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금박은주

  • 게시일2021.09.07
  • 최종수정일2022.11.25

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박필근 할머니(왼쪽)와 금박은주 포항여성회 대표 ⓒ포항여성회


전화벨이 울린다. 회의 중이라 통화가 어렵다. 
길게 울리던 전화벨이 잠시 조용해진다. 그리고 다시 울리기를 반복한다.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는다.

“회장댁인교? 심심어가 전화 했니더. 마카 잘 있능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박필근 할머니의 목소리.

“할맹교? 밥은 잡샀능교? 예에 우리는 잘 있니더! 할매는 어디 아픈 데 없능교?” 

할머니와 나만의 비밀병기, 경상도 사람들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할머니와 한참 통화를 하다 보면 정겨운 사투리가 전화기 너머 자유롭게 유영한다.

올해 연세가 94세이신 우리 할머니. 박필근 할머니. 한 달에 한 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지만, 그마저도 바쁘면 몇 달 만에 찾아뵙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늘 회장댁 회장댁 하면서 기다리신다.

할머니와의 인연은 여성회 회장을 맡게 된 2018년부터 시작됐다. 두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찾아뵙다가, 할머니 연세도 있으시니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고 생필품을 사다 드리며 안부 인사를 드리고 있다. 

2020년 1월, 박필근 할머니가 생필품을 전달받고 있다 ⓒ포항여성회


할머니 댁을 찾을 때 준비하는 생필품 중엔 꼭 들어가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만약 이를 빼먹거나 잘못 사 가는 날엔 할머니의 서운함이 가득한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밤에 잘 못 주무시고 눈물이 자꾸 나 슬플 때마다 드시는 우황청심환과 붙이는 파스 작은 것은 꼭 사야 한다. 큰 것으로 잘못 사 갔다가 어찌나 서운해 하시던지. 그 다음부터는 붙이는 파스 작은 것, 요구르트와 율무차, 홍삼 사탕과 라면, 국수, 소고기 국거리 등을 꼭 챙긴다. 그중에서도 절대 빠지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쌀과 찹쌀이다. 쌀은 20kg, 찹쌀은 10kg을 한 달에 한 번씩 꼭 사다 드린다. 혼자 사시고 많이 드시지도 않는데 쌀이나 찹쌀을 저만큼 드시나? 싶겠지만 그건 절대 타협이 불가능한 물품이다.
 
어느 날 아드님으로부터 “어무이가 하도 배를 곯아가 흰쌀에 원한이 졌는기라요. 그래가 저래 쌀을 받아 놓골랑은 새 쌀 안 드시고 묵은쌀을 또 안 드시능교?”라는 말씀을 듣고 박필근 할머니에게 쌀은 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할머니 댁에 갈 땐 쌀을 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이 쌀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었다. “요새도요, 흰쌀밥만 보믄, 우리 아~들이(자식들이) ‘어매요, 우리는 은제 흰쌀밥 한번 먹어 보능교?’라는 말이 귀에 생생하니더”라며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눈물을 훔치시곤 한다. 

결혼 후에 남편 죽고, 어린 딸 다섯을 다 잃고 할머니 말에 따르면 겨우 둘이 붙들었다는 아들, 딸과 지독하게도 가난하게 사신 할머니. 배급받은 밀가루는 한 되 딱 맞춰 야속하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죽을 쒀 건더기 있는 밀가루 죽은 아들, 딸에게 나눠주고 할머니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빈 그릇에 조금 남아있는 밀가루 죽에 맹물 넣어 그걸로 배를 채웠다고 하셨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지나가는 말로 “아이고 그때부터 배급받았는데, 아직도 배급 받니더”라며 평상을 훔치며 무심히 하셨던 그 말씀이 가끔 그림처럼 떠오르곤 한다. 그때 할머니의 표정, 할머니의 한숨, 할머니의 기분 같은 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 같아 할머니의 가난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가슴에 닿았던 것 같다.

박필근 할머니와 아드님의 일요일 ⓒ백정미


처음에 할머니 구술생애사와 판소리 ‘박필근뎐’을 준비하기로 했던 이유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존재했던 할머니의 역사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물론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이야기를 구술하는 과정에서 할머니에게 ‘위안부’로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도 연구자인 나도 힘들었다. 

구술생애사를 시작한 후 할머니에게서 위안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기 쉽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다물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모르니더. 기억 안 나니더”라고 말씀을 하시면 그날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한참을 서먹서먹하게 있다가 다시 1시간 넘는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그 당시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도움을 주셨던 분이 바로 아드님이시다. 대구에 거주하시지만, 일요일마다 할머니 댁에 내려와 어머니의 필요를 살피는 효자시다. 처음 아드님을 만났을 때 도와드리겠다고 흔쾌히 허락하시면서 “‘위안부’로 끌려간 게 엄마 잘못이 아닌데 일본에서도 저렇게 망언을 하고 있고, 이제는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시면서 당신에게도 쉽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아드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할머니에게 질문하면 그나마 할머니께서 짧게나마 이야기를 전해주셔서 어렵게나마 구술생애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아드님이신 남명식 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할머니는 지금도 고향 마을인 포항시 죽장면에 혼자 살고 계신다. 죽장면은 포항 시내에서도 1시간 이상 떨어진 산골 마을이지만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산 좋고 물 좋은 포항시 죽장면 월평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9남매 중에 여덟째로 태어났다. 귀한 막내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살았으며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찰떡만 묵았니더” “집에 머슴도 둘이나 있었니더”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당시에 찰떡을 먹고 머슴이 두 명이나 있었다는 게 유복함의 상징으로 충분한 것 같다.

박필근 할머니 ⓒ포항여성회


지금도 죽장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많지 않은데 80~90년 전 상황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산골 오지 마을에서 16살 때까지 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박필근 할머니. 어느 날 부모님이 조 밭을 매러 간 사이 둑담(돌담의 방언) 밑에 앉아 있는데 일본 순사가 탄 트럭이 와서 할머니를 일본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며 태워 갔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트럭은 경주 안강까지 갔고, 할머니는 거기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부산에서 다시 일본 가는 배를 타고 할머니는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집에서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위안소라는 공간으로 끌려가 운명이 뒤바뀌었다. 지금도 이 억울한 상황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위안부’피해자를 향한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국내 일부 학자들의 망언과 왜곡을 할머니가 뉴스를 통해 보고 계신다는 점이다. 어느 날 무심히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안 그래도 뉴스에서 그라데요. ‘위안부’가 자기가 원해가 갔다꼬? 아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라소”라고 말씀하셨을 때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제발 할머니 살아 계실 때 일본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위안부’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제발 말이다. 또 한 가지, 할머니가 뉴스를 보고 계시니 지금부터는 ‘위안부’에 대한 망언과 왜곡을 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고다. 제발 말이다. 

할머니는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지만, 그 지옥 같은 ‘위안소’를 당신의 힘으로 탈출한 용감한 분이시다. “여기서 죽으나, 나가 죽으나 매한가지”라며 고향 땅에서 당신을 기다리실 어매를 만나기 위해 죽을 각오로 탈출을 시도했고, 첫 번째 탈출에선 일본 군인에게 잡혀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아직도 할머니 다리에 그대로 움푹 패 남아있다. 한 번씩 할머니는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라며 깊은 상처가 남은 다리를 내 앞에 두시고, 나는 뼈밖에 없는 앙상한 다리를 아무 소리 없이 주물러 드린다. “할매요. 다리가 마이 아픈교?” 

박필근 할머니 ⓒ포항여성회


죽을 각오로 탈출한 위안소, 그리고 두 번째 탈출에서 기적처럼 만난 일본에 온 한국인 부부 은인들. 할머니는 그분들 덕분에 부산까지 오실 수 있었다. 배표뿐만 아니라 새 옷에 새 신발까지 사주며 탈출시켜주신 그 부부에게 할머니가 가진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으니 “그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셨을 텐데, 살아생전 그 은혜를 못 갚았다”며 많이 아쉬워하신다. 할머니를 다시 살게 하신 고마우신 분들, 참 고맙습니다.

기적처럼 다시 밟은 한국, 그리고 부산에서 보름을 걸어 도착한 고향 마을. 당신을 기다렸던 어머니는 병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며, 어머니의 죽음이 모두 다 당신 탓이라며 한탄하시는 모습이 참 슬프기도 하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에게도 어머니는 늘 그리운 분이시구나 싶었다. “우리 어매, 우리 어매”를 부르는 할머니 모습에선 열여섯 소녀 필근이 지금도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할머니는 19살에 결혼을 하셨지만 결혼 후에 남편도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 다섯도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잃고 겨우 셋째 딸과 일곱째인 막내아들이 살았는데 참 찢어지게도 가난했다고 한다. 봄에는 산에서 나물 캐고 여름, 가을에는 남의 집 농사일을 했는데, 배고픈 막내아들을 열 살 딸이 업고 와 젖 먹이고 다시 돌려보내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겨울에는 땔감에 쓸 나무를 하러 산에 가셨다고 하는데,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내가 안 간 산이 없고, 안 다닌 곳이 없니더. 안 해본 일이 없니더. 장에 한번 못 가보고 그래 그래 살았니더”라며 지독한 가난은 할머니의 한숨이 되어 메아리치곤 한다.

2020년 7월, 박필근 할머니가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따고 있다 ⓒ포항여성회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의 손 빌리지 않고 그렇게 사셨던 우리 할머니. 지금도 할머니 댁에 가보면 모든 것이 알뜰하고 정갈하게 정돈돼 있다. 마당 한편에 근사한 정원도 마련돼 있고, 도랑물을 끌어와 비닐하우스에 물을 주며 채소도 키우시고, 잘 키운 상추나 보드라운 열무는 다 뜯어서 우리 손에 쥐어 주신다. 더 줄 게 없는지 살피시는 정이 많은 우리 할머니. 올해는 흙집 허문 자리에 토마토와 고구마 농사를 지으시던데 다음에 가면 맛있는 고구마 삶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터이다.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우리가 출발하기 전부터 기다리신다고 한다. 평상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언제쯤 오는가 기다리실 할머니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시게 하려고 출발 전화를 좀 늦게 드리기도 한다. 그렇게 극적인 상봉을 한 후에 헤어질 때면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와 우리를 길게 길게 배웅하신다. “가세이~~~ 또 오세이~~~~” 잘 가고 또 오라는 할머니의 목소리엔 금세 물기가 가득 고이곤 한다. 한참을 손을 흔들고 계신 할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오랫동안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2020년 2월, 박필근 할머니 댁을 방문한 포항여성회 회원과 활동가들 ⓒ포항여성회


나는 친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서 할머니들을 뵈면 다 우리 할매 같아 좋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박필근 할머니는 우리 친할머니를 참 많이도 닮으셨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친근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가끔 눈물 훔치며 신세 한탄을 하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긴급 처방을 내린다. “할매요. 와 멋지니데이!!”라고 화제 전환을 하며 ‘할머니 최고’라고 말하면 눈물을 흘리시다가도 금세 어깨가 으쓱해지시는 우리 할머니 박필근 할머니! 

회장댁 회장댁 하며 나를 찾아주신 그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그동안 참 감사했다. 무엇보다 박필근 할머니께서 계속 건강하셔서 할머니 좋아하시는 쌀하고 파스, 우황청심환, 홍삼사탕 많이 사서 굽이굽이 죽장 골짜기를 넘어 우리를 기다리실 할머니 댁을 오랫동안 찾아가고 싶다.

“할매요!! 우리 왔니데이~~~!!” 

2021년 8월 기림일을 앞둔 새벽
회장댁 드림

사람들의 온기로 비로소 맞이한 햇살, 빛나는 박필근 ⓒ백정미

 

기사 게재일: 20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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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금박은주

여행하는 페미니스트 금박. 2018년부터 포항여성회 회장을 맡고 있고, 2019년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면서 박필근 할머니와 인연을 맺고 있다. 2020년에는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준비하여 무관중 공연을 올렸고, 2021년에는 대면 공연을 통해 박필근 할머니의 역사가 잘 기억되는 일에 동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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