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연합군번역통역부 조사보고서 제120호
(ATIS Research Report No. 120)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는 몇 가지로 구분가능하다. 먼저 위안소를 만들고 운영한 주체였던 일본군이 생산한 자료가 있다. 당사자가 만들었기에 가장 정확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안소의 설치는 물론 운영 과정을 알려주는 적지 않은 자료가 발굴되어 그 실상을 이해하고 일본군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든 자료는 조직적 폐기 대상이 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아 있는 자료도 여러 사정상 발굴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 자료가 있다. 할머니들의 체험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확실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기억이 망실된 경우도 많고 또 개인의 체험이기에 전체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기도 하다. 또한 일각에서는 구술의 주관성을 문제삼기도 한다.
다음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연합군이 생산한 문서들이 있다. 연합군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일본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면밀한 심문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위안부’ 관련 정보가 입수되었다. 또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 중에 위안소 관련 내용이 확인되기도 했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호주, 중국 등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연합군은 모두 빠짐없이 ‘위안부’ 관련 문서를 생산했다. 심지어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지 않은 태국과 프랑스 군에서도 위안소 관련 자료가 만들어졌다. 이는 그만큼 위안소가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운영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연합군이 만든 자료는 크게 포로 심문보고서, 노획문서 번역 자료, 정보 보고서 그리고 특별 보고서 등으로 대별된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미국 남서태평양 사령부 연합군번역통역부(Allied Translator and Interpreter Section)에서 만든 조사보고서 120번(Research Report No. 120)이다.
이 자료는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 측에서 생산한 ‘위안부’ 관련 자료 중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자세하고 방대한 내용의 문서이다. 조사보고서는 최고 사령관 맥아더까지 보고되는 연합군번역통역부의 가장 비중있는 문서였으며 그만큼 정보의 정확성과 내용상의 풍부함이 여타 자료들을 압도한다.
특히, 이 보고서는 1945년 2월과 11월 두 차례 생산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가 된다. 두 판본의 차이는 위안소에 집중되어 있는데, 1945년 8월 일본 패망과 전후처리가 중요한 변수로 매개된다. 즉 전중(戰中)과 전후(戰後)라는 정세가 두 판본의 차이를 만든 결정적 요소였다. 요컨대 이 보고서는 전중과 전후에 걸친 연합군의 ‘위안부’ 문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1. 자료 발굴 및 수집 경위
이 자료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1992년이다. 자료 공개의 배경은 1989년 히로히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대와 관련된다. 한국에서는 조문사절 파견을 놓고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이른바 ‘쇼와시대’의 전쟁 책임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90년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는 민간업자의 소관이기에 정부 차원의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일본군의 관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고 1990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결성과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대(中央大) 교수의 자료 발굴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미 캔사스대 굿맨(Grant K. Goodman) 교수가 자신이 군대 시절 확보했던 보고서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1992년 2월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사 워싱턴 지국을 통해 공개된 제120호 보고서는 일본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후 요시미 교수에 의해 1992년에 발간된 『종군위안부자료집』(『從軍慰安婦資料集』, 大月書店)에 수록되어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자료집에는 보고서 전체가 아니라 위안소 관련 부분만 선별되어 일본어로 번역 수록되었다.
그런데 제120호 보고서의 최초 발굴자는 따로 있었다. 1992년 1월 28일 국사편찬위원회가 입수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에 이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를 발굴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한 사람은 다름아닌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였다. 방선주 박사는 한국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와중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도 발굴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제120호 보고서 중 1945년 11월 15일자 보고서(이하 11월 판본)는 미 국립기록문서청의 네 곳의 자료군(Record Group 이하 RG)에서 확인가능하다. RG 165, 331, 407, 554가 그것인데 이외에도 맥아더 기념관 RG 3에도 소장되어 있다. 1945년 2월 16일자 보고서(이하 2월 판본)는 RG 554에서만 확인가능하다.
2. 자료 생산과정
조사보고서는 남서태평양총사령부와 연합군최고사령부 수뇌부에게 보고되는 최고의 자료였다. 조사보고서는 애초 ‘정보회보’(Information Bulletin)라는 제호로 발간되다 1944년 6월 30일 이후부터 조사보고서로 개칭되었다. 이 자료는 포로 등을 통해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 수행상 필요한 특정 주제에 관한 조사와 분석을 시도한 문서이다. 따라서 보고서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군사관련 내용들이었다.
주목해야 될 보고서 중 하나는 일본군의 전쟁법 위반 문제를 다룬 제72호 보고서이다. ‘일본의 전쟁법 위반’을 주제로 한 이 보고서는 1944년 4월 29일 처음 발간되었고 이후 1945년 3월 19일과 6월 23일 두 차례에 걸쳐 보충본이 나왔다. 일본군의 불법 살해와 연합군 포로 학대, 성폭력 문제 등을 다룬 이 보고서는 내용상 제120호 보고서와 가장 근접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물론 이 보고서에 일본군 ‘위안부’나 위안소 관련 내용은 전혀 없지만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는 맥락에서 연결될 수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한 가지 검토해야 될 문제는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가 일본군의 전쟁법 위반을 다룬 제72호 보고서가 아니라 ‘일본군의 편의 위락시설’(Amenities in the Japanese Armed Forces)이라는 제목의 제120호에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1945년 시점까지 연합군 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전쟁범죄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그러나 1945년 초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일본군 위안소와 ‘위안부’를 중요한 정보로 인지하고 비교적 소상하게 보고서에 포함시켰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자료는 두 개의 판본이 있다. 11월 판본은 위안소 부분 서술이 대폭 강화되고 확대되었으며 특히 위안소 설치 및 운영규정을 포함한 일본군 노획문서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문서 분량도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 2월 판본은 22쪽인 반면 11월 판본은 42쪽에 달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두 문서를 생산한 연합군번역통역부의 소속이 바뀐다는 점이다. 2월 판본은 남서태평양지역사령부(SWPA Hq.) 산하였고 11월 판본은 연합국최고사령부(SCAP) 산하였다. 두 사령부 모두 맥아더가 사령관이었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기는 했지만 전자는 전쟁을 수행중이었고 후자는 일본의 패전 이후 전후 처리와 일본 점령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정세 하에 있었다고 하겠다.
2월 판본은 치열한 전투가 진행중이던 상황 하에서 일본군에 대한 다양한 정보수집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정세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11월 판본은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2월 판본과 구별된다. 그렇다면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전쟁이 종료된 마당에 굳이 11월 판본을 간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월 판본과 11월 판본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위안소 관련 부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연합군 번역통역부가 11월 판본을 간행하게 된 1차적 이유는 전범재판 관련 자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전범재판은 미국의 전후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2차대전 전후 처리를 주도하게 된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휴머니즘과 같은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신의 대외 정책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연합국은 이미 1943년 10월 연합국전쟁범죄위원회(United Nations War Crimes Commission, 이하 UNWCC)를 조직해 추축국의 전쟁범죄를 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UNWCC는 독일 나치의 전쟁범죄를 주요 대상으로 하여 활동했다. 이에 중국의 강력한 요구와 함께 일본군의 미군 및 연합군 포로 학대 정보가 확인되면서 1944년 8월 남서태평양사령부 차원의 전쟁범죄위원회(War Crime Board, 이하 WCB)가 조직되었다. WCB 구성을 주도한 것은 맥아더의 정보참모였던 윌로비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11월 판본은 전범재판 책임을 맡고 있는 연합국최고사령부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다고 판단된다. 정식명칭이 극동 국제군사재판인 도쿄 전범재판은 1946년 5월 3일 시작되어 1948년 11월 12일까지 진행되었다. 1945년 말경은 전범재판을 위한 제반의 준비가 시급했던 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제120호 보고서는 전범재판에 활용되지 못했다. 이는 11월 판본이 실제 활용과는 무관하게 전범재판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생산된 자료임을 설명해준다고 판단된다.
목차
제 I부 주보
제 II부 오락
제 III부 뉴스
제 IV부 우편
제 V부 결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링크이동)에서 해당 조사보고서의 목차와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자료 내용
제120호 보고서는 매점(Canteen stores), 오락(Amusements), 뉴스(News), 우편(Mail), 결론(Conclusion)의 5장 체제로 작성되었다. 위안소는 제2장 오락의 제9절로 배치되어 있다. 체육, 영화, 게이샤와 연예단, 휴가 등이 제2장의 나머지 절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장과 절의 배열은 2월 판본과 11월 판본이 동일하다. 먼저 두 문서의 내용상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문서의 차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위안소 관련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소 이외의 서술상 차이다. 전자의 차이는 매우 크며 사실상 11월 판본이 나오게 된 실질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위안소 관련 부분의 차이를 살펴보자. 두 문서 모두 제2장 오락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 일반 항목에서 위안소 소유 상황에 대한 기술이 나타나는데, 2월 판본에서는 포로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정부가 위안소를 소유하고 통제한다고 진술한 포로가 있는가하면 다른 포로들은 사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문서 작성자들은 더 이상의 분석을 진행하지 않고 다만 두 의견이 엇갈린다는 서술로 갈음했다.
반면 11월 판본에서는 포로들 사이에 이견이 있음을 전제하면서 버마에서 체포된 위안소 주인의 진술과 남서태평양 지역에서 노획한 위안소 규정에 따르면 위안소가 사적으로 소유되었으나 군의 감독 하에 있었다는 기술을 추가했다. 확보된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위안소의 소유 및 운영 상황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판단이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즉 군 직영과 사설 위안소가 공존하되 사설이라 하더라도 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제2장의 제9절 위안소 항목에서의 차이를 보자. 먼저 제9절 위안소의 하위 항목 구성이 약간 변화하는데 2월 판본은 a. 버마, b. 수마트라, c. 남서태평양지역 등 세 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으나 11월 판본에는 a. 규정(Regulations), b. 버마, c. 수마트라, d. 남서태평양지역으로 배열되어 총 네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판본의 제9절의 차이는 a. 규정과 b. 버마 두 항목에 집중되어 있다. 나머지 차이는 11월 판본 d. 남서태평양 지역에서 포로 진술 사례 하나가 추가된 것이 전부였다. 요컨대 두 문서의 차이는 노획한 위안소 규정과 버마 지역 위안소 업주의 진술에 따른 셈이었다.
두 문서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부분은 결론부이다. 2월 판본은 결론에서 ‘군 당국의 인가를 받은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다’고 기술한 반면 11월 판본에서는 ‘군 당국의 인가를 받은 위안소가 엄격한 규정 하에 설치되어 있다’라고 서술했다. 즉 문서화된 위안소 규정을 입수한 이후의 인식 변화가 반영된 기술이었다.
마지막으로 두 문서의 중요한 차이는 2월 판본에는 없었던 첨부 문서가 11월 판본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첨부 문서는 A와 B 두 개인데, A는 마닐라 위안소 설치 및 운영과 관련된 서류들이고 B는 마닐라 위안소에 관한 경찰 보고서이다. 두 개의 첨부 문서는 일본군 및 경찰이 직접 생산한 문서들을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영역한 것이다.
다음으로 문서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2월 판본의 위안소 서술은 전량 포로들의 진술에 의거했다. 이에 반해 11월 판본은 노획한 위안소 규정문서와 위안소를 직접 운영한 업자의 진술을 보강하여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으로 11월 판본을 중심으로 제120호 보고서의 위안소 부분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a. 규정 항목은 상하이 지역으로 추정되는 남부 지구, 타클로반, 브라우엔, 라바울 등 다섯 곳의 규정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총 다섯 곳의 규정문을 함께 모아놓은 자료는 11월 판본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군 위안소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다섯 개 규정 중 가장 분량도 많고 자세한 것은 마닐라 지역의 규정이다. 이 규정집은 위안소 설치와 운영 전반에 관한 거의 모든 세세한 규정들을 담고 있기에 현재까지 발굴된 위안소 관련 규정으로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이 규정집만 꼼꼼하게 살펴봐도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의 대강을 파악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이 규정은 마닐라 병참지구대 소속 육군 중좌 오니시(Onishi)가 1943년 2월 발행한 ‘마닐라의 인가 음식점과 위안소 규칙(Rules for Authorized Restaurants and Houses of Prostitution in Manila)’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영역한 것이다. 제1부 총칙, 제2부 영업, 제3부 운영, 제4부 위생, 제5부 규율, 제6부 특별클럽 규정 등 총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칙부터 규율까지 모두 37개의 세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제6부는 별도의 15개 조항을 두고 있어 도합 52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설치와 영업 중지, 폐업 그리고 그에 따른 손해 보상까지 전적으로 일본군의 책임으로 처리된다는 총칙의 규정 내용을 보면 위안소가 일본군의 부대시설이었음이 명백하게 입증된다. 영업 항목에서는 개업허가신청서를 비롯해 총 4종의 서류가 구비되어야 개업허가가 가능하도록 규정했으며 종업원의 교체까지 일일이 허가를 맡도록 명시했다. 나아가 군 소유 건물 수리도 허가사항이었고 대기실 규약과 요금표는 물론 심지어 타구(唾具, cuspidors) 설치까지 규정되어 있다.
운영에 있어서도 영업 시간 및 요금은 물론 업주와 위안부의 수익 배분 비율, 질병 치료비 부담 비율, 저축까지 규정해놓은 것은 위안소가 독립적인 민간시설일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매일 보고서를 비롯해 매월 말일에는 영업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위생 부분 역시 청결, 세척, 소독을 매우 강조하면서 생리 중 성교 금지, 매일 목욕, 침구 청결 등에 대한 세세한 규정을 잊지 않았다.
규율 부분 역시 위안소의 운영과 사용 시 지켜야 될 자세한 규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위안부’의 이동 금지, 주류 반입 금지, 콘돔 사용 의무 등이 규정되었고 심지어 입맞춤 금지 조항까지 삽입되어 있다. 위안소는 운영자와 ‘위안부’는 물론 이용자인 병사들까지 포함해 위안소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군 당국의 직접적 통제 하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판단된다.
두번째 항목인 버마 지역의 내용은 주로 포로가 된 위안소 업주 심문내용에 기반했다. 이 자료는 위안소 설치와 운영이 일본군은 물론 조선총독부까지 포함한 일본의 국가 전체가 관여되는 과정이었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즉 식민지 조선에서 703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과 출국, 군사령부가 제공한 무료 항행권으로 해군 호송선 7척의 호위를 받으며 대만과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버마에 도착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조선, 대만, 싱가포르, 버마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 제국 전체가 동원된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부록 문서를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부록 A는 마닐라 위안소의 구비서류들이다. 개업허가 신청서를 위시해 서약서와 이력서, 종업원 명단 양식, ‘위안부’ 인가 신청서와 퇴소 허가 신청서, 수익 일계표, 일일 및 월례 보고서와 검진표 등 위안소 설치, 운영과 관련된 제반 서류가 꼼꼼하게 구비되어 있다. 총 14종에 달하는 서류 양식은 매우 세세하다. 예컨대 수익 일계표를 보면 고객을 계급별로 구분하여 시간과 인원 및 요금을 기재하여 총계를 내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서류 양식들은 위안소가 야만의 산물이자 근대 국가의 ‘합리적’ 기획물임을 동시에 보여준다. 위안소는 20세기의 야만적 현상을 집약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주로 사회적 최약자 중의 하나인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하여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야만성을 상징해준다. 그러나 그 야만이 근대국가의 합리적 관료제에 기반했음도 분명했다. 이 서류양식들은 위안소의 기획, 모집, 수송, 운영 등 전 과정은 일본의 국가이성이 ‘합리적’으로 작동한 결과였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부록 B는 마닐라 위안소에 대한 경찰 보고서이다. 주지하듯이 제국주의 일본은 위생경찰 제도를 채택했는데, 이 보고서도 위안소에 대한 위생경찰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마닐라에는 총 17개소의 군 위안소가 있었고 하사관・병사용 위안소의 ‘위안부’는 1,064명이었다. 장교용의 ‘위안부’는 119명으로 총 1,183명에 달했다. 위안소에 대한 일반 소견을 보면 “많은 업주들은 자신만의 이익 이외엔 아무 관심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위안부’들의 생계나 위생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고 질타했다. 경찰의 결론은 “업주들의 이기적인 처사는 억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조사보고서 120호는 지금까지 발굴된 영어로 생산된 문서 중 가장 방대하고 종합적이며 자세한 자료이다. 두 번에 걸쳐 발행될 정도로 연합군이 ‘위안부’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즉 전쟁범죄 재판을 위해 이미 발간된 자료를 보완하여 재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자료는 연합군이 만든 문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본군이 직접 생산한 문서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요컨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합군의 시각과 함께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실태를 함께 보여주는 드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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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황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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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한국의 근대적 변화과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관련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aviantibj@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