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
2020년 7월 11일 토요일에 최윤정 건축사와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이하 괴테대학교) 베스트엔드 캠퍼스 사회학관 로비에서 전시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보러 갔다.
최 건축사가 말했다.
"로비가 크니까, 소녀상이 작아 보이네."
"그러게.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 보여. 귀엽지?"
한미합동훈련도 쉬게 하는 코로나19의 위력은 독일에서도 유효하다. 모든 것이 천천히 가는 세상, 평소라면 매일 수천 명이 오가는 괴테대학교 사회학관에서 소녀상은 쉼표를 즐기는 중이다.
이 글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녀상 건립이 공론화된 2016년부터 지금, 여기 이 쉼표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2016년 8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수원 사람들이 기증하려던 '평화의 소녀상'
2016년 8월 12일,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수원에서 온 메일이었다. 수원 시민이 참여한 '독일 평화의 소녀상 수원시민 건립추진위원회(이하 '수원추진위')'에서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려고 하니 독일 현지에서도 협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공관의 방해 공작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2016년 9월 말에 프라이부르크 시장이 '평화의 소녀상' 건립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당시 연락을 주고받던 수원추진위 이주현 집행위원장과 통화하던 중 나는 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우리한테 보내세요."
일반 공관의 무례함으로 인해 독일 땅에서 발생한 표현의 자유 침해를 기정사실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원에서는 당시 수원추진위를 해체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고 나서 독일 전역 동포사회 단체와 개인들에게 연락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모임을 10년 가량 지속한 단체 관계자들에게도 연락했다. 수원에서 추진한 일은 '물건너 갔다'고 보는 시각이 있어 여러 시간 전화 통화를 하며 설득했다. 메일을 통해 독일 내 건립추진위 조직을 호소했더니 독일 전역에서 20여 명이 모여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독일 건립추진위원회(이하 '독일추진위')'가 구성되었다. 몇 달이 지나면서 참여자는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2016년 10월 초 수원추진위 대표단이 독일에 와서 독일추진위와 협약식을 맺었다. 수원추진위는 소녀상을 보내주고 독일추진위는 소녀상을 건립할 장소를 찾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때 마침 독일 루르 지역에서 재독 한인교회협의회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원추진위 대표단과 함께 한인 교회협의회 총회장에 가서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 계획을 소개했다. 누군가 내게 질문했다.
"추진위는 누구를 대상으로 합니까?"
"재독 동포 사회 4만 명 모두가 추진위라 생각합니다."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놓는다는 취지였다.
2017년 3월 8일[1]에 '안점순 할머니와 함께하는 봄나들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바이에른주 레겐스부르크시 인근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이 열렸다. 수원과 프랑크푸르트에서 각각 40여 명, 그 외 레겐스부르크, 루르 지역, 베를린 등에서 40여 명이 참석해 모두 120여 명이 모였다.
2017년 3월, 독일 비젠트,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
비문없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 다음 날, 현지 관계자에게 연락이 왔다. 독일의 일본 대사관에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녀상 철거 문제가 불거지자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의 비르트 이사장은 타협안으로 소녀상은 그대로 두고 대신 소녀상의 비문을 철거할 것을 제안했다. 비르트 이사장 역시 프라이부르크 시장과 마찬가지로 일본 대사관의 방해를 겪어보니 견디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독일추진위 일각에서는 비문 수정을 일본 측에 부탁해보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고 비문 수정에 관한 의견을 개별적으로 교환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던 중 공원에 서 있는 소녀상에서 이미 비문이 철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확인해본 결과, 건립식 당일에 비문을 부착하지 못했고 건립식 이후 부착하기로 한 비문이 부착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공원에서는 비문을 철거하고 소녀상을 유지할 것이며 이 일이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일본공관원과 나눈 이야기를 담아 사무국장인 내게 메일로 보내왔다. 이에 대해 나는 "비문이 없는 소녀상은 상상할 수 없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이 메일로 인해 사무국장 업무 중단 요청과 사퇴 요구를 받는 등 빗발치는 항의에 직면했다. 하지만 철거 타협안을 용인할 경우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기게 되므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고, 10월에 공원이 겨울 휴장기에 들어갈 때까지 다른 장소가 나오면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쪽에서는 한번 세운 것이고 "고마운" 공원주를 배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소녀상을 옮기는 것에 반대했다.
전자의 경우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본 정부의 역사수정주의적 공격을 독일 내에서 이슈화하는 계기로 삼아 일본이 내세운 한일 프레임에서 벗어나 바이체크 전 대통령이 이야기한 기억문화의 맥락으로 사안을 보자고 했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역사의식을 독일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일본과 독일이 동맹국이므로 독일에서는 많이 힘들 것"이라는 관점이 작용했다.
소녀상 건립이라는 결과물을 환영한다는 점에서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건립을 추진하는 목적과 철학이 다른 데서 기인한 의견 차이였다고 하겠다. 결국, 독일추진위 일각에서 주도하여 2017년 5월 19일 회의가 소집되었고 독일추진위 추용남 대표는 비문이 없는 상태 그대로 평화의 소녀상을 그 공원에 두겠다고 하며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간 전체 일정과 업무를 조직하고 추진해 온 사무국과 실무팀 5인은 그러한 결정을 존중하되 동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사실상 4월 중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던 사무국장과 함께 사무국 사퇴를 선언하며 '비문 있는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한국인이라 하여 모두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 일은 '한국인'이란 틀이 어디까지 유효한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평화의 소녀상' 비문 문구를 둘러싼 논쟁-2차 세계대전이냐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냐
'평화의 소녀상' 비문 문구를 둘러싼 시비는 일본 정부가 소녀상 건립을 방해할 때 단골로 써먹는 메뉴 중 하나다. 역사 부정을 위해서다. 하지만 독일추진위 내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피해 시기와 그것의 표현 방식을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본래 수원에서 보내준 '평화의 소녀상'에서 제공한 비문 원본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이를 내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정다니엘 목사가 교열을 보고 10월 초 수원추진위 관계자들과도 검토하고 수원에 보내려고 할 때 지연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코리아협의회 대표가 전화를 걸어와서 '2차 세계대전'이 아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세 시간의 전화 끝에 그렇다면 최종 교열자인 정다니엘 목사와 연락해서 '2차 세계대전'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고치기만 하고 수원추진위 측에 서둘러 문구 수정 요청을 해달라고했다. 그러나 당시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수정본을 바로 넘기지 않고 비문 전체를 수정해서 2017년 1월에 최종 수정본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2016년 11월 수원에서 소녀상을 보낼 때는 소녀상에 비문을 부착할 수 없었다.
2017년 2월 중순, 소녀상 건립 장소 공원주와 중재자인 레겐스부르크 원불교 교당 관계자를 만났을 때 나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비문을 제시하였으나 교당 관계자는 내 서류철에서 삐져나온 10월 버전('2차 세계대전'이 들어 있는 수원 버전)을 보고 이 텍스트를 선택하게 됐다. 2016년 10월에 결정한 버전으로 비문 내용을 확정하고 작가들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문구가 새겨진 비문은 작가들이 건립식을 앞두고 독일에 입국할 때 직접 들고 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비문은 건립식 당시 좌대에 얹어져 있었을 뿐, 부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일에 접착제를 사용하여 비문을 좌대에 부착하려 했으나 전날 쏟아진 폭우로 소녀상이 젖어 있어 비문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비가 오지 않아 비문을 붙였더라면, '평화의 소녀상'에서 비문만 철거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늦어진 비문 제작과 건립식 전날의 폭우라는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표현을 양보했는데 본의 아니게 '2차 세계대전'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비문을 선택하게 된 셈이다. 내가 '아시아태평양 전쟁'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우선한 것은 무엇보다도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인들에게 전달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프랑크푸르트 전시를 준비하면서 교수님들을 만날 때도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교수님들도 전시 오프닝 때 "유럽의 안경을 벗고 이 문제를 바라보자"라고 하였다.
이 문제는 독일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비문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며, 지난 몇 년간 논의가 이어져 왔다. 미국 단체인 ''위안부'행동(CARE, 전 가주한미포럼)'에서 나온 캘리포니아 고등학교 교사용 '위안부' 교재에서는 "1930년대 초반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 2019년에 프랑크푸르트 전시를 계기로 풍경세계문화협회가 발간한 책자에서는 최초의 위안소가 1932년에 상하이에 생겼다는 점을 고려하여 '1937-1945'를 '1932-1945'로 수정했다. 최근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발간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2018, 황금알)에 첫 위안소가 1931년 11월에 세워졌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앞으로는 '1931-1945'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을 통해 윤명숙 박사의 고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윤 박사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학자들의 경우 1931년에서 1945년까지의 기간을 '15년 전쟁'이라 부른다고 한다.
2017년 8월, 독일 본,
여성박물관
두 번째 기회 그리고 익명의 편지들
독일의 첫 '평화의 소녀상'이 비젠트 시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 세워진 후, 독일 본에 있는 '여성박물관' 마리안느 피첸 관장에게 소녀상 이야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2017년 8월, '여성박물관'으로부터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로 하였다는 편지를 받았다.
새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업무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활동 자금도 조성해야 했다. 공익협회 신설에만 6개월이 소요되었다. 2018년 4월 28일, '풍경세계문화협회'라는 이름으로 공익협회 법원 등록까지 마치고 우리의 프로젝트를 외부에 공개했다. 한국의 케이티브이(KTV, 국민방송)와 연합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한국에도 전했다. 이날은 필리핀 마닐라 해안도로에 4개월가량 서 있던 '필리핀 위안부'상이 철거(2018년 4월 27일)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독일 뒤셀도르프 일본 총영사관 공관원들이 '여성박물관'에 방문했다. 소녀상 건립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본 시의 문화국 관계자도 소녀상 건립 문제와 관련하여 의견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박물관'에 소녀상을 세우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수많은 익명 메일 폭탄이 쏟아졌다. 그때 본 여성박물관에 온 메일과 그 후 다른 파트너 단체에 제기된 일본 공관 측 주장들을 모아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인들이 말하는 '위안부' 역사는 일본을 폄하하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라는 주장
② '위안부'는 '공창'이었으며 월급도 많이 받았다는 주장
③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음에도 한국은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는 주장
④ 소녀상으로 인해 독일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본인이 인종차별을 받고 피해를 볼 것이라는 주장
⑤ 소녀상 건립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북한과 연관이 있거나 돈을 목적으로 한다는 주장
⑥ 소녀상 건립 활동을 사람들은 한국 국가와 한통속으로 일한다는 주장
⑦ 성폭력 문제는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데, "왜 하필 '위안부'"에 집중하냐는 문제 제기
⑧ 소녀상 옆에 일본의 핵 피해자 동상을 함께 세우자는 제안
수많은 익명의 메일 내용 중 단순한 역사 왜곡과 한국인 험담 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두 나라만의 문제로 국한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만의 문제로만 환원하려는 것은 독일과 같은 제3국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전쟁 성범죄가 많은데, 왜 하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냐는 도발도 눈에 띈다. 이 문제 제기는 "왜 오래된 이야기를 가지고 그러느냐","왜 하필 일본에 관한 이야기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런 질문들에는 "왜 안 돼?"라는 반문만이 효력이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두 번째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2018년 8월에서 10월로 미뤄졌다가 결국 무산되었다. '여성박물관' 관장이자 아티스트이기도 한 마리안느 피첸은 독일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고, 메일 폭탄을 비롯해 불확실한 위기감 조성에도 소신을 갖고 대응했다. 하지만 당시 박물관이 처해 있던 상황은 마리안느 피첸 관장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훗날 우연히 알게 된 바에 따르면, 2018년 봄에서 여름까지 일본 측은 베를린 외교가에서 '여성박물관'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한일전'으로 부각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또한, 일본과 독일 본 시 사이의 투자 문제가 걸려있어 '여성박물관' 측도 외교적으로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기억에는 경계가 없다
독일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 활동을 하는 내게 어떤 독일인 친구가 물었다.
"왜 독일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니?"
"왜 안 돼?"
되물었다.
"왜 넌 아시아 라면은 먹으면서 아시아 역사는 싫어?"
"오... 라면과 역사를 어떻게 비교하니?"
'여성박물관'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반대하는 수많은 익명 메일 속 내용과 같이 비본질적인 질문은 본질을 훼손하는 효과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라는 개별성을 희석시키면서 구체적인 역사적 논쟁을 자연스레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독일에는 한국이 개발도상국일 당시에 한국의 민주화에 연대한 친한파 독일인들이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독일에서 충분히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친한파 독일인들의 친절함을 넘어서는 국제 연대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비록,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수는 없게 되었지만,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된 전시는 계획대로 진행하였다. 슬로건은 '기억에는 경계가 없다'로 정해져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문제가 아니며, '위안부'라는 사안 자체가 국제적인 문제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세계 곳곳에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사진을 수집하여 달력으로 제작했다. 독일어, 영어, 한국어 세 언어로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한 이 달력은 2017년 9월부터 제작을 시작하여 10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의외로 달력에 사용할 만한 사진들이 많았다. 5~6명이 분담하고 사진의 저작권을 확보했는데, 배경과 목표를 설명하자 많은 분들이 흔쾌히 높은 해상도의 사진을 보내주시고 사진 이용을 허락해주셨다. '위안부'행동의 김현정 대표는 직접 찍은 많은 사진을 보내주었고, 일본 나고야의 이두희 선생은 오키나와의 아리랑비를 찍은 사진을 비롯해 소중한 자료들을 구해주었다. 이렇게 수집한 사진들은 전문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달력으로 탄생했다. 경계가 없는 시간과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 요일 역시 없앴다. 1,000부를 발행하여 후원인들과 관심 있는 분들, 그리고 기관에 배포하였다. 14.95유로로 가격을 책정하고 판매하여 소녀상 건립과 행사 진행에 필요한 최소 경비를 확보하는 데에 보태기도 하였다.
달력에 들어간 사진을 포함하여 세계 곳곳의 기림비 사진 30점을 모아 2018년 8월 4일부터 8월 30일까지 본 '여성박물관'에서 <전쟁과 분쟁지역 여성에 대한 폭력>이란 이름의 전시를 개최하였다. 전시장 내부의 큰 벽에는 필리핀 레이테(leyte) 지역의 피해자 르데디오스 펠리아스 할머니가 겪은 전쟁 이야기를 23편의 그림일기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을 독일어 번역과 함께 걸었다.
사진전 외에 2018년 8월 18일에 열린 국제심포지엄 <'위안부'-끝나지 않는 이야기>에서도 마리안느 피첸 관장과 함께할 수 있었다.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과 '위안부'행동의 김현정 대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의 교육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저널리스트 그리셀다 몰레만스는 유럽인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첫 소녀상 건립 당시 수원추진위의 집행위원장이었던 이주현 목사는 비문 철거 문제를 언급하였고, 이두희 선생은 일본에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림비에 대해 설명했다.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독일에서 자주 환기되는 '역사 성찰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정신을 우리 활동의 기조로 삼을 수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가장 큰 의의는 한일 양국 간의 문제에서 벗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그 자체를 주제로 심화한 것이었다.
각주
- ^ 본래 2016년 12월 10일에 임시 건립할 예정이었으나 11월, 베를린 인근에 영구 건립지가 날 수 있다고 해서 임시 건립 계획이 취소되었고 다음 해인 2017년 3월 8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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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상만사 새옹지마 -독일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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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소녀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건립되었을까. 이 글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녀상 건립이 공론화된 2016년부터 지금, 여기 이 쉼표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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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세기의 침묵, 억압된 기억, 지각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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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청산과 화해에서 독일은 일본의 대립 모델로 여겨진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글은 나치 정부로부터 피해입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 글쓴이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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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당시 엄마 배 속에 있던 경자년 생. 분지인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 칠곡군 왜관, 약목을 거쳐 10대 초반에 부산으로 가서 20대 초반에는 회 맛을 알았다. 부산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유학. 현대 독문학과 아동문학 전공, 연극영화TV학과 사회학을 부전공, 프랑크푸르트 대학 마기스터 과정을 졸업했다. 대구대학교와 부경대학교에서 잠시 강사 생활을 하며 『카프카 영화관에 가다』(1997, 영림카디널), 『섹스와 지성 (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러)』(1999, 한길사), 『한길로로로 잔 다르크』(1998, 한길사)를 번역했다. 1998년에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와서 지금까지 계속 거주. 재독 동포가 된 후에는 동포사회 매체에도 관여하고 이런저런 실무를 보았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독일어 강습을 하며 '풍경'이라는 한글문화신문을 발간했다. 2016년~2017년 프라이부르크 유럽 첫 소녀상 건립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독일추진위 조직을 주도한 후 대표의 간곡한 청에 따라 사무국장직을 임명받고 건립식까지 각종 업무를 전담하였다. 2017년 12월 풍경세계문화협회(https://www.punggyeong.org/)를 창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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