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아니, 기뻤어요.’

김리라

  • 게시일2021.11.19
  • 최종수정일2022.11.25

지난 9월,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의 축사를 이용수 선생님께 부탁드리고자 대구로 향했다. 가능하다면 선생님의 근황을 듣고 컨퍼런스에 기대하시는 바를 간략히 들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짧은 지면에 풀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 마디로 뵙고 난 소감을 전해야 한다면 나는 이 방문기의 제목을 '기뻤어요'나 ‘아니, 기뻤어요’라고 정하고 싶다. 

선생님께 들은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기도 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기처럼 투명하고 선선히 하시던 말씀 “아니, 기뻤어요.”

9월 15일, 대구 서문로

대구 중앙로역에 내려 몇 걸음만 떼면 바로 저만치에 야트막한 2층 건물이 보인다. 한창 솟아오르고 있는 콘크리트 빌딩 숲 속에 소롯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목조 건물.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전경 ⓒ김리라


‘희움’

희움. 나도 모르게 ‘기쁨이 움트는 곳’이라고 읽는다. 한 번 시작된 오독(誤讀)은 반복된다. 

희움 문패 ⓒ김리라


본래 뜻은 ‘희망을 꽃피움’이라는 희움을 나는 자꾸 ‘기쁠 희’에 ‘움틀 움’ 혹은 ‘움막 움’이라고 멋대로 기억하곤 한다. 희움에 들어서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궁글리고 있을 때 간사님께서 초록 라벨이 붙은 디카페인 음료를 내어주신다.

안녕 라일락

희움 안뜰 100년 라일락 ⓒ김리라


아직 선생님은 오지 않으셨다. 기다리는 틈을 타 전시관 안뜰로 향한다. 초록 잎을 무성히 내민 라일락 나무가 그늘 한 켠을 내어 준다. 안녕. 라일락님.
3.1 운동 직후인 1920년대부터 100여 년을 이 곳에 있었다는 이 나무 하나만을 보려고 여기 오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움 주변은 온통 역사의 현장이어서 거리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희움 정문 앞 마당엔 3.1운동 당시 행진 경로 표식이 박혀 있다. 

희움 앞 보도 3.8 만세 행진로 표시 ⓒ김리라


열 걸음 안되는 대각선 맞은편에는 1930년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투입된 식산은행 건물이 그대로 남아 대구 근대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희움 대각선 맞은편 대구근대역사관 ⓒ김리라


키 큰 라일락이 지켜본 그간의 이야기만으로도 이 곳에 온 보람은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을 즈음 택시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연보라

하얀 갖신과 연보라색 한복으로 단장하신 이용수 선생님이 지팡이에 의지해 들어오셨다. 라일락 빛깔이 곱게 잘 어울리신다.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시작을 축하합니다.” 
카메라가 켜지고, 쨍한 조명 앞에서 원고 없이 긴 문장을 한 호흡에 말해내기란 방송인들도 어려운 법이다.

“먼 데 있는 저희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신 국제(사회) 여러분들께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또박 또박, 틀림없이 이어지는 말들에 감탄할 때쯤, ‘흐-읍’ 선생님은 얕게 숨을 고르시고는 돌연 “조선 때, 식민지 때, 무법 때...”로 돌아가신다. 
 
당신이 끌려간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국제 사회 여러분들께’, ‘피해자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나니 그 이야기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아마도 지난 30년 가까이 카메라가 켜지고 나면 어김없이 돌아온 질문들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이명

“양손을 묶고 (그들이) 전기를 한 번 돌린 때 제가 크-게 엄마라고 한 번 불런 거이 기억이 납니다. 그랬는데 지금 머리에서 귀에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소리가 납니다. 머리에서 나는지 귀에서 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머리와 귀를 울리는 이명은 당신 스스로의 비명. 울부짖음. 매일 그렇게 엄마, 엄마 부르짖고 계시는구나.  

내가 어떻게 하마 

“추우나 더우나 아이들이 줄로 서가 있어요. 안아 돌라고. 내가 안아줍니다. 쪼맨한 사람들이 와서 울어요. 너거가 무슨 죄가 있노. 너거를 와 울리노.”

“이 생각을 하면은 내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 문제를 해결할게 차라리 내가 죽으라카믄 죽겠어요.”

“내가 어떻게 하마 이걸 해결을 할까 생각할 적에 무식한 내가, 배우지도 못한 내가 돌지도 않고 열심히 해보자 해서 지금까지 왔어요.”

한 번 말을 시작하시면 2시간 가까이 끊김이 없으시다. 간간히 ‘허-억’ 하고 가쁘고 벅찬 숨을 몰아쉬고는 이내 이야기를 이어 가신다.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끊지 못하는 나는 선생님의 기분이 나아지게 할 질문이 무엇일지 궁리할 뿐이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정연하게 말을 이어가고 계셨다. 이런 피해는 외국에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선생님,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였나요?“
 
100여 년의 시공간을 오가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시다. 질문이 적절치 않았던 걸까? 
 
잠시 머뭇거리시는 선생님께 함께 간 동료가 고쳐 질문을 드린다. 
“가장 기분 좋으셨을 때요. 선생님.” 

원투원

“원투원.” 
이내 흐트러졌던 페이스를 바로 잡으신 선생님의 첫마디는 ‘121’이었다.
 
“제일 좋아서 많이 울었을 때가 마이클 혼다 의원(등이) 워싱턴에서 121 결의안 통과했을 때요.”
 
“의장님이 잘 걷지도 못하시는데, 자기 사무실에 저를 앉혀 놓고 여자 비서가 (돕고).. 근 한 달로 미국 국회에서 살았습니다. 이 분들이 땀을 뻑뻑 흘리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의장님이 이 결의안 통과시키면 뭘 사줄라캅니까 물어요. 김치하고 불고기 사 달라 합디다.” 

“의사봉을 딱딱딱 세 번 치고 이용수 할 때(결의안이 통과될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너무 놀라고 좋아서요. 춤도 췄어요.”

툭툭 탁! 선생님의 발은 저절로 리듬을 타고 어깨가 들썩였다. 미 하원 121호 결의안 통과 순간의 기쁨이 춤사위 속에 일렁인다. 보조개가 어여쁘시구나. 

“모두 감사한 분들 덕분이지요.” 
“처음에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잖습니까?”
“형님 아우님들(한테) 가마(=가면) 내가 해결하고 왔다 해야지요.”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북한…
고맙고 그리운 사람들이 오가는 인터뷰 속에서 선생님의 기분이 한결 나아지신 듯했다. 이제 카메라를 꺼도 될 것 같다. 더 하실 말씀은 없는지 묻고, 이 여정들 속에서 혹시 힘들지는 않으셨는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껏 울고 난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답하셨다. 
“아니, 기뻤어요.”

여성과 교육

카메라와 조명이 철수하자 선생님은 마알간 얼굴로, 얼른 희움보다 큰 장소에 교육관을 짓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 희움은 지붕에 비가 샌다고 일러주신다.

“비 오마 여기 물이 차가지고 (이 사람이) 밤새도록 퍼냅니다.” 

곁에 서 있던 서혁수 희움 대표가 머쓱해하며 부러 아무일 아닌 듯 “뭘 밤새도록 퍼내요” 라고 얼버무린다. 그런 티키타카의 경쾌함과 애달픔이 공존하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지 몰라 나도 일단은 짐짓 웃어 본다.

“여가 확장이 돼야지. 빨리 교육관을 지어야지. 역사를 아르켜야지.”

모든 피해생존자 선생님들이 배움과 교육에 대한 열망이 남다르셨지만 이용수 선생님은 자신과 미래세대 교육에 대한 염원이 그 천 배는 넘을 것이라고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당신 스스로가 70세에 경북대 대학원에서 2년간 철학을 공부하셨고 대구 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제가 법학을 할라켔어요. 변호사가 되어가지고 당당하니 변론하고 싶다 했을 적에 그 소리를 어디 가서 했냐 하면 2007년 도 7월... 워싱턴에서 원투원 결의안 하러 6월 28일날 갔어요. 제가 증언을 이래 하고 나니까 의장이 말을 잘한다꼬 변호사하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그래라도(=그렇지 않아도) 내가 법할 공부를 할라켔는데 어려워서 못했습니다 카이 뒤에서 우리 동포들이 막 박수를 치며 웃었어요.”

“이 역사관 저는 이거보다 넓혀가지고 교육관을 짓겠습니다. 지어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올바른 ‘위안부’ 역사, 세계가 다 알고 또한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이 ‘위안부’ 역사를 해결해서 저 할머니들한테 가서 제가 해결하고 왔다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말 속에서 나는 ‘여성과 교육’, ‘여성과 정치’, ‘여성과 경제’ 등 무수한 버전의 ‘여성과 OO’을 본다. 그래서. 

당신의 ‘기뻤어요’라는 한 마디를 바톤 삼아 내 손에 담아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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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 생존자들은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 땅에서 웃고 떠들고 잠을 청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희움 역사관’ 등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곳에는 희움을 ‘喜움’이라 부르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김리라 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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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리라

(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교육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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