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평화운동가 ‘해초’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마주하기 위해 지중해상 군사 봉쇄선을 뚫고 가자 지구 구호 선단에 올랐다. 공해상에서 1차 나포를 당한 뒤 사막 수용소에 구금됐다가 강제 추방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음에도 해초는 2026년 5월, 70여 척의 배들과 함께 다시 가자의 바다로 향했고, 또 다시 나포됐다. 2차 나포 과정은 훨씬 강도 높은 폭력과 불법의 연속이었다. 국제법을 무력화하며 공해상에 띄운 해상 감옥에 갇혀 안면 구타에 의한 고막 천공을 겪고, 동료들을 향한 조직적 성적 폭력과 가혹 행위를 목격했다. 이 과정에서 해초가 마주한 것은 폭력적인 점령과 혐오가 한 사회를 어떻게 파괴하는가에 대한 뼈아픈 실체였다. 그러나 해초는 무력감에 갇히는 대신 부서진 요트의 파편이 해류를 타고 끝내 가자 해안에 닿는 연대의 질긴 생명력을 보고, 부당한 현실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낙관을 배웠다. 돌아와 새로운 연대의 돛을 올리고 있는 해초를 만나 폭력의 시대를 건너는 몸의 기억과 저항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지난 7월 23일 오후 3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팔레스타인 구호 선단 오른 평화운동가 ‘해초’ 인터뷰(1)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땅, 팔레스타인으로 띄운 평화의 돛
팔레스타인 구호 선단 오른 평화운동가 ‘해초’ 인터뷰(2) “폭력의 시대 건너는 힘은 서로를 외면 않는 다정한 연대”
결 : 출항 전 훈련과 항해 기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하셨어요. 두려움과 행복이 어떻게 같은 시간 안에 함께 머물 수 있었을까요?
해초 :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유럽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정말 대중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아주 작은 마을의 출항 항구 인근에 사는 주민들 집집마다 팔레스타인 국기가 걸려 있을 정도로요. 훈련을 함께하고 배를 준비하는 동안은 일시적인 공동체가 만들어진 기분이었어요. 국적도, 직업도, 나이와 인종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각자의 정체성과 각자의 땅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죠. 왜 내가 팔레스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서로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항해가 실패하더라도,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통해 연결된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느꼈어요.
시칠리아에서 나포 상황을 훈련할 때 만난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 노인 활동가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아요. 어쩌면 가장 약하고 표적이 되기 쉬운 분이 눈빛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한 동료는 두려움을 안고 갈 수도 있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자신은 희망을 가지고 항해하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만난 뒤부터는 두렵지 않았어요. 그게 벅찼어요.
결 : 2025년 10월, 첫 번째 나포의 순간으로 가보려 합니다. 다시 떠올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 경험을 언어로 남기는 일도 중요하기에 양해를 구하며 여쭙습니다. 그날 새벽부터 구금까지, 어떤 일을 겪으셨나요?
해초 : 15개국에서 60명이 참가했는데, 두 명씩 교대로 자다가 새벽에 경고 소리에 깼어요. 제 역할은 마지막 상황을 영상으로 찍어 전송하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폐기하는 거였는데, 그 일을 마치자마자 군인들이 배에 올라탔어요. 어둠 속에서 수많은 불빛을 보며 주변에 군인이 이렇게 많구나라고 느꼈고, 다른 배들이 하나씩 나포되는 걸 지켜봤어요. 머리로는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본능적으로 떨리더라고요.
군함으로 옮겨진 뒤 케이블 타이로 손목이 꽉 묶였어요. 석방되고 이틀이 지나도록 자국이 남아 있을 정도였어요. 눈을 가린 채 버스에 실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수용 시설로 갔고요. 그때 시칠리아에서 배운 원칙을 떠올렸어요. ‘항상 침착하고, 말을 삼가라.’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았어요. 여기에 저항하러 왔다는 건 눈빛으로 표현하되, 표정은 최대한 지우고 묻는 말에만 대답했어요. 당뇨 때문에 약이 꼭 필요했던 동료가 있었는데 끝내 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작은 위로도 있었어요. 먼저 나포됐던 항해자들이 벽에 남긴 ‘free palestine(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이라는 글씨, 방 곳곳에 숨겨둔 볼펜과 묵주 팔찌 같은 것들이요. 그런 데서 조금 안도감을 느꼈어요.
결 : 그런 공포를 경험하고도 2026년 5월, 다시 구호 선단에 올랐습니다. 한 번의 나포 후 다시 들어가는 발걸음은 처음과 많이 달랐을 텐데, 두 번째 나포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해초 : 많은 면에서 달랐어요. 첫 번째는 9척 정도의 작은 선단이었고, 저희가 나포되고 추방될 즈음 휴전이 있었어요. 이런 항해 운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이슈를 만드는 거예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시민들이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되면 국제적으로 목소리가 높아지니까, 이스라엘도 비교적 빨리 처리하고 풀어줬어요. 안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요구할 수 있는 시간도 있었고요.
원래 100척을 계획했다가 최종 70여 척이 함께한 두 번째 항해는 지금까지 있었던 항해 중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반응도 컸어요. 훨씬 일찍 나포를 시작했고, 규모 때문에 이틀에 걸쳐 나포가 이뤄졌어요. 또 이번에는 육지 감옥이 아니라 배 위의 해상 감옥에 수감됐어요. 외부와 어떤 연결도 불가능하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르는 곳이에요. 게다가 국제 해역을 이동하는 감옥이라, 나중에 어디서 폭행을 당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곳이 이스라엘 영토가 아니라는 이유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구조였어요. 그래서인지 폭행이 훨씬 적나라했습니다. 시설도 열악했고, 뼈가 부러진 사람이 정말 많았어요. 특히 남성들이 더 심하게 당했어요.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동료가 구타당하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작년 경험만 생각하고 갔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 : 끔찍했던 기억까지 꺼내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초님도 그때 폭행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해초 : 저는 비교적 덜 다친 편이에요. 얼굴을 맞았고, 도착했을 때 한쪽 귀의 고막에 구멍이 나 있었어요. 두 달 가까이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거의 나았어요. 원래 감옥에는 의료 시설과 의료진이 있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일부러 그 절차를 밟지 않아요. 다친 사람은 그 상태 그대로 추방됐어요.
결 : 폭력 앞에서 비폭력을 유지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닐 겁니다. 그 순간을 버티게 한 수칙과 훈련이 있었을 것 같아요.
해초 : 훈련 기간 내내 나포와 수감 과정을 시뮬레이션해요. 예를 들면 나포될 때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수칙이 있어요. 군인들이 주로 팔다리를 겨냥하는데, 고개를 숙이면 머리를 맞을 수 있거든요. 두렵더라도 고개를 들고 항복 자세를 유지하는 거예요. 누군가를 따로 고립시키려 하거나 폭력 상황이 생기면 최대한 소리를 내서 동료들에게 알려야 하고요. 이번에 저희 배는 마지막으로 나포된 배 중 하나였어요. 앞서 나포된 배들에서 총격과 물대포 같은 폭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여서, 저희는 두 손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며 최대한 소극적으로 저항하기로 했어요.
결 : 구호 선단에는 이스라엘 국적자와 유대인, 무슬림 여성, 퀴어 활동가 등 다양한 분들이 함께 한 것으로 압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연대자가 있을 것 같아요.
해초 : 올해 같은 배에 탔던 프랑스 친구 한 명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유대교 배경에서 자랐고, 가족 일부가 성인이 된 뒤 이스라엘로 이주해 정착민으로 살고 있는 친구예요. 이 항해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유대인도 참여하는데, 아랍 국가에서 온 사람들보다 그들이 가장 가혹하게 처벌받아요. 배신자 취급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 정말 큰 용기를 냈을 거예요. 그 친구는 처음엔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배에 탔는데, 항해 도중 시오니스트인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공개하고 보냈어요. 어린 시절 소중한 시간을 보낸 유대교 공동체와 신앙이 시오니즘에 의해 변질되고 빼앗기는 경험, 가족을 방문하며 목격한 혐오와 폭력에 대한 편지였어요. 많은 사람이 유대교와 시오니즘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둘은 달라요. 그 편지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저희 배에는 퀴어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포 상황에서 훨씬 심한 일을 겪었어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종 차별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혐오의 위계를 그대로 따라 폭력을 구사한다고 느꼈습니다. 군인들은 굉장히 어렸고, 그 위계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들에게 저는 단지 ‘동양인 여성’으로 읽혔어요.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유치한 말을 내뱉으며 동료를 때리더군요. 그런 무지가 있어야 혐오가 가능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가장 무섭다고 느낀 건, 두 국가 사이의 거대한 폭력보다도 시스템의 폭력이 개개인의 사적인 삶에 침투했을 때였어요. 그 친구의 가족처럼, 그리고 제가 감옥에서 마주한 군인들처럼요. 그럴 때 이 문제는 정말 어렵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게 돼요. 그 고민을 계속 붙들고 있어요.
결 : 고통의 규모를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에게 무력감은 피하기 어려운 감정일 것 같습니다. 그 막막함을 해초님은 어떻게 마주하고, 또 무엇에서 다시 힘을 얻으셨나요?
해초 : 작년에는 무력감이 정말 컸어요. 수감 기간이 짧아서 이슈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우리 규모가 너무 작았거든요. 올해는 이스라엘이 더 크게 반응했는데, 그게 곧 우리의 항해가 효과가 있다는 반증이라 그런 의미에서 성과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비교적 행복하게 살아온 편이라 직접적인 폭력에 크게 노출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저뿐 아니라 제가 소중히 여기는 동료들이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폭력을 당하는 경험을 했고, 우리는 풀려났지만 훨씬 심한 폭력을 더 오래 견뎌야 하는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있다는 걸 떠올리면, 그 폭력의 규모가 체감되면서 막막해져요. 그래서 상담을 받고 있어요. 어떤 것은 불가능했지만 어떤 것은 가능했다는 걸, 그리고 이 폭력이 시스템에서 온 것이라는 걸 계속 생각하려고 해요.
그리고 이건 저한테 좀 재미있는 부분인데요. 작년에도 올해도 우리 몸과 배는 물리적으로 가자에 닿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항해를 시도했고, 어떤 마음으로 가다가 나포되었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가자에 사는 사람들에게 닿고 있었어요. 올해는 부서진 배의 파편이 레바논과 가자 해안에 닿기도 했어요. 군사력이 막을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이 있지만,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흘러서 거기에 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가능한 건 항해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 만들어지는 공동체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항구에 들러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다음 항구에서 또 만나고, 만나고, 만나면서 가는 과정이거든요. 준비하는 순간부터, 돌아와서 이번엔 가자에 무엇이 닿았을까 헤아려보는 것까지가 저에게는 하나의 여정이에요.
결 : 이번 나포 과정에서 성폭력이 있었다는 증언과 보도가 나왔습니다.
해초 : 맞아요. 여성 활동가의 절반 가까이가 적어도 성추행을 당했어요. 제 주변 동료들 가운데서도 피해를 증언한 친구들이 많아요. 공식적으로 증언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피해자가 정말 많을 거예요.
저는 피해가 작았는데, 그것도 아시아인이라 ‘더럽다’고 여기는 인종적인 이유가 컸을 거예요. 피해를 입은 이들은 주로 아랍계와 무슬림 여성, 그리고 백인 여성들이었는데, 가해의 방식도 달랐어요. 무슬림 여성들에게는 종교적 모욕감과 수치심을 극단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신체를 침범하는 방식의 성폭력이 가해졌다고 알고 있어요. 백인 여성들에게는 가해자들의 성적 ‘즐거움’을 위한 방식, 신체를 만지는 것부터 강간에 이르는 폭력이었다고 들었고요.
첫 번째 나포 때 붙잡힌 이들 중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많았어요. 두 나라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감이 깊어서 국가 차원에서도 선단을 지원하고, 모금과 참여자 파견도 활발했어요. 나포된 여성 거의 모두가 성추행을 당했어요. 그것이 그들에게 종교적으로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지 알면서 저지른 거였어요. 그 뒤로 두 나라 여성들이 참여를 중단했다는 보고서도 있습니다.
결 : 전시 성폭력은 역사 속에서 늘 ‘일부 군인의 일탈’로 축소돼 왔는데, 팔레스타인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훨씬 심각할 것 같습니다.
해초 : 네. 저희에게 가해진 폭력의 강도와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겪는 폭력은 비교할 수가 없을 겁니다.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성폭력을 고문의 한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한다는 증언이 매우 많이 남아 있어요. 성폭력은 그들에게 고문의 도구예요.
결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듯,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선단 안에서는 피해를 어떻게 다루고, 공론화했는지도 궁금합니다.
해초 : 그 부분이 조금 어려워요. 내부적으로 공유되는 사실이 있지만, 피해를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모두에게 공식적인 증언을 요구할 수는 없어요.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공론화하고 있고, 피해 증언과 기록을 모으고 있어요.
결 : 전쟁은 파괴와 피해, 상처의 흔적을 남기지만 그 안에도 살아가고 서로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봉쇄와 굶주림 속에서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공동체가 삶을 지켜가는 모습을 전해 들으신 것이 있나요?
해초 : 저는 가자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폭격과 굶주림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서로를 지키는 삶을 이어가요. 저는 그게 매일의 삶으로 하는 저항이라고 생각해요. 크고 작은 공동체와 단체들도 여전히 남아 있어요. 가자도 해안 마을이니 어부 조합 같은 곳이 있는데, 구호 선단은 출항 전에 그 어부 조합과 연락해 ‘우리가 간다, 기다려 달라’고 알리고 떠나요. 바다 건너에서 누군가 오고 있다는 걸 아는 것,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구호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결 : ‘공평해 프로젝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 현장을 만난 적도 있더군요.
해초 : 네, 공평해 항해 때 찾아간 섬들은 관광객조차 거의 없는 작은 섬들이었는데, 그 섬들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미야코지마의 ‘아리랑비’가 그나마 알려진 곳이고요. 정말 작은 섬에서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주민분들이 ‘이런 곳이 있다’며 전쟁 때 만들어진 군사 시설이나, 옛날 ‘위안부’ 여성들이 머물렀던 건물로 데려가 주셨어요. 그런 장소들을 보면서 섬뜩했어요. 오키나와는 비교적 알려져 있지만, 다른 작은 섬들에 남은 흔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어요. 이런 흔적들을 수집해 서로 알리고 연결하는 것도 계획 중 하나예요.
결 : ‘위안부’ 피해의 역사와 가자의 피해와 성폭력이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역사는 해초님 안에서 어떻게 겹쳐지고 또 다를까요?
해초 : 저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고, 우리가 여기서 끊어내지 못한 연결이 있으면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고 생각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시기와 그 이후 한국 역사의 아픈 부분인데, 저는 그 시절을 직접 겪지 않았고 공부나 소설을 통해서 접했어요.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 제가 마주한 건 이스라엘 점령군과 감옥, 그러니까 점령과 폭력이 실제로 가해지고 있는 현장이었어요. 그 경험이 식민 점령의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어요.
비슷한 점도, 다른 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직 풀지 못한 고민은 시스템의 폭력이 사적인 삶에 침투했을 때 나타나는 양상들이에요. 식민 점령이라는 국가적 상태는 극복할 수 있어도, 그때 개개인의 삶에 가해진 폭력은 회복하거나 되돌려받기 어렵고, 그 결과가 계속 남아요. 떠나기 전에 박수남 감독의 영화를 보고 갔는데, 끝까지 남은 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삶을 담은 영화였어요. 그 삶이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뒤 식민지와 해방에 대한 제 생각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어요. 그런 역사를 가진 땅에서 자란 한국 사람들이, 왜 지금 그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다른 곳의 상황에 공감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왜 그렇게 멀게 느낄까 하는 거예요.
결 : ‘위안부’ 운동이 보여주었듯, 가해와 피해를 정확히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 또한 비극의 반복을 막는 중요한 방법일 겁니다. 지금 가자의 진실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관련된 정보가 있을까요?
해초 : 이 항해는 ‘트래커’라는 시스템으로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며 가요.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쯤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수 있어요. 목격하게 하는 것, 그게 이 운동의 원리이기도 해요.
나포 이후에는 항해자들의 상태와 증언을 수집하고, 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실제로 기소와 재판 절차를 진행하고 있어요. 저희를 나포할 때 어떤 군인들이 가담했는지도 다 드러나 있어요.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체포할 수는 없지만, 그 군인들이 휴가를 나와 다른 나라에 입국하면 체포하도록 하는 운동이 유럽에서 크게 일어나고 있어요. 이스라엘 총리에게도 이미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이 발부돼 있고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고 있어요. 저희가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것도 나포에 복무한 군인들을 처벌하라는 거예요. 제가 두 번째 나포됐을 때 대통령께서 언급해 주셨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자국민을 보호하고, 폭력을 당한 국제 시민들을 위해, 그리고 폭력을 저지른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실천이 분명히 있고, 유럽의 여러 나라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요.
결 : 2026년 5월, 제21회 ‘들불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어요. “광주 오월의 정신이 어떻게 국경과 바다를 넘어 세계적 평화 연대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보였다”는 선정 이유는 그대로 응원입니다. 반면 나포 소식이 알려진 후 일각에서는 ‘전도하러 간 거냐’, ‘주목받고 싶었냐’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해초 :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잘 알지 못하니까, 자기가 아는 상황에 빗대어 이해하려다 오류가 생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항해는 ‘샘물교회 사건’과 전혀 달라요. 국제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이고, 출항 전부터 이 항해가 평화로운 항해이자 비폭력 직접 행동, 인도주의적 보호를 위한 항해라는 걸 분명히 해요. 모든 과정과 결과를 공개하고요. 선교 목적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 분명해요.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다만 곁에 기독교인이 많고, 투쟁 현장을 지키는 그분들은 종교나 교리를 앞세우지 않아요. 저는 그분들에게서 태도를 배웠어요.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정치적 분쟁이 아니라 기아까지 동반된 인종 학살이에요. 폭력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다른 문제예요.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용기 있는 증언에도 세상은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 “순수한 피해자가 맞느냐”며 모욕했습니다. 국가폭력의 증언자가 되는 순간 부당한 공격을 받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갖는 아픈 한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댓글을 보며 좋았던 건 동시에 이스라엘을 욕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웃음) 저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이스라엘이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가능해졌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변화라고 느껴요. 다만 돌아와서 한국에서 집회를 하며 마주하는 무관심한 얼굴들, 인터넷에서 무분별한 말을 쏟아내는 태도가 이스라엘에서 만난 군인들이나 강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고 있고, 누군가 부당하게 피해를 입거나 죽어갈 때 눈물 흘리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가 병든 상태 아닐까요.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상태와 혐오할 수 있는 상태는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제가 만난 군인들은 폭력을 마치 게임처럼, 웃으면서 행했어요. 그게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또 그들이 하마스의 공격으로 자신들이 겪는 고통만 이야기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면에는 또 다른 안타까움이 있어요. 국가의 선전을 순수하게 믿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르는 폭력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모르는 듯했어요. 식민 지배의 역사가 개인의 삶을 통과하며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가는구나, 매듭을 푸는 게 쉽지 않겠구나 싶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나 민족을 미워하기보다, 그런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결 : 안타깝게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디서 희망의 실마리를 발견하시나요?
해초 :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유에 대해 질문했어요. 우리는 맞고, 조롱당하고, 갇혀 있었지만, 감옥 바깥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저 군인들이 과연 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유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에 따라 정의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미디어로 보면 꼭 세계가 몰락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목소리 작은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걸 항해하면서 알게 됐어요. 부서진 배의 파편이 가자에 닿았듯, 막을 수 없는 것들은 끝내 흘러가요.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긍지를 가진 곳이에요. 저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이 이 세계의 전체주의에 맞서는 영감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결 : ‘한국은 식민 지배와 국가폭력, 여성 인권 유린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회입니다. 그 기억을 가진 시민들이 지금 가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해초 : 팔레스타인이 멀다고 말하는 분들께 저는 되묻곤 해요. 그렇다면 가까운 곳은 어디냐고요. 오키나와나 제주는 가깝다고 느끼는지, 광주나 군산은, 혹은 지금 딛고 선 이 땅은 가깝다고 느끼는지요. 어딘가를 멀게 느끼는 건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의 역사와 연결되는 감각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래서 다른 곳의 이야기에 공감하려면 여기의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이 땅에서도 지금 정말 많은 곳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공감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가까운 현장에 귀 기울이는 것, 한국 정부와 기업이 이스라엘과 맺고 있는 군사적·경제적 고리를 끊으라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가 국제사회와 연결되도록 하는 것. 어떤 투쟁이 커지려면 국제적인 연대가 꼭 필요해요. 강정도 국제 연대 덕분에 공사가 멈춘 적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팔레스타인 운동이 굉장히 의미 있는 운동입니다.
결 : 두 번의 나포를 겪고도 다시 떠날 계획을 하고 계신데, 다음 항로는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해초 : 동료들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한국본부’라는 단체를 새로 만들었어요. 거기서 크고 작게 계속 활동하고 지원할 거예요. 저는 특별한 경험 한 번 하자고 항해한 게 아니라 정말로 가자의 봉쇄를 부수겠다는 마음으로 다녀왔어요. 그러니 팔레스타인이 해방될 때까지 계속 함께 할 거예요. 장소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어요. 멀다고 생각하는 거리, 여기와 저기 사이에 놓인 문제들이요. 이 세계와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 건너에서도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꼭 확인하고 싶어요. 경이로운 자연도 더 보고 싶고요.
결 : 마지막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오랫동안 듣고 기록하고 관심을 가져온 웹진 <결> 독자, 그리고 앞으로 어떤 폭력의 증언자가 될지 모를 청년들에게 평화 항해자로서 건네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세요.
해초 : 더 많은 상상력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함께 갇혔던 구호 선단원들 중에는 운동선수도, 배우도, 청소년도, 국회의원도, 농민도 있었어요. 그들은 구호 활동을 학살이 벌어지는 세계를 살아가는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폭력은 늘 우리 곁에 있고, 그건 함께 풀어낼 수 있는 문제예요. 바람을 거슬러 곧장 갈 수는 없어도, 방향을 꺾어가며 우리는 끝내 가 닿을 수 있다는 걸 바다에서 배웠거든요. 폭력의 시대를 건너는 가장 강인한 힘은 결코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우리들의 다정한 연대에 있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