체적 토대를 형성하는 이러한 소설들이 태어나기까지 가장 중요했을 증언 녹취 과정 그 자체를 다룬 것이 바로 『듣기 시간』이다. 증언을 녹취하고 그 내용을 소설로 썼을 테니 『듣기 시간』은 내용상으로 보면 다른 작품보다 앞선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더 나중에 쓰였다.
김숨의 『한 명』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군인 백 명을 상대할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군인 백 명을 상대합니까.”
작지만 야무지던 석순 언니가 따지고 들자, 중대장이 병사들을 시켜 석순 언니를 앞으로 끌어냈다.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군인들은 닭 껍질을 벗기듯 석순 언니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석순 언니의 몸은 깡말라 사내아이의 몸 같았다. 겁에 질린 소녀들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녀들을 한 명 한 명 씹어먹을 듯 바라보는 중대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얼른 고개를 떨어뜨렸다. 막사 뒤에서 수십 개의 못을 동시에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한 명』 중에서
역사적 고통을 증명하는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옮겨내는 작업은 증언을 기록하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중요하다. 픽션에서는 어떨까. 『한 명』은 가까운 미래,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뿐인 어느 날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지 않고 살아온 ‘한 명’의 할머니가 주인공인데, 그는 80여 년 전 열세 살 때 마을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 사내들에게 잡혀 만주로 끌려갔다. 그는 자신처럼 강제로 끌려온 다른 소녀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성적 학대와 고문을 당했다. 당시 작가 김숨은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 아무도 남아 계시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므로 소설을 통해 그런 점에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싶고, 그것이 문학의 도리라 생각한다”고 집필 동기를 밝힌 바 있는데, 한 사람의 목소리를 옮기는 구성이지만 실제로는 300여 개에 이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을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피해자들의 증언 자체가 글의 뼈대를 이룬다. 읽는 사람은 피해자가 실제로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를 자세하게 읽게 된다.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몇 번이고 눈을 돌리고 싶은 장면의 연속이다.
『한 명』을 읽다 보면 ‘왜 주인공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을까’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겪은 일은 과거 특정 시간에 한정된 경험이라기보다는 한 생애에 걸친 고통의 연쇄였으므로 증언의 범위가 무척 넓다. 그 시간을 다시 복기하는 일 자체가 피해자가 폭력을 다시 경험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이 된다는 뜻이다. 생존자의 가족들이 말하지 않기를 요구해왔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책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을 막기 위해 찾아온 친척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나 사정했는데...... 신고하지 말라고...... 남세스러운 일이니까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고 그냥 조용히 살라고, 내가 그렇게 사정했는데 기어코 신고해서는...... 위안부였던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신고하면 인연 끊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기어코......”
그런데 제3자 입장에서 추측할 수 있는 그런 이유가 말할 수 없는 이유의 다는 아니다. 『듣기 시간』에서는 증언의 불가능성에 주목한다. 피해자의 증언이 대중에 알려질 때는 정제된 언어로 사건 순서에 따라 정리된 상태지만, 『듣기 시간』에서 우리는 극심한 폭력 피해에 대한 증언은 그 자체로 고통의 시간이며, ‘듣기’라는 작업은 발화자의 고통이 생생해지는 그 침묵을 듣는 일임을 알게 된다.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침묵’을 들어야 한다.
‘말할 수 없음’을 경청하라. 아마 『듣기 시간』을 요약하면 이 문장이 될 것이다.
김숨의 『듣기 시간』은 1997년 8월 9일 오후 진주의 한 주택에서 녹음기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여자의 침묵을 담아내며 시작한다. 녹음기는 소리를 담기 위한 것이지만 도무지 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 듣기를 시도하는 과정을 담은 『듣기 시간』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는 윤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김숨의 앞선 작업들보다 더 중요하게, 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묻는 작업일 것이다. 정교하게 피해를 재현하는 대신, 말할 수 없음 그 자체를 경청하게 하기. 고통을 재현할 수 없음을 재현하기.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방식이야말로 고통을 전달하는 가장 솔직한 언어가 되리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언어가 무력해지는 순간을 포착하기.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세부적인 면이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어야 한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지식이 없는, 혹은 피상적인 이해만 있는 사람이 『듣기 시간』을 읽는다면, 책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있을 듯한 타이밍에 소설이 끝나버린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황수남(아마 실명은 아닐 것이다) 할머니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첫 번째 말은 “새벽에 깼어......”이다. 그 다음으로는 “커졌어......”라는 말. 시계가 커졌다고 하는데,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알기 어려운 분절된 문장과 단어의 나열만이 이어진다. 구술 증언 채록자인 인터뷰어 성윤주(김숨 작가의 분신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상실한 건 ‘말’이 아니라 ‘말 구사력’인지도 모른다. 죽은 물고기들처럼 낱낱으로 흩어져 부유하는 낱말들을 어순에 맞게 배열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인지도. 주어, 목적어, 수식어, 술어를 조합하지 못해서.” 그리하여, “나는 그녀를 들은 적 없다.”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문맹이라서 제대로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고 조직화할 수 없다. 때로는 기억하지 않아서 미치지 않을 수 있었고 기억하지 않아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증언할 수 있었을 수많은 피해자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즉, 『듣기 시간』에서 듣는다는 일은, 우리가 들을 기회가 있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만큼이나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한 증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침묵을 듣는다는 작업은 그런 뜻이다. 동시에 듣기란 기다리기다. 『듣기 시간』에서는 구술 증언을 채록하기 위해 성윤주가 계속 여러 일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며 중요한 증언 내용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 작업은 마침내 성윤주의 어떤 깨달음, 즉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에 다다른다. ‘말할 수 없음’이야말로 핵심적인 증언이 된다. 이 침묵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회의 (또한 국제 사회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았을까. 피해와 고통의 경험에 대한 재현윤리를 고민한다는 일의 어려움은 여기 있다. 그 고통을 이해하는 이들만이, 침묵 속에서 고통을 읽어낼 수 있다.
- 글쓴이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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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