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흔적에도 암바라와 성은 조선인 ‘위안부’를 기억할까

  • 탐방
  • 소현숙
  • 2026-01-14
암바라와 성 옛 모습 (사진 제공 : 이태복 작가)
01
02

사라진 흔적에도 암바라와 성은 조선인 ‘위안부’를 기억할까
인도네시아 ‘위안부’ 유적지 탐방기(2)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해에 이어 해외 연구출장을 수행했다. 올해의 대상지로 선정된 곳은 인도네시아였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후 아시아 곳곳에서 줄이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에 대한 현황 조사 결과 인도네시아에서는 약 1만 9천여 명의 여성들이 피해자로 등록해 규모 면에서 가장 ‘압도적’이었으나 이후 사회적 관심이 빠르게 줄어 그 배경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주요 연구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수도 자카르타에서 시작해 중부 자바 스마랑의 조선인 ‘위안부’ 유적지 암바라와 성을 거쳐 인도네시아 피해 생존자가 있는 솔로 지역까지 이어진 학술 탐방기를 2회에 나누어 정리한다

1부 : ‘국민기금’으로부터 또 다시 외면당한 인도네시아 피해자들
2부 : 사라진 흔적에도 암바라와 성은 조선인 ‘위안부’를 기억할까

 

 

인도네시아 ‘위안부’ 유적지 탐방 둘째날, 조선 여성들이 ‘위안부’ 생활을 했던 암바라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부 자바의 중심 도시 스마랑으로 이동하기 위해 이른 새벽 국내선에 올랐다. 자바섬은 내부 교통이 비교적 발달했지만 대각선으로 긴 형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요 도시라면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이었다. 스마랑에서의 동선은 위안소가 운영됐던 암바라와 성을 둘러보고, 다시 자동차로 1시간 반 거리인 솔로로 이동해 지역 활동가와 피해 생존자를 만날 예정이었다.

전쟁 당시 위안소가 있었던 암바라와 성 유적 답사는 인도네시아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다룬 소설 『암바라와』를 쓴 이태복 작가가 동행하였다. 시인이자 인도네시아 살라띠가 사산자바문화연구원의 원장인 이태복 작가는 2014년 한인신문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스마랑까지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와 포로감시원의 역사를 접한 것을 계기로 그들이 거주했던 암바라와 성 수용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후 수년 간 피해 생존자를 만나 직접 증언을 듣고 위안소 유적지를 확인하는 한편 포로감시원으로 지내다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한 이들의 생애까지 조사했다. 한국 정부나 학계의 체계적인 조사가 부족한 상황을 고려하면 더 귀할 수밖에 없는 조사 작업인데, 이 작가가 이때의 현장 조사 기록을 녹여 펴낸 소설이 『암바라와』였다. 답사팀이 방문했을 때도 이 작가는 인도네시아 한인회, 한국문인협회 인도네시아 지부 작가들과 함께 ‘위안부’ 문제와 대한독립청년당의 활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사진 1]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답사팀은 이태복 작가의 안내로 답사를 진행했다. (촬영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하얗게 단장한 암바라와 성 위안소 유적지 앞에서…

중부 자바의 넓은 평지에 세워진 암바라와 성은 먼저 강렬한 붉은 색으로 다가왔다. 세월의 풍화를 겪으며 많은 곳이 허물어졌음에도 당시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1845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 정부가 자바를 통치하던 시절 완공된 암바라와 성은 자바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군사적 거점이었다. 이중에서도 암바라와 성은 네덜란드군의 주둔지이자, 반식민 저항 세력의 봉기를 막는 방어 기지로 역할한 만큼 유럽식 군사 요새 양식을 따른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 성에는 두꺼운 벽과 성문, 감시탑이 자리잡고 있었고, 일부 구역은 병영과 무기고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 1942년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게 되면서 암바라와 성은 일본군의 군사 시설로 바뀌었다. 일본군은 이 요새를 군사 주둔지와 포로수용소로 활용했고, 암바라와 동쪽 출입문 쪽에는 위안소를 만들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자바에 끌려온 조선인 여성이 150명에 달하고, 암바라와 성에 억류돼 갖은 고초를 겪었을 ‘위안부’만도 최소 13명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는 또 감옥과 강제 노역 현장 등에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로 동원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도 있었다. 그 중 일부가 고려독립청년당 결성에 가담했고, 1945년 1월 무기고에서 기관총과 탄환 등을 탈취해 일본군에 저항하다 자결한 재외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 패전 후 포로감시원들이 피할 수 없었던 아픈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일본군의 명령으로 최일선에서 연합군 포로 통제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포로 학대의 책임이 전가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 주도로 열린 전범 재판에서 하급자인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책임을 회피한 일본군을 대신해 BC급 전범으로 재판받고 처벌을 받아야 했다. 어디서건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그들은 조선인이었다.

걸음을 옮겨 암바라와 성으로 좀 더 다가갔다. 하얀 외벽의 깔끔한 건물들이 먼저 방문객을 맞았다. 안타깝게도 답사팀이 암바라와 성을 방문했을 때는 전후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돼 있다가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한 리노베이션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출입도 제한적이었다. 위안소로 사용되던 공간은 유적지 초입에 있었다. 그 사이 낡고 더러운 채로 방치되다 화장실과 창고, 가축우리 등으로 사용되던 위안소 또한 새 단장을 하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무 창살 너머 위안소가 있던 공간 안을 들여다 보았다. 역시 세월의 흔적까지 페인트 칠로 덮인 상태였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하얀색 페인트로 마감된 공간 위로 이태복 작가가 기록한 사진 속 황폐한 위안소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지워지고, 역사 또한 잊히는 걸까. 앞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이 공간에 깃든 비탄한 시간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사진 2] 암바라와 성 옛 모습 (사진 제공 : 이태복 작가)

 

[사진 3] 리모델링으로 깨끗하게 단장한 암바라와 성 전경 촬영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사진 4] 리모델링한 암바라와 성 (촬영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사진 5] 암바라와 위안소 과거 모습 (사진 제공 : 이태복 작가)

 

[사진 6] 암바라와 위안소 현재 모습 (촬영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청춘을 유린당한 채 끝도 없이 살았지”

답사팀에게 긴 시간이 허용되지 않아 안쪽으로 형태만 남은 수용소 건물과 성병 검진소 등을 빠르게 둘러 보았다. 이 작가는 건물 밖으로 나온 답사팀을 비교적 초입에 자리한 평평한 제단 앞으로 안내했다. 인도네시아 한인 사회에서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 공원을 만들려는 계획이 추진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추모비는 이미 완성되었지만, 암바라와 성을 관리하는 인도네시아 군 당국과의 협의가 아직 끝나지 않아 비석을 옮기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샛별의 기도 

사랑하는 조국을 등지고 
청춘을 유린당한 채
끝도 없이 살았지
그날의 암바라와
여기는 숱한 울분을 삭히며
꽃다운 영혼이 머물던 자리
남루한 육신은 빗물에 젖고
섬돌에 앉아 바라 본 처마 끝
반짝이던 샛별은 
감기는 눈꺼풀을 일깨우며
조국이 해방되던 날의
열화같은 함성을 들으라 한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추모비에 새겨진 시를 읽노라니 머나먼 이역 땅으로 끌려와 역사의 수렁 속에서 청춘을 갈아 넣어야 했던 이들의 기구한 삶이 사무친다. 이들 또한 우리와 다름없는 샛별 같은 청춘이었을 터...이 추모비라도 있으면 그 서러운 마음에 위로가 될까. 하루빨리 추모비가 설립되어 흰색 페인트가 덮어버린 역사의 무게를 방문객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길 기대하며 암바라와 성을 나섰다.

 

[사진 7] 태평양전쟁희생자 추모비와 이를 제작한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한인회 (사진 제공 : 김주명)

 

 

 

가족의 반대로 무산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만남

어둠이 진하게 내려앉은 시간까지 이어진 둘째 날 답사를 마치고, 셋째 날은 솔로로 이동했다. 솔로는 작은 도시지만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중부 자바 왕국의 수도였던 덕분에 인도네시아 전통 문화와 예술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꼽혔다. 이곳에서 답사팀은 또 다른 병보협의회 활동가 마리오 씨를 만난 다음 함께 그 지역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약속 당일 피해 생존자의 아들이 어머니와 인터뷰를 반대해 만남은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도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에서도 피해자가 과거의 피해 사실을 공표하는 것에 대한 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은가 보다. 당황한 마리오 씨가 멀리서 날아온 우리를 위해 급하게 인근에 거주 중인 또 다른 피해 생존자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주 몸집이 작고 연로한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라 인터뷰를 이어가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미즈노 코스케(水野広祐) 교수에 따르면 현재 ‘위안부’ 피해자가 가장 많이 생존해 있는 곳 또한 인도네시아이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만 한국에 비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지 않은 탓에 피해자의 증언을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 그 역사를 보존해 후손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도 몇몇 지원단체가 있기는 하지만,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 사회적 관심이 점차 식으면서 지원단체의 활동도 전반적으로 활기를 잃은 듯하다. 물론 인도네시아에서도 학교 역사 교육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과의 전후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이라  ‘위안부’ 관련 자료의 수집이나 유적 보존에 소극적이었다. 다만, 최근 사회부가 아시아여성기금 지급과 관련해 피해자 지원단체와 협의를 재개하려는 전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아픈 역사 공유하는 인도네시아와 협력을 기약하며

한국에 비해 20~30대 연령층 비중이 높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활력이 넘치는 젊은 나라다. 출장 기간 내내 곳곳에서 마주한 인도네시아인들은 선한 얼굴에 정이 많고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짜증이 날 만한 더운 날씨에도 웃음이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밝은 에너지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 역사의 정의와 평화가 살아 숨 쉬고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는 아시아의 미래를 다시 한 번 상상했다. 아직은 ‘먹고 사는’  기본 생계 문제가 급선무라 과거의 역사 문제에 관한 인식이 낮은 편이지만, 시간이 지나 여성의 인권과 평화에 대한 인식이 확산,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 일본군‘위안부’ 역사에 관한 관심도 커지리라.
더욱이 일제 침략과 ‘위안부’ 동원이라는 아픈 역사를 공유하는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경제적 협력뿐만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미래를 함께 모색해 나갈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만큼 이번 인도네시아 연구출장은 아시아 피해국의 ‘위안부’ 문제 연구자, 활동가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류를 축적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향후 ‘위안부’ 운동에서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변화를 주도해가는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연구소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여러 고민을 가득 안고 돌아온 귀국길이었다.

 

 


명복을 빌며 평안을 기원합니다

지난 10월 23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인도네시아 학술 답사에서 스마랑 암바라와 성 위안소 유적지와 고려독립청년당이 활동한 현장을 안내해주신 이태복 작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사산자바문화연구원 원장으로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과 함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의 역사 현장을 조사해 소중한 기록으로 남겨주신 이태복 작가님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원한 평안을 얻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글쓴이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연구팀장
  • 글쓴이 웹진 <결>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