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주 님은 1924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1940년 마산 봉우제로 모이라는 말에 따랐다가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갔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의 위안소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해방되자 피난민 대열에 끼여 군함을 타고 진도에 도착했다. 이후 식모살이, 청소 등을 하며 대부분의 생애를 어렵게 살았지만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등록을 하고 수요시위에도 참가했다. 경남 창원에서 향년 98세로 눈을 감은 김양주 할머니의 마지막을 정리해보려 한다.
2022년 5월 1일, 일요일 밤. 10시가 다 돼 가기에 집안 정리를 하고 조용히 쉬면서 슬슬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이때 울리는 전화. 내 가족은 모두 집에 있고 각자의 공간에서 쉬고 있는 일요일 밤에 울리는 전화라니. 반갑거나 기쁜 전화는 결코 아니다.
하필이면 이날은 아침에 아이가 다쳐 응급실에 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다. 응급이긴 하지만 상처 부위가 얼굴 쪽이라 성형외가 전문의가 아니면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병원 응급실을 알아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치료도 못 받고 상처만 가린 채 월요일에 확진자 외래진료가 가능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정신없이 보냈다.
그런 하루를 마치려고 하는데 울리는 전화라니.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님께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직 용건을 말씀하신 것도 아닌데 머리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은 분명 아니야. 웬만한 일로는 전화하실 분이 아닌데 전화를 하셨다는 것은 그래, 그것뿐이야.’ 역시나였다.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 후 차분하게 김양주 할머니께서 좀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자려고 누워있던 몸이 할머니의 부고로 찬물을 끼얹은 듯 꼿꼿해졌다. 대표님께서 혼자서 일 처리하기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한마음병원’으로 와 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가겠다고 했더니 운전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덧붙이셨다.
병원에 도착해 입구를 찾아 헤매다 창원시청 일본군‘위안부’ 담당 직원을 만나 함께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병원 복도에는 대표님, 할머니의 아들, 할머니의 간병인까지 세 분이 계셨다. 이 세 사람은 한두 살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70대 후반이다. 할머니께서 향년 98세였으니 가장 가까운 분들의 나이도 그만큼 많다. 세 분이 장례를 어찌할 것인지를 의논하셨다.
대표님은 할머니의 아들(실제로는 양자)이 유족이므로 모든 의사결정을 하도록 장례식에 대해 설명하셨다. 하지만 유족 분은 고령인데다 충격도 받으셔서 복잡한 장례 절차를 주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족의 주도로 장례 형식은 어떻게 할지, 비용과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지 등을 결정해야 했지만 이경희 대표님 중심으로 장례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빈소를 어디에 차릴지부터 정하기 어려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있었던 병원 측에서는 이곳에서 장례식을 진행했으면 하는 의사를 보였지만 유족이신 홍종수 어른은 ‘마산의료원’으로 가고 싶어 했다. 집에서 가깝고 자신이 알고 있는 곳이라 편하신 것 같았다. 이로써 장례식 장소가 결정됐다. 한마음병원에서 마산의료원으로 고인을 먼저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시청 직원의 개인 승용차로 뒤따랐다.
마산의료원에 도착하자 병원 장례식장 직원으로부터 쏟아지는 설명과 질문을 들어야 했지만 유족 분은 어느 하나도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모든 의사결정은 이경희 대표님이 하셔야 했다. 대표님은 병원 장례식장의 장례 절차와 행정처리, 비용 등에 관해 설명을 들은 뒤 이를 쉽게 해석하고 요약해서 유족에게 다시 설명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를 물었다. 이 과정이 길고도 지루하게 이어졌다. 빈소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이며, 장례 기간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유족에게 설명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게 해야 했지만 마산의료원에서 장례를 진행하면 좋겠다는 결정 이후 유족 되시는 분은 아무런 결정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대표님이 알아서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경희 대표는 복잡한 상황은 쉽게 설명해 주고 해야 할 일은 대신해 주기로 작심하신 듯 담담하게 장례 절차를 밟아 갔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니의 삶이 마지막에 잘 정리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기에 대표님은 장례식을 지역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부고 내용이 결정됐다. 마산의료원으로 빈소를 정하고 시민장례위원회의 주도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양주 할머니의 별세를 외부에 알렸다.
빈소가 꾸려지고 나서도 선택의 순간이 계속됐다. 빈소는 어떻게 꾸밀 것인지, 장례 방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특정 종교의식으로 치를 것인지, 전통의례로 치를 것인지 매 순간 선택해야 했다.
할머니께서 말년에 성당을 다니며 세례를 받은 적이 있기에 장례 방식은 천주교의 장례 절차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이전에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니의 장례를 도와줬던 상조회사에 연락해 장례를 대행하도록 했다. 할머니가 운명하신 후 빈소, 장례 방식, 상조회사 등을 결정하니 자정이 넘었다. 장례 기간은 4일이 되었다.
이틀째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부터 대표님은 지난 밤 할머니의 장례 주관이 지역 시민단체 장으로 결정됐으니 장례위원회를 꾸릴 수 있도록 실무를 맡을 집행위원 선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급하게 시민단체 몇 군데에 연락을 드려 오전에 시민장례위원회 집행위원회를 소집할 수 있었다. 오전 10시쯤 경남진보연합, 창원진보연합, 여성연합, 여성연대, 진보대학생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모여 할머니의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4일장 중 이틀째에는 할머니의 부고를 알리고 단체 등에 공동장례위원장과 장례위원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고 장례비용에 포함되지 않는 기타 경비는 여러 시민단체가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장례 사흘째에는 추모식을 진행하기로 하고 추모식 진행자, 추모공연, 추모사 등의 내용을 결정했다.
시민장례위원회의 진행 방향이 결정되자 장례 일정은 숨 가쁘게 처리해야 했다. 부고장을 만들어 띄우고, 장례위원 모집 공지를 돌려야 했다. 시민단체 SNS 계정 몇 군데에 공통으로 공지를 올리니, 이 공지를 본 시민들이 각자가 속한 단체에 소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창원지역 시민단체 대부분이 할머니의 부고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지역 언론사였다. 방송과 언론에서 할머니 부고 기사가 송출되자 관공서에서 조문과 조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부터는 정·관계에서 조문이 이어졌다. 지방자치단체장을 시작으로 여성가족부, 외교부 장관의 조화가 속속 도착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조화가 왔다. 이미 자리 잡았던 각계각층의 조화를 정리하고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의 조화를 맨 안쪽으로 우선한 뒤 나머지 조화를 정리했다.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 건강하셨을 때 이 같은 관심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덧없는 푸념이 나왔다. 조문객의 발길도 이어졌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애도하는 시장, 시의원, 도의원을 시작으로 정·관계 대표와 관계자의 조문이 이어졌다. 이경희 대표님은 연이은 조문객을 맞았고 그동안의 할머니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느라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정의기억연대 실무자와 이나영 이사장이 조문을 오고, 대구의 이용수 할머니와 대구지역 활동가분들도 조문을 위해 오셨다. 이용수 할머니가 오시자 장례식장에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전에 다른 할머니들의 장례식장에서도 다짐했던 말을 재확인하는 말을 했다. 먼저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있으시라, 반드시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아 내겠다, 국제사회에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늦은 저녁에는 여성가족부 장관이 조문을 왔다. 이경희 대표는 유족인 홍종수 님을 여성가족부 장관과 인사를 나누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하시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여성가족부 장관의 조문을 끝으로 장례 이틀째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사흘째 날이 되었다. 오전에 조문객이 한가한 틈을 타 저녁에 있을 추모식 진행자와 추모 공연, 추모사를 해주실 분들에 대한 섭외를 요청드렸다. 다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고 촉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고자 애썼다. 흔한 장례식장의 풍경도 있었다. 조문객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밥과 국은 얼마만큼 추가 주문을 해야 하는지, 비품은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지 역할을 맡은 분들이 빨리 결정을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고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래도 뭔가를 토대로 삼아 유추하고 요량하여 필요한 양을 결정해 주어야 했다. 이때가 가장 어렵기도 했다.
다음날이 발인이라 할머니를 모실 유골함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상조회사에서 두세 종류의 유골함을 안내하고 유족과 이경희 대표님이 의논을 했다. 유골함이 결정되자 유골함 겉에 각인할 문구를 제작해야 했다.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인데 시간이 촉박했다. 1시간 내로 내용이 결정돼야 했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양주 할머니 모두가 기억하겠습니다>를 유골함에 새기기로 하고 유골함 제작에 들어갔다.
사흘째 낮부터는 창원지역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언론보도를 접한 시민, 학생을 시작으로 시민사회단체의 조문이 이어졌다. 조문객이 이어지는 와중에 한쪽에서는 저녁에 있을 추도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조문객이 머무는 공간을 추도식장으로 마련하고 식순을 확인하는 등 추도식 준비를 하는 동시에 발인 준비도 해야 했다. 할머니의 관 운구는 창원지역 청년 대학생으로 구성된 진보대학생네트워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학교 수업과 겹침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준 대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전할 게 없었다.
발인 형식과 절차를 의논하고 있을 때 장례 기간 내내 함께해 주신 월남성당 신자분들께서 발인 미사를 해주시겠다고 전해왔다. 발인 때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화장은 창원시립상복공원에서 하기로 하고 최종 시간을 통보받자 발인 시간이 확정됐다. 발인 시간은 오전, 화장 시간은 9시로 결정됐다.
오후부터는 더 많은 시민 조문객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특히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조문객이 더욱 늘었다. 이어 추도식 시간이 되었다. 추도식까지 총 90여 명의 공동장례위원장이 되겠다는 신청이 있었고, 장례위원은 150여 명으로 구성됐다. 저녁 7시가 되자 1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추도식이 시작됐다. 경남여성연합 윤소영 대표의 진행으로 엄숙한 추도식이 시작됐다. 정의기억연대와 거제통영시민모임의 추도사가 이어지고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가 김양주 할머니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가수 김산 님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가 흐를 때는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다. 조문객들 사이에서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추도사가 이어졌다. 끝으로 이경민 님이 할머니를 보내는 추모곡을 부르는 순간에는 모두가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1시간 30분가량의 추도식을 마치고 저마다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나흘째 발인 시간이 되었다. 이제 할머니와 작별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성당 신부님의 장례 미사가 진행됐다. 미사가 끝나고 난 뒤 시민사회단체의 마지막 영결 인사가 이어졌다. 다들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터뜨리면 눈물바다가 될 지경이었다. 발인과 영결식이 끝나자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했던 빈소가 말끔히 정리되고, 고인을 운구하여 마지막 화장의 단계로 갔다. 대학생 청년들이 위패와 영정을 들었고 고인의 관도 그들의 손으로 옮겼다. 버스로 30여 분을 달려 화장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고인이 한 줌의 재로 남는 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얀 유골함에 담겨 유족에게 전해지고 곧이어 납골당에 모셔졌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양주가 납골당 안치 번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골함을 봉안하는 유리문이 닫히는 순간 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장례식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함께한 분들과 상복공원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했다. 정말로 끝이 났다.
할머니와 옷깃 한 번의 스침이라도 있었거나 이마저도 없지만 일본군‘위안부’의 고통에 공감했던 많은 분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할머니가 편안하시길 빌고 할머니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할머니가 운명했다는 전화에서부터 납골당에 봉안되는 순간까지 4일 동안의 일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것들을 챙길 때마다 김양주 할머니가 생각날 것 같다. 이제 다들 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 글쓴이 정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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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