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신숙옥은 기업과 공공 기관 등의 인재 육성과 인권 교육을 담당하는 사업가이자 작가로 활약하며 1990년대부터 재일조선인과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내 왔고, 2000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혐오 발언을 계기로 차별 반대 및 인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일본군‘위안부’, 오키나와 및 아이누 민족, 장애인, 난민 등 다양한 소수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며 활동 범위를 넓혀왔다. 이를 인정받아 2003년 ‘다다 요코 반권력 인권상’을 수상하지만, 동시에 일본 극우 진영의 극심한 공격에 노출되었고, 특히 2017년 TV 프로그램 〈뉴스 여자〉의 날조 선동이 촉발한 법정 투쟁으로 2023년 일본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가 확정되기까지 매우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웹진 <결>은 지난 6월 ‘김복동상’ 수상을 위해 서울을 찾은 신숙옥을 만나 전후 일본의 운동사에서 드물게 기억되는 ‘승리의 역사’를 일궈낸 그의 거침없고 당당한 목소리를 들었다.
Q : 먼저 ‘김복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 투쟁을 하셨던 재일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님과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선생님 역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해오셨기에 이번 수상이 더 특별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숙옥 : 처음에 연락을 받고 너무 놀랐어요. 진짜 놀랐어요. 하지만 곧 부끄러웠습니다. 특히 송신도 씨와 관련해서는 저보다 더 열심히 응원한 분들이 많았거든요. 일본인이고 재일조선인이고 간에,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열심히 응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분들의 이름은 그다지 언급되지 않잖아요. 또 저를 응원해 주신 분도 많이 계세요.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다 같이 수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Q : 송신도 님 생각도 많이 나셨겠어요.
신숙옥 : 송신도 씨랑은 같이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지냈어요. 언제나 저를 걱정하셨죠. TV를 보면 제가 공격을 많이 받으니까 만나면 항상 괜찮냐고 물으셨어요. 에피소드가 있는데, 어느 날인가 제가 강연하는 곳으로 찾아와서 갑자기 일본어로 ‘너 돈 있냐, 용돈 줄까?’ 하고 물어요. 몇 번이고요. 너무 뜻밖이라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형편을 잘 아니까 됐다고, 집을 몇 채나 살 만큼 돈이 많다고 했죠. 나중에 생각하니 제가 잘못한 거였어요. 송신도 씨는 누구에게 무언가를 주기보다 받으면서, 항상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살아왔잖아요. 용돈 줄 손주도 없고요. 그러니 제가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하면서 100원이라도, 500원이라도 용돈을 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흔몇 세던가, 송신도 씨 생일 파티 때였어요. 그 전에 ‘피차별부락’에서 가죽을 다루던 일본인 할아버지께 직접 만든 숄 같은 걸 받았어요. 그분도 평생을 차별로 고생하셨죠. 여튼 그걸 송신도 씨에게 생일 선물로 드렸는데, 정말이지 돈 많고 좋은 집안 출신처럼 보였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제가 울었어요. 그런 인생을, 그런 걸 입고 선물 받는 인생을 살게 해드리고 싶었으니까요. 왜 차별을 받아온 사람은 타자와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송신도 씨는 날이 갈수록 좋은 면을 많이 보여줬어요. 재판에 졌을 때도 모두 침울해져 있는데, 오히려 송신도 씨가 용기를 내라며 노래를 불러줬죠. 그런데 그게 일본군 군가였어요.(웃음)
Q : 일제강점기를 겪은 분들이 일본 군가를 부르는 모습은 드물지 않은 것 같아요.
신숙옥 : 네, 거기에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 그걸 부르면 옛생각이 난다고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역사잖아요. 역사 속에서 그 노래를 부르며 살아왔잖아요. 송신도 씨는 또 일본 정치가 중에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의 얼굴이 낫다고도 했는데, 위안소를 짓는 데 관여한 사람이에요. 이런 걸 슬프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해하기 쉽지는 않죠.
한번은 제가 독일에 체류할 때 일본을 한번 다녀갔어요. 송신도 씨에게 인사드리러 갔죠. 그때 치매로 기억을 많이 잃은 터라 저도 못 알아보시고 겁을 내며 일본어로 “누구냐?”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일본어로 “조선 여자애예요”라니까 안심해요. 한국어로 “여기 ‘쪽발이’는 없습니다”라고 덧붙였더니 막 웃어요. 하지만 곧 잊어버리고는 또 “누구냐?” 그래요. 제가 똑같이 대답하면, 송신도 씨가 또 막 웃죠. 그렇게 같은 말을 몇백 번이나 반복하며 웃고는 “안녕” 하고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이에요. 그렇게 웃다가 울다가….
Q : 혹시 김복동 님과도 연이 있으셨나요?
신숙옥 : 제가 수요시위에 몇 번 참가했어요. 아마 그때 계셨을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나요.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마지막까지 싸우시고, 특히 조선학교를 지원하셨다기에 놀랐어요. 조선학교 관련해서는 유언비어가 많았잖아요.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고. 물론 실제로 문제가 있는 곳도 있고요. 김복동 ‘언니’가, 본인도 ‘위안부’라고 백안시 당해 왔을 텐데 차별당하는 입장에 공감하면서, 지지 않고 구조적 약자의 편에 계속 서 있으셨던 걸 보면 엄청난 신념이 있었겠다 싶어요. 몇 번이나 절망했을 텐데, 정말 강인한 분이신 거죠.
Q : 선생님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차별에 맞서 계속 투쟁해오셨으니까요. 그 용기 내지 에너지의 원천 같은 게 있나요?
신숙옥 : 아니, 없어요. 나는 내가 좋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싶어요.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 여자로서 말이에요. 그런데 학교도 오래 다니지 못했으니까, 싸우지 않으면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저 내 앞길 막지 말라고 한 거죠.(웃음)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면에서 여성들은 모두 인권활동가예요. 남성 비장애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2급 시민’ 취급을 받아왔으니 자신답게 살아가려면 싸울 수밖에 없잖아요. 싸우지 않으면 다음이 없죠.
Q : 말씀을 들으니 영화 〈호루몽〉에 나오셨던 선생님의 어머니 케이코 님이 떠오릅니다. 건강히 잘 지내시는지요?
신숙옥 : 아버지가 안 계시니 너무 행복해해요.(웃음)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에게 미움받았던 걸 몰랐어요. 본인에게 잘하는 줄로만 알았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살 수 있게 됐어요. 참 좋대요.
Q : 워낙에 일본에서는 저명하셨지만, 한국에서는 영화 〈호루몽〉을 계기로 젊은 세대 여성들 사이에서 특히 진한 반향이 일었습니다. 영화제나 강연 등의 행사에서 엄청난 환호를 받으셨는데 어떤 느낌이셨는지요?
신숙옥 : 진짜 놀랐어요. 재일조선인 이야기에 흥미가 없을 거라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일전에 어느 미국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관객이 감상문을 전해줬어요. 이민을 경험한 여성이 ‘우리들의 이야기’라 적었는데. 그때 깨달았어요. 같은 고생을 해온 처지에서 받아들여 줬다는 것을요.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그런 것 같아요. 여기든 일본이든 남성 우위의 구조는 마찬가지잖아요.
Q : 그 속에서 싸워나가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경우 침묵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지배 논리에 과잉 적응하기도 하잖아요. 목소리를 높여 당당하게 투쟁을 이어오신 선생님의 모습을 동경하며 본받고 싶어 한 관객들이 많지 않았나 합니다.
신숙옥 : 하지만 제 친구들은 딸들에게 ‘절대 신숙옥처럼은 되지 말라’고 해요. ‘행복하게 살아가라’고요.(웃음)
Q : 사실 오래전부터 다방면에서 활동하셨는데, 반차별 인권활동가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건 2000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전 도쿄도지사의 이른바 ‘삼국인(三国人)’ 발언이 계기라고 들었습니다.
신숙옥 : 이시하라 신타로는 대표적인 극우 인사로 그전부터 재일조선인을 비롯해 외국인, 장애인, 여성 등에 대해 온갖 차별 발언을 계속해왔어요. 그런데 그때는 자위대 앞에서 그런 거예요. 지진이 나면 ‘삼국인’이 소요를 일으킬 거라고요. 그건 특정 집단만 알아듣게 차별적 용어로 선동하는 이른바 ‘도그 휘슬’이었어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쭉 들어왔던 사람들로서는 바로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죠. 선전포고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시하라를 지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전후 일본이 어렵사리 축적해온 것들, 특히 민주주의가 근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위기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포스러웠죠.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작가 미야자키 마나부(宮崎学)가 “네가 가만있으면 안 되잖아?”라더군요. 관동대지진 때처럼 큰일을 당할 전조라는 의미에서요. 그래서 이틀인가 사흘 뒤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저에게 관동대지진은 외할머니가 (당시의 트라우마로 인해) 한밤중에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던 바로 그 모습이란 말이에요. 같은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싶었죠. 저는 재일조선인 3세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죄나 보상을 원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같은 과오를 반복하게 둘 수 없는 책임이 있잖아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싶었죠. 게다가 이름이 꽤 알려졌으니 그에 따르는 책임도 있어요. 유명해짐으로써 가능하게 된 일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시 저희 회사가 아주 잘나갔어요. 저도 잘 벌었고 가족들 생계도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었으니 조금 더 깊이 관여해도 되지 않을까 했어요. 하지만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웃음)
Q : 그즈음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다룬 프로그램이 외압을 받았던 일도 떠오릅니다.
신숙옥 : 그때가 전후 일본의 터닝포인트 같아요. 그런 때에 맞서 일어서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후의 인생도 정해진 거고요. 당시 그저 말이 심하다고만 하고 넘어간 사람들은 지금 안 보이잖아요. 시대의 분위기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Q : 당시의 변화에는 역시 버블 경제 붕괴의 영향이 있었던 걸까요?
신숙옥 : 그렇죠. 가난해져가는 게 보이는 사회의 불안을 차별 선동으로 돌려버린 면이 있죠. 현재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가 하는 것도 그거잖아요. 사회의 불안을 외국인 공격으로 전환시켜버리는 것 말이에요. 상투적인 수단이에요. 권력자들이 언제나 하는 짓인데, 지금 한국의 보수당에서 중국인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러면 온갖 문제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게 돼요.
덧붙이자면 차별은 오락이에요. 도파민이 엄청나게 나와요. 쾌락이고 향락이에요. 그런데 돈이 들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 시작하면 인터넷 게임을 계속하는 것처럼 반복하죠. 그만두는 게 매우 어려워요. 특히 차별적인 생각에 완전히 빠져 있는 사람은 살아생전에 변하지를 않아요. 예컨대 아직도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폭동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최근 한국 스타벅스의 마케팅 논란도 그렇고요. 어느 시대에나 늘 벌어져 왔던 일이에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가 관건이죠.
Q : 그렇게 2000년대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 발족하고, 이른바 ‘넷우익’과 ‘헤이트스피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습니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2013년 공동대표로 ‘노리코에넷(のりこえねっと)’을 설립하시는 등 다양한 투쟁을 하셨고, 그 성과가 2016년 약칭 ‘해소법[1]’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혐오 발언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선생님께서는 극우 내지 차별주의자들로부터 오히려 더욱 극심한 공격과 괴롭힘을 당하셨습니다. 어째서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했다고 보시는지요?
신숙옥 : 전혀 그렇지 않아요. 모순되지 않아요. 불만을 일단 잠재우기 위해 아무 효력도 없는 걸 만들어 던져준 게 ‘해소법’이에요. 그저 간판 같은 거죠. ‘해소법’에서 지칭하는 ‘본국 외 출신자’라는 건 차별받는 이들을 전부 포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으로 손에 쥔 그 인권법조차 배제 위에 성립됐던 거예요. 게다가 이념법이잖아요.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리고 ‘아멘’을 외친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그렇게 믿는 건 바보 같은 일이죠. 법을 만들었던 자민당의 니시다 쇼지(西田昌司) 의원은 <뉴스 여자>가 저를 비난할 때 ‘헤이트스피치가 아니’라고 했을 정도예요. 차별을 해소하겠다는 구체적 의지 없이, 요컨대 저항 세력 입막음용으로 만든 거였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냥 속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아요. 하지만 당시에 이런 것들을 걱정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어요. 모처럼 애써서 만들었으니 불평하지 말자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불완전한 것을 수용해버리면, 다음에 제대로 된 것을 만드는 일이 더욱 어려워져요. 싸워서 받아낼 때는 완전히 관철시켜야 해요.
Q :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이 요원한 한국 상황에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신숙옥 : 원래는 차별금지법을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건 절대 만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전쟁은 차별에서부터 시작하니까요. 전쟁을 하려고 하는 한 절대 만들지 않을 거예요. 한국도 여러 면에서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 같아요.
사실 젠더 차별도 심각하잖아요. 하지만 남자들은 기득권을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쟁취하러 나서야 해요. 일단 자그마한 거라도 하나 받아놓고 다음을 기약하자고들 하는데, 다음은 없어요. 그냥 사탕 하나 던져주고 어르는 것뿐이에요. 죽을 각오로 싸워서 받아내야 해요. 차별은 저쪽에게는 오락이지만 이쪽에서는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니까요. 덧붙여 차별받는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마이너리티잖아요. 특히 외국 국적 주민은 선거권도 없어요. 그러니 정치가가 움직이질 않아요.
Q : 선거 말씀을 하셔서 궁금해졌는데요.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못 하셨을 테고, 작년 대통령선거 때는 투표 하셨나요?
신숙옥 : 대통령선거는 가능해요. 하지만 수속이 너무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못 하고 있어요. 우선 선거 전 정해진 기간 내에 등록을 해야 해요. 그게 인터넷에서도 된다고는 하는데 막상 하려고 하면 몇 번이고 튕겨져 나와요. 왜냐하면 주민등록번호가 없거든요. 게다가 전부 한글로만 되어 있어요. 그나마 저는 할 수 있지만, 대다수 재일조선인은 한국어 입력이 어려울 거예요. 결국 호적등본을 찾아봐야 하는데 그게 정리되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알지 못해요. 부모가 어떤 이름으로 호적 등록이 돼 있는지 말이에요. 그러니 아무리 투표권이 있다고 한들 결국 행사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해요.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맥락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인터넷에서 등록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사관이나 대사관에 가야만 해요. 하지만 재일조선인에게 영사관과 대사관은 정보기관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거기 가는 건 정말이지 트라우마와의 싸움이기도 해요. 모두들 거기서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게요. 여권 하나 얻겠다고 몇 번이나 면접을 봐야 했는지 말도 못 해요. 그런 걸 이해해 주지 않죠.
대통령선거는 나조차도 세 번이나 실패했어요. 처음에는 투표소에 갔는데, 투표일이 그보다 훨씬 전 특정 기간이었다고 해서 못 했어요. 두 번째는 인터넷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등록이 안 됐어요. 그다음 선거에서도 인터넷 등록에 도전했는데 또 안 됐어요. ‘나의 나라는 정말 멀리 있구나’ 싶었죠. 하지만 나라의 리더를 잘못 뽑으면 정말이지 목숨까지 위협받게 되잖아요. 계엄 때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나간 시대의 공포가 되살아났을 정도니까요.
Q : 일본에서 정권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자민당 정권이 계속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반면 한국은 민주 정권을 수립했다고 해도 다시 보수 정권이 들어서기도 하고, 부침이 크네요.
신숙옥 : 그래도 가져오고 뺏기고 하는 편이 더 건전한 것 같아요. 일본에는 변화에 대한 바람이 약해요. 억압된 이들에게는 절망적인 사회다 싶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라든가 시민사회는 희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봐요. ‘위안부’ 문제도 결국 그러한 힘이 모여 세계 전시 성폭력 문제의 흐름을 바꾼 거잖아요. 제가 미국에 체류할 때 샌프란시스코 집회에 나가봤고, 독일에 체류할 때도 기림비 관련한 여러 운동을 보았어요. 세계의 여성들이 공명하는 운동으로써 한국에는 역시 주도적인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대통령이 ‘K-팝 다음에는 K-민주주의’라고 하잖아요. 오래전부터 ‘위안부’ 문제를 통해 한국의 여성들은 세계를 움직이고 닫힌 문을 열어왔는데, 대통령의 인식이 늦었다고 생각해요. 식민지였던 나라가 독립을 하고, 게다가 군사독재 정권을 거쳐 민주화를 이루고 지금 이렇게까지 여성운동이 출현했다는 면에서, 사실상 한국의 기세가 엄청난 거죠. 이건 소중한 거예요.
미얀마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곳 젊은이들이 한국대사관을 찾아와 ‘도와주세요’라고 했잖아요. 눈물이 다 나요. 한국대사관에 와서 도와달라니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인들이 제대로 인식해야 할 거예요. 점점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요.
Q : ‘K-팝’ 말씀에 불현듯 선생님께서는 일본이나 한국 콘텐츠는 물론 중국어권 콘텐츠까지 보실 정도로 대중문화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지난 30년간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가로지르는 문화 소비나 교류가 활발했잖아요. 초기에는 이것이 동아시아 내 갈등을 해소하는 키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현재에도 차별과 반목은 여전하고 문화 소비는 오히려 그 알리바이로 기능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신숙옥 : ‘나 흑인 친구 있어’ 하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라고 봐요. 게다가 엔터테인먼트는 결국 소비재니까요. 다만 그 안에서 시대의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흥미롭기도 하고요. 사회가 바뀌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잖아요. 모든 건 점진적이죠. 먼저 엔터테인먼트 혹은 대중문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문이 열려요. 그렇게 이전에는 허용되지 않던 것들이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가능성 면에서 일보 전진한 거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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