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내내 30도를 웃도는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는 곳. 적도 근처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방문은 처음이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학술연구팀과 아카이브팀이 연합해 인도네시아의 피해 생존자와 단체 활동가, 연구자 등을 만나 인도네시아 일본군‘위안부’ 관련 전반적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출장이었다. 계획을 세울 때부터 더위 속에서 이뤄질 조사 일정, 더욱이 4박 6일 동안 자카르타와 중부 자바 암바라와, 솔로 지역을 넘나들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라 솔직히 걱정이 앞선 출장이었다.
우리나라엔 세계적인 휴양지 발리로 더 친숙한 인도네시아는 중세 때부터 ‘많은 섬들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누산타라(Nusantara)’라 불렸는데, 무려 1만8천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면적으로 비교하면 대한민국의 20배나 되는데, 사람이 사는 섬은 900여 개로, 인구의 80%가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에 거주하고 있다. 1973년 수교한 인도네시아에는 현재 약 5만여 명의 한국 교민과 2,2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K-팝 등 한국의 대중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3면이 바다에, 유무인도를 합해 3,500개에 육박하는 섬을 아우르는 우리와 해양 국가라는 정서와 함께 한국 못지 않게 굴곡진 역사를 지닌 나라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을 서구 제국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군에 점령됐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 정치의 지배 아래 기나긴 시간을 통과해온 ‘닮은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7세기부터 300년 넘게 네덜란드에 의한 식민 통치가 이어진 이곳에 일본군이 진주한 것은 1942년 초였다. 네덜란드군을 물리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점령지 곳곳에 주둔한 군대를 위해 위안소를 설치했다. 이 위안소에서 인도네시아 여성은 물론 머나먼 이국땅까지 끌려온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여성이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한국 인천에서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까지 비행기로 7시간, 이곳에서 조선인 여성 ‘위안부’가 머물렀던 중부 자바 암바라와까지는 국내선 비행기로 다시 3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거리, 당시에는 얼마나 걸려 도착했을까. 풍경과 공기, 모든 것이 달랐을 낯선 곳에 도착한 조선 여성들이 느껴야 했을 공포와 막막함을 상상하니 벌써 숨이 막혀 왔다.
자카르타에서의 첫날은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근처에 자리 잡은 한·인니문화연구원을 방문으로 시작됐다. 해외동포 한국교육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 사회과 교사로 인도네시아 한인 공동체 활동을 활발히 했던 사공경 원장과 향후 업무 협력에 대해 논의한 뒤 이번 연구출장의 첫 주요 일정인 사파리 씨와 만남을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사파리 씨는 인도네시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전 병보종군위안부연락협의회(前 兵補從軍慰安婦聯絡協議會, 이하 병보협의회) 자카르타 지부에 소속돼 있다. 1991년 한국에서 김학순이 자신의 피해를 공개 증언한 뒤 그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많은 아시아 피해국에서 ‘위안부’ 피해를 밝히는 여성들의 증언이 뒤를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마르디엠을 비롯한 피해 생존자가 증언에 나섰고, 1993년부터 진행된 피해자 등록 작업 결과 약 1만 9천여 명의 여성들이 이름을 올렸다. 당시 그 피해자 등록 활동의 중심에 병보협의회가 있었다.
1942년 전쟁 당시 일본군 보조병력과 노동력으로 동원된 ‘병보(헤이호. Heiho)’였던 사파리 씨의 아버지는 ‘종군위안부’와 함께 전후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해왔고, 그의 사후 사업을 하던 사파리 씨가 이를 이어받아 협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답보 상태가 오래 지속된 탓일까, 왜소한 체구에 삶의 고단함이 잔뜩 묻어 있는 얼굴을 한 사파리 씨는 가져온 자료를 펼쳐 보이며 협의회의 활동에 대한 소개로 말문을 열었고, 곧 현재 인도네시아의 피해자들이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요구사항을 전했다. 피해자들이 다수 사망한 현재, 협의회 활동은 피해자 유족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주요 이슈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하 아시아여성기금)’의 지급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를 상대로 아시아여성기금을 피해자 개인에게 지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아시아여성기금에 관한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알려져 있는 것처럼 1995년 일본에서 설립된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지원하기 위해 민간 모금 형식으로 만든 기금이었다. 하지만 도의적 책임 운운하며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피해 생존자 지원단체들의 반발을 샀고, 한국과 대만에서는 피해자 다수가 수령을 거부했다.
문제는 이처럼 한계가 뚜렷한 아시아여성기금을 인도네시아 정부가 수령하면서 배태되었다. 아시아여성기금이 논의되던 당시 일본과 협력관계를 우선시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노력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정권을 잡고 있었던 수하르토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민간단체와 법률가 그룹을 위험시하였고, 아시아여성기금과 관련해 “국내의 사회적·종교적 사정 또는 피해자의 인정 작업이 불가능한 상황”을 들어, 그러니까 피해 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는 모든 사업에 반대했다. 그리고는 아시아여성기금을 피해자 개인에 대한 지급이 아닌 양로원의 설립을 지원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다.
1997년 3월 21일 일본 하시모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 편지를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보낸 후 인도네시아 사회부와 ‘인도네시아에 있어서 고령자를 위한 사회복지서비스 증진’에 관한 각서를 체결하고 아시아여성기금이 ‘10년간 총액 3억 8천만 엔의 사업자금을 인도네시아 사회부에 주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97년부터 10년 동안 ‘고령자 복지시설’ 정비사업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졌고, 2007년까지 고령자 사회복지시설 69개소가 건립됐다. 이는 당시 인도네시아 고령자 사회복지시설의 29%에 해당하는 큰 규모였다. 이는 곧 개인 지급을 바란 피해자들의 요구를 냉정하게 내친 결과였다.
물론 1만 명이 넘는 피해자 개인들에게 피해 확인을 바탕으로 기금을 일일이 지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를 외면한 이러한 조치는 결국 기금 사업이 만료된 지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개인 지급을 요구하는 운동을 계속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아시아여성기금을 둘러싼 논란은 피해자의 상당수가 수령을 거부한 한국의 상황과도 사뭇 달라서 아시아에서 ‘위안부’ 피해 배상 문제와 관련해 현실 정치의 복잡하고 씁쓸한 면모를 엿볼 수 있기도 했다.
2025년 초 문제 해결을 위해 인도네시아 사회부 장관을 만난 사파리 씨는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써서 피해자들의 뜻을 전달하고 정부 측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활동에 한국의 피해자와 지원단체, 시민들이 연대해달라고 요청했다. 가해국인 일본은커녕 자국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들이 합당한 사과를 받고 피해 배상을 받는 날은 언제쯤일까.
활동 자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던 사파리 씨가 인터뷰 말미에 무게 때문에 챙기지 못한 추가 자료에 대한 이야기를 비쳤다. 일본군‘위안부’ 아시아 피해국 관련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공개할 수 있는지 물었다. 사파리 씨는 흔쾌히 가능하다고 밝혔다. 다행히 사파리 씨의 집은 인터뷰 장소와 멀지 않았다. 사파리 씨는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좁은 골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걷다 보니 지나는 길에 평화롭게 쉬고 있는 고양이가 많았고, 닭도 자유로이 오가고 있었다. 집 문 앞에서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어느 나라나 어린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파리 씨의 집은 골목의 끝이었다. 따라 들어가니 창문이 없는 아담한 거실로 바로 연결됐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집은 바깥공기가 차단된 기다란 굴 같은 구조였다.
사파리 씨가 종이 상자를 들고 나왔다. 내놓은 상자에 담긴 자료들은 1990년대 이후 병보협의회 등에서 생산한 ‘위안부’ 지원활동 관련 자료들이었다. ‘이렇게 역동적으로 활동하던 시기가 있었구나!’ 향후 인도네시아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역사 연구에 요긴한 자료일 것이다. 바닥에 놓인 여러 자료가 전하는 이야기를 살펴보는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선한 얼굴의 사파리 씨는 언제든 자료가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집을 나서는 우리를 배웅했다. 병보협의회 활동을 응원한 우리는 추후 자료 수집을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갈 것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