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독일 함부르크,
도로테 죌레 하우스
함부르크에서 시작한 게릴라 소녀상 전시
본 시의 '여성박물관'에 세우기로 한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 국외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미국 글렌데일시의 소녀상에 이어 미국의 두 번째 소녀상 건립을 위해 '위안부'행동이 한국 국외에서 최초로 미국 글렌데일시에 소녀상을 건립한 후 두 번째 소녀상 건립을 위해 수입한 것을 다시 독일로 보내온 것이었다. 하지만 소녀상이 미국에서 독일로 향하던 중 '여성박물관' 소녀상 건립이 무산되어 '평화의 소녀상'은 본으로 가지 못하고 잠시 함부르크에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이를 활용해 함부르크에서 소녀상의 게릴라 전시를 진행했다. 첫 게릴라 전시는 2018년 8월 14일부터 9월 30일까지 함부르크 '도로테 죌레 하우스'에서 열렸다. 6주간의 전시 동안 함부르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두 번이나 전시 중단을 요구했지만, 이레네 팝스트 전시 책임자는 소신에 따라 전시를 중단하지 않았다. 함부르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피해가 염려된다며 전시 중단을 요청하였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 한 달 반 동안 독일 개신교 북독일 노회 회관인 '도로테 죌레 하우스'에 오가는 직원과 방문객들이 게릴라 전시 중인 소녀상을 만났다. 관람객들은 그냥 보기에는 아시아의 귀여운 어린 여성처럼 보이는 소녀상의 배경을 알고 난 후 충격을 받았고, '강제매춘'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소녀상 옆의 의자에 앉기가 두렵다고 했다. 어떤 관람자는 유년 시절 겪은 성추행에 대한 기억을 평생 품고 사는 여성들이 연상된다고 했다. 독일에서도 미성년자 추행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이다.
일본 공관 측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 전시회, 심포지엄은 개최할 수 있어도 '평화의 소녀상' 건립만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예술은 역사 공간과 관람자 개인의 경험이 만나는 자리다. 이런 교육 효과 때문에 소녀상의 건립과 전시를 그렇게 막는 걸까?
독일 함부르크 전시로 시작한 게릴라 전시는 한 장소에 소녀상을 영구히 건립한 것 못지않은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독일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진 지 30년이 되었고 2007년에 유럽연합에서 결의문이 통과되었지만, 좀 더 널리 알려지기 위해선 이런 방법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상만사 새옹지마의 경험이 이렇게 쌓이기 시작하였다.
2019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
'하우스 암 돔'의 평화
함부르크에서 이어질 뻔한 2차 전시가 무산된 듯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프랑크푸르트로 가져올 계획을 세웠다. 2019년 2월에는 프랑크푸르트 본회퍼 교회 목사를 만나 50주년 기념 예배를 기해 6개월 정도 전시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교회를 함께 쓰는 한인교회 어른들 덕분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라인마인한인교회 이한나씨가 라인마인한인교회도 9월에 50주년을 맞이한다며 전시 의사를 밝혀 3월 22일 자 교회 운영위원회에 기획서를 제출하였다. 이로 인해 6개월 허가가 났다는 본회퍼 교회 전시 일정은 3개월만 하기로 합의를 보고 라인마인한인교회 운영위원회 결정을 기다렸다.
그런데 5월이 되자 이 두 교회 모두에서 전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본회퍼 교회의 경우 교회를 소개해 준 파트너 한인교회 목사님이 일부 교인들의 반대로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되어 취소가 되었고, 라인마인한인교회 관계자는 풍경세계문화협회는 완전히 뒤로 빠지고 소녀상만 제공하라는 요구가 있어 운영위원회에서 협의했으나,결론적으로 전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라인마인한인교회에서는 시간이 흐른 뒤인 2020년 3월 8일, 정의기억연대가 보낸 소녀상을 교회 정원에 영구 건립했다.
이 당시는 아직 일본의 방해 가능성이 긴장감을 자아내던 시절인지라 3개월씩 전시를 나누어서 하려던 임시전시가 모두 무산되었지만 교회 전시에서 일본의 방해가 있으면 지원해 주시기로 한 분이라든가, 한인교회 전시 다음에 전시를 추진하기로 한 곳에서 직접 전시 주체가 되어갔다.
우선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의 설립자이자 관장인 요하임 발렌틴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거기 '하우스 암 돔' 로비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할 수 있을까요?"
발렌틴 관장으로부터 바로 답장이 왔다.
"기간은 언제?"
혹시나 하고 드린 메일에 이렇게 신속하게 회신이 올 줄은 몰랐던 터라 숨이 멎는 듯 반가웠다.
'하우스 암 돔'은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들리는 바르톨로메오 대성당 바로 맞은 편에 있다. 교구 관계자들을 포함하여 5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코로나19 로 휴관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매일 수백 명이 오가는 장소였다. 프랑크푸르트의 문화 1번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는 다문화 소통 문제, 독일 과거사 문제, 이민자 문화를 주제로 토론, 워크숍, 낭송회와 같은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곳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대림절 기간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소녀상만사 새옹지마였다.
2019년 10월 28일, 전시가 시작되었다. '평화의 소녀상'이 대림절 기간과 성탄절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게다가 '하우스 암 돔'은 독일인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는 구 시가(Altstadt)에 붙어 있었다.
오프닝 행사에서 요아힘 발렌틴 관장은 인류 역사 이래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약한 이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피해받은 점을 환기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피해 입은 이들에 대해 "전시를 통해 연대를 선언"한다고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 극우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키 데자키 감독의 영화 <주전장>(2019) 반대 캠페인 후 프랑크푸르트 '하우스 암 돔' 전시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나데시코 액션'이란 곳에서 전시를 공격한다는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2017)을 제작한 박수남 감독의 딸인 박마의 선생이 알려 주어서 알게 되었다. <침묵>도 일본에서 상영할 때 격렬한 반대 시위의 대상이 되는 영화였다. 이런 구조를 몰랐다면 더 불안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하우스 암 돔'에서의 소녀상 전시는 절대 막아야 한다는 소녀상 반대자들의 게시글들이 '나데시코 액션' 웹사이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눔의 집'을 방문한 슈뢰더 전 총리와 2016년 프라이부르크 시장에게 보낸 편지, '하우스 암 돔' 관장에게 보낸 편지 내용도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었다. 이 같은 공격에도 '하우스 암 돔' 측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우스 암 돔'에서의 소녀상 전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2019년 2월 19일부터는 괴테대학교에서의 전시도 연이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런 방해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느라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응원과 연대를 담은 편지들도 있었다. 일본의 국제미술제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 예술전에서 '표현의 부자유전'이 금지되었을 때 재개촉구 운동을 한 나고야 시민단체에서 우리의 활동에 연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후일담에 따르면, '하우스 암 돔'이 겪은 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던 것 같다. '하우스 암 돔'은 라칭거 교황(편집자 주: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를 상영할 때에도 상당한 공격을 받았지만 '평화의 소녀상' 전시로 인한 반발은 지금까지 '하우스 암 돔'이 겪은 공격 중 가장 심한 경우였다고 한다.
"오, 그 소녀상 반대 사이트('나데시코 액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까 '하우스 암 돔'이 얼마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중요한 곳인지 광고가 많이 됐던데요? 일본에서도 유명해졌어요."
내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유명해졌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관장의 소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아힘 발렌틴 관장도 웃으며 "당케"(편집자 주: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독일어)라고 말했다.
발렌틴 관장은 이후 괴테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전시 오프닝을 진행할 때도 연대 발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결국 연대의 문제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프랑크푸르트 '평화의 소녀상'의 첫 '숙소 주인'이라고 표현한 발렌틴 관장은 괴테대학교 전시 오프닝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제 맘에 와 닿았습니다.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여기에 와서 (소녀상의 소녀 옆에) 앉아 볼 수 있습니다. 의자에 앉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공감해보고 또 동일시해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여기 있는 비문을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발렌틴 관장의 소신 있으면서도 조용한 대응은 '평화의 소녀상'이 프랑크푸르트에 잘 도착했다는 믿음을 주었다.
2020년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
괴테대학교에서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소녀상 전시가 진행 중인 괴테대학교는 과거 '이게파르벤(IG Faren)'이라는 화학회사의 본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착취한 회사로 나치 독일의 1호 정경유착 사례이다. 괴테대학교가 이곳으로 캠퍼스를 이동한다고 할 때 특히 사회학과 학생들이 대거 반발했다. 수치스러운 장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오늘날 이 새로운 캠퍼스 곳곳에는 나치 독일 당시 이게파르벤 회사의 나치 부역에 관한 기록과 역사 성찰에 관한 동판, 희생자의 초상, 희생자들의 이력이 시청각으로 설치된 추모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소녀상 전시가 진행 중인 사회학관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화두를 제시한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기리는 아도르노 플라츠라는 기념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사회학관 내 도서관 맞은편 큰 벽에는 '평화의 소녀상' 외에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에서 제작한 위안소 분포 지도와 필리핀 레이테 지역 피해자 르메디오스 펠리아스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일기 등을 전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천천히 가는 세상인지라 전시 일정도 2021년 1월 26일까지로 연장되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일반인들에게는 전시가 개방되지 않지만, 괴테대학교 베스트앤드 캠퍼스를 산책하면서 PEG(심리학, 교육학, 사회학) 건물 정면 유리를 통해 소녀상을 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거주자라면 대학 도서관 열람증을 발급받아 해당 전시물들을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다.
괴테대학교 총학생회장 키라 베닝아는 전시 오프닝 개회사에서 2차 세계대전 75주년을 맞아 동맹국 일본의 전범행위도 비판철학에 바탕하여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괴테대학교 총학생회는 학내에서 나치 부역자 이름이 붙은 공간의 이름을 바꾸거나 아우슈비츠 의사 요제프 멩겔레[1]의 박사학위를 취소하는 등 역사 성찰 활동에 활발하게 기여하고 있다.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국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독일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소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동맹국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일본 전쟁 범죄 문제를 생산성 있게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프리츠 바우어 연구소[2] 부소장인 토비아스 프라이 뮐러 박사는 괴테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전시 오프닝 연대 연설에서 80년대에 있었던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소개했다. '타자의 범죄'를 논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에 관한 논쟁이었는데, 이는 "비교는 동일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또, 프라이뮐러 박사는 '평화의 소녀상'처럼 예술 작품을 매개로 역사를 알리는 활동의 효과도 언급하였다.
나치교육학연구소의 공동창립자인 벤야민 오트마이어 교수는 유럽의 안경을 벗고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볼 것을 촉구하며 미래세대를 교육하는 사람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기미가요' 제창 거부 등 국가주의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불이익을 당하는 교사들을 언급하며 국제연대의 의미를 제시했다. 침략자로서의 근현대사를 지닌 독일의 지성이 소신을 갖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글에 소개된 활동은 소녀상 건립을 방해하는 일본 공관의 무례함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부침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둘러싼 활동은 소신 있는 학자들의 연대로까지 발전했다. 소녀상만사 새옹지마라 하겠다.
각주
연결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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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독일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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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소녀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건립되었을까. 이 글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녀상 건립이 공론화된 2016년부터 지금, 여기 이 쉼표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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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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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청산과 화해에서 독일은 일본의 대립 모델로 여겨진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글은 나치 정부로부터 피해입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 글쓴이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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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당시 엄마 배 속에 있던 경자년 생. 분지인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 칠곡군 왜관, 약목을 거쳐 10대 초반에 부산으로 가서 20대 초반에는 회 맛을 알았다. 부산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유학. 현대 독문학과 아동문학 전공, 연극영화TV학과 사회학을 부전공, 프랑크푸르트 대학 마기스터 과정을 졸업했다. 대구대학교와 부경대학교에서 잠시 강사 생활을 하며 『카프카 영화관에 가다』(1997, 영림카디널), 『섹스와 지성 (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러)』(1999, 한길사), 『한길로로로 잔 다르크』(1998, 한길사)를 번역했다. 1998년에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와서 지금까지 계속 거주. 재독 동포가 된 후에는 동포사회 매체에도 관여하고 이런저런 실무를 보았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독일어 강습을 하며 '풍경'이라는 한글문화신문을 발간했다. 2016년~2017년 프라이부르크 유럽 첫 소녀상 건립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독일추진위 조직을 주도한 후 대표의 간곡한 청에 따라 사무국장직을 임명받고 건립식까지 각종 업무를 전담하였다. 2017년 12월 풍경세계문화협회(https://www.punggyeong.org/)를 창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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