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 2세 박수남 감독은 1960년대에 논픽션 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반세기 넘게 글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해 강제징용과 원폭 피해자 등 남한과 북한, 일본 역사의 틈새에서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이들을 기록해 왔다. 그리고 딸 박마의 감독도 어머니 박 감독 곁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 감독이 평생 촬영한 10만 피트, 약 50시간 분량의 16mm 필름을 박마의 감독이 디지털로 복원하며 탄생했다. 필름에는 제암리 학살 사건 생존자부터 군함도 강제노역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등 일제의 폭력 속에서 고통받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모습이 담겼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돼 비프메세나상을 받은<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이듬해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영화제에서 상영과 수상을 이어가고 있다. 극장 개봉은 한국에서 2024년 11월, 일본에서 2025년 8월 이뤄졌다. 한국보다 아홉 달 늦은 개봉이었지만, 키네마 준보 영화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등 일본의 주요 영화상에서 다큐멘터리 부문상을 연이어 수상했고, 1년이 지난 2026년 8월 현재까지도 관객이 주도해 상영회가 계속되고 있다. 박마의 감독을 지난 8월 중순, 화상으로 만났다.
Q. 2025년 8월 개봉당시 일본 전체에서 도쿄와 요코하마 각 하나씩 단 두개의 극장에서만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공개되었는데도 관객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박마의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이 작품에 상을 수여하고, 개봉 당시 『키네마 준보』[1]에 글을 쓴 하라 가즈오 감독도 힘이 되었지만, 초반의 관심을 높이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양영희 감독의 역할이 큽니다. 개인적인 인연은 없고, 어머니의 이전 작품도 보신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시사회가 끝나고 나와서 어머니 손을 잡고 굵은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 뒤로 본인 말로 “인생 첫 오시카츠(推し活. 좋아하는 대상에 애정과 지지를 보내는 행동으로, 팬활동에 가까운 말)”였대요. SNS뿐 아니라 영화계, 연극계, 문학계의 인맥을 통해 “올해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하고 다니셨어요. 일본에서 영향력이 큰 분이라 “양영희가 권하는 영화면 봐야지” 하고 온 관객이 정말 많았습니다.
『키네마 준보』 문화영화 부문 1위와 마이니치영화콩쿠르 다큐멘터리상을 함께 받은 것도 컸어요. 두 상을 모두 받은 것은 오키나와전 다큐멘터리 <오키나와 우리즌의 비>(2015), 그리고 하라 가즈오 감독의 <미나마타 만다라>(2021) 밖에 없었는데, 이제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추가된 것이죠. 처음엔 이 영화가 일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걱정했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가해 역사와 책임을 고발하는 영화잖아요. 그 활동을 해온 박수남이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께 경의를 표했어요.
사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먼저 질문을 던진 쪽은 박마의 감독이었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그는 일본 각지의 관객 설문과 기고문, 신문 지면에 실린 글들을 미리 정리해 보내주며 한국의 관객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박 감독은 이 영화를 일본에서 1년 동안 극장에 붙잡아 둔 힘이 상보다는 관객에게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Q. 이전 작품들은 일반 극장 개봉 방식이 아니라 시민 ‘자주 상영[2]’ 형태로 관객과 만나왔지요.
박마의 : 맞아요. 어머니의 풀뿌리 활동은 지금까지 늘 일반 시민이 지탱해 줬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장애인학교의 세키야 선생님처럼 젊을 때부터 연대해 온 분들은 “이제야 박수남을 알았느냐, 늦었다”고 해요. 그러기까지 40년이니까요. 그래도 정말 기뻐해 주시죠. 사실 일반 상영관이라고 해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상영을 조직해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고 있어요.
Q. 관객들이 극장과 직접 교섭해 상영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고요.
박마의 : 영화관과 제휴해 예매권을 판매하고 홍보하는 활동도 굉장히 활발했어요. 와타나베 이치에라는 80세 작가가 계세요. 이분은 2011년 후쿠시마 지진과 원전 사고 피해자들을 지금까지 취재하고 있어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을 열고, 재판을 지원하기도 하면서 후쿠시마 사람들과 함께 활동해 왔죠. 이분이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벌써 열두 번 정도 보러 오셨어요. 그러다가 본인이 원전 피해자들과 함께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후쿠시마에 전하고 싶다고 하면서 직접 상영 실행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극장 ‘포럼 후쿠시마’ 지배인에게 “우리가 예매권 200장을 팔 테니 일주일 동안 상영해 달라”고 교섭했어요. 지배인이 승낙했고, 일주일 내내 시민들이 접수처에 스태프처럼 앉아 있었어요. <되살아나는 목소리> 서포터들도 아주 큰 역할을 해 주셨어요.
후쿠시마에서 한 관객의 감상도 마음에 남았어요. 원전 사고 뒤 딸과 함께 후쿠시마현 밖으로 피난한 이 여성은 “어느 시대나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피해는 보이지 않게 되고,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게 된다. 원전 사고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박수남 감독이 말하듯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하셨어요. 영화에서 서정우 씨의 아드님이 말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지금도 후쿠시마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강하게 공명한 것 같아요. 요코하마의 하마모토 씨도 있어요. 지난해에는 관객이었는데 올해 6월 요코하마의 다른 극장 ‘잭&베티’에서 상영될 때는 홍보의 중심이 됐죠. 관객이었던 분이 다음엔 전하는 쪽이 되어 연쇄가 이어지는 게 아주 든든해요.
Q. 다른 기억에 남는 관객을 꼽아 주신다면요.
박마의 : 나가사키는 영화관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상영을 추진하는 자주 상영회였는데, 실행위원장이 영화에 나오는 히라노 선생님이었어요. 실행위원 열다섯 분 대부분이 돌아가신 서정우 씨와 함께 1970년대부터 나가사키의 조선인 강제연행과 피폭 실태를 조사하고 알려 온 분들이었죠. 서정우 씨의 아드님도 위원이었고요. 250명이 왔어요.
그날 아주 인상에 남는 분이 있었어요. 나가사키 피폭 2세 여성으로, 저와 비슷한 50대인데, 어머니의 피폭 체험을 공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피폭 체험 전승자’로 활동하는 분이에요. 그분이 울면서 어머니를 찾아와 전승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강제연행과 피폭이 있었다는 걸 이 영화로 처음 알았다는 거예요. 게다가 자기 딸이 한국인과 결혼하는데, 결혼식이 하필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인 8월 9일이고, 한국 쪽 부모님을 곧 처음 만난다고요. 그분은 “영화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부모님께 감히 어떤 얼굴로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셨어요.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그 관객분이) 이 시점에 영화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모른 채 가족이 되는 것과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알고 가족이 되는 것은 다르다”고요. 저도 같이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Q. 피폭 전승 활동가가 그런 사실을 몰랐다니, 놀랍습니다. 일본에서 일반적인 인식인가요.
박마의 : 거의 그래요. 어머니가 <또 하나의 히로시마>를 만든 게 1986년이잖아요. 피폭자는 일본인만이 아니라는 걸 일본 사회에 알린 충격적인 영화였는데, 40년이 지나 세대가 바뀌니 지금은 다시 잘 몰라요. 재일조선인 피폭자가 있다는 것도, 남북으로 귀국한 피폭자들이 일본인과 같은 원호와 생활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요. 그래서 기뻤던 게 3월 히로시마 개봉 때 관객들이 “<또 하나의 히로시마>야말로 히로시마에서 극장 상영을 해야 한다”고 요청한 거예요. 극장이 응해서 7월에 일주일간 두 편을 앙코르 상영했는데, <또 하나의 히로시마>는 그때까지 극장 개봉을 한 적이 없어서 히로시마에서 처음 걸린 거였어요. <되살아나는 목소리>보다 관객이 많이 들었어요. 히로시마니까요.
Q. 새삼 1980년대에 발표된 <또 하나의 히로시마>가 선구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히로시마 상영도 관객들이 주도했나요.
박마의 : 히로시마는 도쿄 다음으로 관객이 많았습니다. 두 작품 상영을 합쳐 1,400명이나 와 주셨어요. 제 등을 밀어준 이는 히로시마에 사는 50대 초반의 재일조선인 3세 여성이에요. 피폭자는 아니에요. 히로시마에서는 매년 8월 총리가 참석하는 추도식이 열리고 평화운동이 가장 고조되는데, 조선인의 피폭 경험은 그 운동 속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오래 느껴 온 분이죠. 도쿄에서 영화를 보고 히로시마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보는 모임·히로시마’의 발기인이 됐어요. 그리고 재일조선인 2세 피폭자의 체험을 전승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같은 세대 일본인 여성도 합류해 함께 상영을 추진했습니다. 히로시마에는 평화운동 시민 그룹이 굉장히 많고, 민단과 총련도 피폭 문제에 각자의 입장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입장의 차이를 넘어 일단 “이 영화를 봐 달라”고 호소했고, 그 결과 극장에는 남북의 동포들이 함께 모였어요. 그분들이 “영화였기 때문에 하나의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그 모습에 저도 감동했습니다.
Q. 그렇게 확대된 상영으로 어머니 박수남 감독과 전국의 상영관을 다니고 계십니다. 1년을 돌아보면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박마의 : 상영회를 따라 거의 전국을 여행하고 있는데,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이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시대순으로 따라가는 영화잖아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그 시대 시대에 어머니와 함께했던 사람,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꼭 회장에 와 있어요. 어머니에게는 재회이고, 저에게는 새로운 만남이었죠. 어머니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따라가는 것 같은, 정말 흥미로운 발견이 많았습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분들이었나요.
박마의 : 예를 들면 어머니가 20대에 총련의 잡지 기자를 하시던 그때 후배였던 재일조선인 2세가 계셨어요. 지금은 80대인데, 도쿄 상영이 끝나자 손을 들고 “당신 어머니 내가 잘 알아. 미인이어서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었어” 하시면서 1950년대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도쿄에서 5월에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근처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는 그 학교 졸업생들이 왔어요. 사건 당시가 아니라 1980년대에 재학했던 여성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이진우 사건은 계속 금기였대요. 그런데 신문부에서 어머니가 쓴 『죄와 죽음과 사랑과』를 읽고 당시 신문을 모아 다 같이 사건을 공부했다는 거예요. 그 책이 자기 인생을 바꾼 책이었다고, 상영회장에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어요. 더 놀란 건 이진우를 변호했던 변호사의 아드님이 보러 오신 것, 그리고 그 동네에서 생선가게를 하던 집에서 자랐다는 분이 “이진우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생선을 사러 왔다”는 기억을 상영회장의 모두에게 이야기해 준 거였어요. 어머니가 30대 때 운영한 야키니쿠 가게 이야기가 나오죠. 1970년대에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와서 “그때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하며 그 시절을 이야기해요. 도쿄만이 아니라 간사이에서도, 후쿠오카에서도 그랬어요. 다들 이제 70대예요.
Q. 관객이 영화에 자기 기억을 보태는 셈이네요.
박마의 :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기억이 되살아나서, 작품 자체를 점점 성장시켜 준다고 할까, 더 부풀려 준다고 할까. 관객과 교류할 때마다 이 영화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역사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저 자신도 몰랐던 역사의 증인들이죠. 어머니도 굉장한 말씀을 하셨어요.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따라가는 것 같은 여행이다”, “영화 한 편이 더 나올 것 같다”고요. 한국 순회는 일주일로 짧았지만, 일본에서는 (추가되는 상영관에) 갈 때마다 귀중한 체험을 하고 있어요.
Q. 관객의 기억이 영화에 덧붙는 것에서 나아가, 지금 통역을 해주시는 이유미 선생님과 저도 함께했던 오키나와에서는 상영을 계기로 또 다른 일이 있었지요.
박마의 : 상영회만이 아니라 도카시키에서 약 30년 만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위령제를 할 수 있었어요. 복잡한 이야기지만, 위령비를 둘러싼 운동 내부의 여러 관계 속에서 어머니는 오랫동안 위령제에서 배제되어 있었거든요.[3] 갈등의 중심 인물들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 상태가 이어졌어요. 제막식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저희가 다시 주최하는 형태로 위령제를 치를 수 있었어요.
명예 회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저는 ‘원점의 회복’이라고 생각해요. 이 기념비의 원점은 1989년부터 박수남 감독이 전쟁 당시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와 군속들의 실태 조사를 시작한 데 있습니다. 그리고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로부터의 증언>을 만들었고, 영화가 완성된 해 오키나와의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 씨가 돌아가셨어요. 이후 영화의 지지자들은 비참한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벌이며 위령비 건립을 호소했습니다. 그동안에도 어머니는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일본에 국가배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투쟁에 함께하며 뛰어다녔고요.
이번 위령제에서 어머니가 “일본군의 범죄를, 그 역사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여성들에 이어 싸워나가야 한다”고 크게 선언하셨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30년 전 한국에서 위령비 제막식에 온 배봉기 씨의 유족이 유골을 꼭 끌어안고 있던 모습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이번에 처음 모인 많은 일본, 한국, 오키나와 시민들과 함께 이 비가 만들어진 목적을 나누고, 91세의 어머니와 위령제를 치를 수 있어 다시 원점에 설 수 있었어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무엇보다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박마의 감독은 현재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감독은 대화 끝에 현재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진단과 함께 “일본은 역사수정주의가 이겨버렸다”는 다소 충격적인 소회를 전했다.
Q. 세키야 선생님이나 와타나베 씨처럼 국가주의, 우경화와 맞서 오래 운동해 온 분들은 지금의 일본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박마의 : 만날 때마다 “점점 나빠진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해요. 아베 정권 이후 더 극단적으로 됐고, 다카이치 정권이 되면서 ‘위안부’ 문제는 역사수정주의가 이겨 버렸다고 할까요. ‘위안부’는 ‘날조’라는 극우 사상이 침투했다기보다 사람들의 관심 자체를 빼앗아 버렸어요. 미디어는 정권의 압력 때문에 보도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려던 교사들과 교과서 출판사들은 공격당해 교육 현장이 무너졌어요. 토양이 뭉개져 버렸죠. 그런 의식을 가진 분들이 이제 80대가 되어 해마다 줄어드니, 우리 세대가 버티지 않으면 바닥이 빠집니다. 사회 전체로 보면 군비 확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예전만큼 보이거나 보도되지 않는 것도 달라진 점이에요. 위기감을 갖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 위기감이에요.
Q. 그런데 보내주신 관객 반응을 읽으면 무력감보다 다른 것이 느껴집니다.
박마의 : 자랑은 아니지만,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일본에서 ‘힘이 나는 영화’예요. 가해의 역사를 들이대서 괴롭다는 감상보다, “힘을 받았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알았다”는 반응이 훨씬 많아요. 다들 힘이 났다고 말해 주는 게 기쁩니다.
Q. 마지막으로, 아직 남은 필름들의 복원과 이후 제작 계획을 여쭙습니다.
박마의 : 남은 필름이 30여 시간이에요. 서둘러 전부 디지털화해서 <되살아나는 목소리>에 이어지는 파트2를 만드는 게 목표예요. 도카시키에서 일부 공개한 오키나와전 증언에 대한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작품으로 공개하고 싶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서둘러 확인해 가며 만든 두 시간 반짜리 <누치가후> 2부 가편집본도 있습니다.
사실 도카시키에 갔을 때, 당시 어머니가 취재했던 증언자 대부분이 돌아가셨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저도 충격이 컸어요. 20년 전에 어머니를 친척처럼 따뜻하게 맞아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조선인 ‘위안부’나 ‘군속’에 대해 증언해 준 분들과 ‘집단자결’을 강요받고 살아남은 증언자들이에요. 어머니의 미공개 영상 상영회에는 ‘집단자결’에서 살아남은 주민 세 분이 찾아와 주셨어요. 그때 돌아가신 증언자들을 잘 알고 있는 97세의 치요 씨가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한테 “이 영상에는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이 전부 담겨 있다. 마을 사람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기록해 줘서 고맙다”고 하셨거든요. 그 순간 내가 진짜 무엇을 위해 필름을 복원하고 있는가 하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한국 분들과 위령제에서 기도드렸던 시간과 이 작은 상영의 여정은 제가 이 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큰 힘을 주었어요.
일본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하고 싶어요. “이 필름이 남아 있어요” 하면 관객들이 “아직 남아 있어요?” 하고 걱정해 주거든요. 지금이라면 관심이 높지 않을까요. 한국에서는 개봉한 지 1년 반이 지나 잊혔을지 모르지만, 이 인터뷰가 다시 기억을 환기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아서 기뻐요. 잊히는 게 제일 큰 문제니까요.
박마의 감독은 인터뷰에 앞서 일본 각지의 관객 설문과 기고문, 신문 지면에 실린 글들을 미리 정리해 보내주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한국과 일본의 반응, 차이가 느껴지죠?”라고 물었다. 한국 관객은 재일조선인과 한국인의 역사를 같은 것으로 상정한 ‘역사 인식’ 감상이 중점이라면, 영화가 놓인 디아스포라적 조건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반응이 없었다. 반면 일본 쪽 반응은 차별과 배외주의, 우경화하는 일본 사회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졌다. 일본의 전쟁 책임에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활동가조차 몰랐던 것이 많았다는 고백도 인상적이다.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이러한 반응과 연관된 글 두 편을 번역해 싣는다.
#1. 시대를 읽다 - <되살아난 목소리>
다나카 유코 호세이대학 명예교수·전 총장(도쿄신문 2025년 9월 21일 게재)
<되살아난 목소리>라는 영화를 알고 계시는가?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일본인인 내가 짊어지고 있는 역사가 새로운 것이 되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타인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인인 나 자신의 역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역사상의 사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험으로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져 가는 것이다. 2시간 반에 이르는 다큐멘터리이지만, 순식간이었다.
영화 감독은 박마의 씨다. 그러나 거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영상의 많은 부분은 어머니인 박수남 씨가 완성해 이미 공개한 4편의 영화와, 아직 편집되지 않은 방대한 영상이다. 그 4편 가운데 한 편인, 조선인 피폭자를 찍은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에서 나는 그들이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폭자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본인 속에 편입되었다가, 그 뒤 배제된다. 그것은 일본 측의 형편에 따른 것이었다.
오키나와를 기록한 영화에서는 오키나와에 있던 조선인들도 징병되었고, 그 끝에 스파이로 몰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남 씨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키나와로 이주해 20년에 걸쳐 교류를 계속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1910년에 한반도를 식민지화했다. 1919년 3월에는 독립운동이 격렬해졌고, 4월 15일에는 제암리교회 사건이 일어난다. 수남 씨의 카메라는 그 현장에 있었던 여성에게도 향했다. 일본군이 와서 신도들을 끌고 갔다. 남편이 예배당으로 끌려가 울고 있던 여성의 목을 일본인 헌병이 칼로 베었다. 한 번에는 베어지지 않아 세 번이나. 그 뒤 일본군은 교회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은 간토대지진 당시의 학살을 그린 영화 <1923년 9월(福田村事件)>(2023. 감독 모리 타쓰야)에서도 등장인물이 교회에서 통역을 했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된다. 그 대지진 학살 때 수남 씨의 아버지는 노다에 있었다. 다마리 간장 공장의 주인과 동료들이 숨겨주어 살아남았다고 한다.
전후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은 아이들을 위해 조선인학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1949년 학교폐쇄령이 내려진다. 많은 경찰관이 아이들을 경찰봉으로 몰아붙이는 영상은 처참하다. 달리다가 쓰러진 학생들을 곤봉으로 내리친다. 수남 씨 일행은 달아나는 것을 그만두고 스크럼을 짜 경찰대와 맞섰다. 그때 수남 씨는 자신이 “변했다”고 말한다.
고마쓰가와 사건은 그러한 곤궁 속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수남 씨는 사형이 집행된 이진우와 주고받은 서간을 간행한 바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이진우는 마침내 피해자를 ‘느끼게' 되고, 죄를 분명하게 의식한다.
‘위안부’였던 여성들의 증언도 필름에 담아 <침묵>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전쟁에서의 성폭력은 가장 감추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025년 8월 25일, 오랫동안 해저 조사를 계속해 온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조세이 탄광에서 대퇴골과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이 탄광은 수남 씨가 계속 기록해 온 지쿠호, 나가사키, 군함도에서 있었던 가혹한 노동의 연속선상이다.
고대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와 왕래가 일본에 한자도, 불교도, 기술도 가져왔다. 그 이후 일본은 한국(조선)과 함께 살아왔다. 일본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직시하고 한반도를 느끼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2. 고작 영화, 그래도 영화
역사에 뿌리내린 ‘작은 목소리’의 힘
아베 야스히로[4](마이니치신문 전국판 2025년 12월 4일 게재)
미국 사업가 일론 머스크가 운영하는 X(트위터)의 생성 AI ‘그록’이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부정하고, 가스실도 살해 목적이 아니라 전염병 대책을 위한 소독시설이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다고 한다.
이 주장은 1990년대 말 어빙이라는 영국인 역사학자가 주장했던 설로, 2000년에는 그 진위를 둘러싸고 재판까지 벌어졌다. 판결은 이를 반유대 사상을 지닌 어빙에 의한 자의적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고 단정했으며, 그 전말은 <나는 부정한다>(일본 개봉명 <否定と肯定>, 2017)라는 극영화에도 담겨 있다.
이번에 그록이 똑같은 편견을 다시 들춰낸 것은 네오나치의 견해를 바탕으로 코멘트를 생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시물은 삭제되었지만 100만 회 이상 열람된 모양이다. 20년 전과 지금은 확산력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운영 측의 책임이 크다.
사실에 대한 엄밀한 검토보다 자극적인 것을 첫째로 두는 언설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이른바 페이크 뉴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조와 음색은 언제나 ‘큰 목소리’이기 때문에 대중은 선동 당하기 쉽다. 그러한 ‘큰 목소리’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외로 당사자의 사라질 듯한 ‘작은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올해 90세를 맞는 박수남과 박마의 모녀가 공동으로 감독한 <되살아난 목소리>는 문득 그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목소리’의 힘을 응축한 노작이다. 미에현 출신의 재일조선인 2세 박수남은 전후 야키니쿠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같은 재일조선인 소년 사형수 이진우와 왕복 서간을 계기로 가게를 접고 작가로 전신한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는 펜을 카메라로 바꿔 들고 영상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원폭 피해와 강제노동, 오키나와와 한국에서 여성들이 겪은 전시 성폭력, 간토대지진과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학살 등, 일본이 눈을 돌려 피해 왔던 역사적 사실에 빛을 비추고, 문자로는 말해 나타낼 수 없는 피해자의 목소리와 표정을 전하기 위해서는 영화라는 시각적 매체가 가장 좋다고 확신한다. 40년 넘게 걸친 영화 작가로서의 반생은, 거센 바람을 거슬러 내버려진 역사의 부스러기를 필사적으로 주워 모으려 한, 발터 벤야민이 개념화한 ‘역사의 천사’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최근 뇌경색과 눈병을 앓아 체력도 시력도 뜻대로 되지 않는 박수남의 집에는 50시간에 이르는 미편집 16mm 필름과 방대한 수의 녹음 테이프가 있었다. 영화 <되살아난 목소리>는 딸 박마의가 이 영상 기록을 어머니와 함께 복원하는 동시에 재편집한 것이다. 민족적 마이너리티이면서 싱글마더라는 출신 배경을 짊어진 어머니의 눈에 비친 일본의 전후사에 딸의 시점을 겹쳐가며 다시 바라보는 영화가 되었다.
포럼 후쿠시마에서는 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 동안 상영한다. 이미 이 영화를 10회 이상 보았다는 작가 와타나베 가즈에의 호소로 뜻있는 사람들이 상영실행위원회를 만들었고, 이번에 상영이 실현되었다. 6일 상영 뒤에는 두 감독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후쿠시마 사람들과 꼭 교류하고 싶다며 직접 찾게 되었다.
나도 이미 세 번 이 영화를 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빨려 들어간다는 와타나베 씨의 마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괴로운 기억을 이야기하는 증언자의 가느다란 ‘작은 목소리’, 사라질 듯한 슬픈 표정은 비통하지만, 어째서인지 화면에서는 온기가 전해진다. 그것은 역사의 피해자가 처한 처지와 고통에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박수남의 시선을 우리 관객도 카메라 너머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성공을 위해 증언자를 착취하려는 속뜻은 티끌만큼도 없다. 화면에서 전해지는 것은 오로지 자애와 이타의 마음이기 때문에 상쾌하다.
머스크의 AI처럼 인터넷 공간에 넘쳐나는 ‘큰 목소리’는 그 극적인 성격으로 대중을 자기 자신의 언설에 얽어매려 한다. 자애와 이타의 마음은 그곳에는 털끝만큼도 없다. ‘큰 목소리’는 선동과 동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다시 점검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확실한 역사적 연속감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 이 영화와 같은, 수수한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이런 시대에는 중요하다.
“쉽게 손에 들어오는 정보는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것뿐이니까, 너무 곧이곧대로 믿지는 마.” 지난해 공개된 영화 <새벽의 모든 것>에서 여의사가 하는 대사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가슴에 사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