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을 넘어 공감으로 나아가는 '위안부' 운동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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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이슨 김(Jason Kim)
  • 2025-11-26
제이슨 김 ⓒpop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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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을 넘어 공감으로 나아가는 '위안부' 운동 되길"
미국 첫 ‘위안부’ 기림비 설치 주도한 제이슨 김 인터뷰

 

지난 9월 부산에서 열린 ‘2025 세계한인정치인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재미교포 제이슨 김의 첫 인상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 채소가게에서 일하며 자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모교에서 종신교수까지 된 성공한 재미교포의 모습이다. 대화가 좀 이어진 후 그의 모습은 미국 사회에서 한인이 겪는 부당함에 맞서고 공동체의 힘을 키우기 위해 정치에 입문한 뒤 실제 한인 사회의 존재감이 커지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정치인이다. 그리고 대화를 마칠 때 쯤 그에게서 발견하는 모습은 행동하는 교육가이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들의 치유를 넘어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는, 여전히 말해지지 않아 ‘언톨드(Untold) 스토리’에 머물러 있는 ‘위안부’ 문제가 홀로코스트처럼 ‘웰논(Well-Known) 스토리’가 되어야 한다고, 연민을 넘어 공감으로 나아가는 ‘위안부’ 운동이 되길 강조하는 제이슨 김을 인터뷰했다.

 


Q : 반갑습니다. 웹진 <결> 독자들께 인사를 겸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제이슨 김 : 안녕하세요. 저는 197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와 수학을 전공했고, 1984년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어요. 그로부터 8년 후인 1992년 미국 정치에 도전한 뒤 1995년 버겐카운티 한인 최초 교육위원과 2005년 미동부 최초 한인 시의원을 거쳐 최초 한인 부시장, 카운티 운영 학교 교육위원장 등을 지냈습니다.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에 속한 펠리세이즈파크시의 부시장으로 일하던 2010년 미국 최초로 '위안부' 기림비 설립을 주도한 이들 중 한 사람입니다. 현재 뉴욕시립브롱크스대학에서 수학과 종신교수로 일하면서, 미국 내 한인의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팰리세이즈파크시에서 시의원과 버겐카운티 특목고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번에 대한민국 재외동포청 산하 재외동포협력센터에서 개최한 '세계한인정치인포럼'과 부산대학교와 창원대학교에서 주최한 '국제학술워크숍'에 초청돼 고국을 방문하면서 웹진 <결> 독자들과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LA폭동 이후 절감한 한인 사회의 정치세력화 
그리고 미국 정치 입문

 

Q : 미국 동부 한인 사회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많이 보유하고 계신데, 미국 정치에 입문하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 제이슨 김 : 기점은 뉴욕 '레드 애플 보이콧(Red Apple Boycott)[1]'이 벌어진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대인들이 은퇴를 전후해 넘긴 채소가게, 식료품점, 세탁소 등에 한인들이 들어가서 정말 정신없이 일했어요. 저도 이민을 가자마자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매상에 가서 채소를 떼어 아침 8시까지 내리고, 진열하고, 팔다가 학교에 가는 생활을 10년 넘게 했어요.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을 해야 했거든요. 힘들어서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버틸 수 있으니까 마음 편하게 하나님 쪽을 택한 겁니다. 힘드니까 공부가 더 하고 싶은 거예요. 어머니께 울면서 공부하고 싶다고 한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채소가게와 학업을 병행했어요.

그러다 동종의 한인 채소가게에서 싸움이 벌어진 게 1990년이에요. 한 흑인 여성이 물건을 훔치다 발각됐는데, 거꾸로 억울하다며 가게 앞에서 시위를 시작한 거예요. 서로 의견이 다르고, 시위를 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6피트(약 1.83m) 이내 접근을 금지한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며 시위를 계속하는 거예요. 경찰까지 방관하면서 결국 채소가게는 문을 닫았어요. 저희 한인 커뮤니티에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어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자각'이 생기잖아요. 정치적인 힘을 키우자는 자각이 생겼고, '뉴저지한인유권자협회'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민을 온 지 좀 됐고, 영어도 어느 정도 되는데다 협회 설립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제가 회장을 맡게 됐고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992년에 LA폭동이 일어났어요. 주방위군은 백인 부촌을 보호하느라 공격받는 한인타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더욱 현실적인 자각은 LA폭동 이후에 겪었어요. 미국 정계에 정치인을 진출시킨 유대인 사회나 이태리 사회는 6개월이 지나지 않아 복구가 마무리돼 가는데, 생활 근거지를 거의 잃은 한인 사회에는 1년이 지나도 무관심해요. 정치적인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제적 힘은 모래 위에 세운 건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계기였습니다.

Q : 정치세력화의 효능감을 확인했나요?

🧶 제이슨 김 :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요. 그동안 한인들의 투표권을 얻고 싶어도 공식 창구를 찾지 못했던 미국 정치인들이 엄청 환호했어요.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바꿔 신문에 내주고, 한인들이 원하는 걸 영어로 번역해주니 순식간에 유명해졌습니다.  

 

 

3번의 도전 끝에 성공한 뉴저지주 첫 한인 교육위원

 

Q : 실질적인 정치세력화는 대리가 아니라 커뮤니티 대표를 직접 정계에 진출시키는 거잖아요.

🧶 제이슨 김 : 그렇죠. LA폭동을 목격하며 우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내보내자는 제안이 가시화됐고, 바로 추진하게 됐어요. 첫 대상이 버겐카운티 내 팰리세이즈파크시의 교육위원이었어요. 근데 다 먹고 살기 바쁘니까 나서는 이가 없어요. 당신이 회장이니까 나가래요. 떠밀리듯 나갔다가 떨어졌죠. 근데 멈추질 못해 이듬해, 또 이듬해 나갔어요. 당시 투표권이 있는 한인이 50명 정도인데, 첫 도전 때 350표를 얻었어요. '나를 이용해라, 대신 내가 원하는 것도 하게 해달라'는 저의 목소리가 타 커뮤니티의 호응까지 받았던 것 같아요.  여지를 확인했으니 다시 도전해야죠. 이듬해 두 번째 도전에서는 650표를 받았어요. 조금 더 하면 되겠잖아요. 세 번째 도전 때 이민자에 우호적인 민주당 후보로 나가 당선됐습니다.

Q : 한인 사회에 뿌리를 둔 정치인으로서 추진한 대표적인 활동을 소개해 주세요.

🧶 제이슨 김 : 정치인의 역할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안되는 걸 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인 이민 1세들의 기대 중 하나가 존재를 인정받는 거였어요. 여기에 착안해 요구한 것이 한국어를 병기한 간판이었어요. 미국이 이민자 사회라 특정 커뮤니티가 부각되는 걸 허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고객이 한인인 곳에서 편하게 사용하는 것까지 막을 필요가 있느냐 설득한 끝에 한국어 병기 간판이 가능해졌어요. 한국어를 제2외국어에 포함시키기도 했고요. 이렇게 성취감을 느끼면서 한인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모임을 찾아 다녔고, 10년 동안 교육위원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일방적으로 한인 사회 편만 들지는 않는 중립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시의원, 카운티 운영 고등학교 교육위원 그리고 팰리세이즈파크시 한인 최초 부시장까지 하게 됐습니다.

 

[사진 1] 제이슨 김 ⓒpopcon

 

 

 

'위안부' 기림비 반대한 미 주택연합회와 재향군인회를 설득하다  

 

Q : 놀랍게도 2011년 12월 14일 서울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기 전인 2010년 팰리세이즈파크시 도서관 부지에 일본군'위안부' 기림비가 설치됐습니다. 당시 부시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설치 작업을 추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어떤 계기로 논의가 시작되었을까요?

🧶 제이슨 김 : 2009년으로 기억해요. 버겐카운티 정부에서 ‘위안부’ 기림비 설립 의사가 있냐고 묻는 공문이 왔었어요. 당시 팰리세이즈파크시에도 공문이 왔는데, 메일을 받은 제임스 로툰도(James Rotundo) 시장이 한국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저한테 보여주며 생각을 물었어요. '위안부' 역사를 알고 할머니들의 기막힌 상처를 모르지 않잖아요. 뭔가 해야겠다, 또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Q : 모든 '처음'이 그렇듯이 미국 최초의 '위안부' 기림비 설치 작업이라 순조롭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 제이슨 김 : 막상 시작하니까 한인 사회와 미국 사회가 다 반대했어요. 한인 사회는 '부끄러운' 역사를 왜 들추려 하느냐고 해요. 미국 사회의 반대 이유는 더 견고했어요.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곳이 팰리세이즈파크시 주택연합회와 재향군인회였습니다. 주택연합회는 팰리세이즈파크시 내 모든 기념이나 기림은 이곳에 살거나 살았던 주민과 관련돼야 한다, 또 한 번 허용하면 다민족사회에서 계속 비슷한 요구가 나올 것이라 우려했어요. 타당한 지적이라 할 말이 없었죠. 재향군인회는 미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미국인의 피땀과 무관한 기림비를 왜 팰리세이즈파크시 공공 부지에 설치하려 하느냐, 굳이 원하면 쇼핑몰이나 한국 교회 같은 사유지에서 하라고 해요. 또 도서관 앞 설치에 대해서도 어린이들까지 이용하는 곳에 '성'과 관련된 기림비가 바람직하냐는 지적도 있었고요. 역시 맞는 말이라 어쩌지를 못했어요.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지만 달리 해법을 못찾았어요. 그때 할 수 있는 게 '할머니를 돕게 해달라'는 기도뿐이었어요. 그런데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는지 얼마 후 영감을 받았습니다. ‘위안부’ 기림비에 대한 생각 '레벨'을 올리자는 것이었어요.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처럼 과거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유린당한 여성인권의 문제이자 정의의 문제입니다. 또 가정을 파괴하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가르치는 교육이었습니다. '성'의 어두운 역사도 일찍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했고요. 이처럼 미국 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시선으로 설득하며 약 10개월 동안 다닌 끝에 여성 시의원 신디 페로, 재향군인 조 테스라가 호응하면서 돕겠다고 나섰고,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기림비 설치 2년 후 직면한 일본의 방해 그리고 무력화

 

Q : 미국은 물론 해외 첫 '위안부' 기림비 설치라 당시에 큰 주목을 받으셨을 거 같습니다.

🧶 제이슨 김 : 할머니들을 위해 자그마한 역할이라도 했구나 싶어 좀 뿌듯하긴 했지만 그렇게 막 화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유명세를 탄 건 2년 뒤였어요. 주미 일본대사가 팰리세이즈파크시에 관심이 있다면서 시의회에 연락을 해왔어요. 당시 일본이 가진 막강한 경제력을 아니까 시와 시의회 공무원 모두 흥분했죠. 그런데 메일을 보니까 회의 참석 명단에 부시장인 제 이름과 또 다른 한인 출신인 시의회 의장의 이름이 빠져 있는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따지니까 참여하는 것으로 조정이 됐어요. 

그리고 회의 당일, 일본대사가 시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지원하겠다, 벚나무도 500그루 심어서 해마다 벚꽃축제를 하자, 줄줄이 제안을 꺼냈어요. 모두 좋다며 반색을 했고요. 그러더니 마지막에 한 가지 조건이 있대요. 뭐냐 그랬더니 '위안부' 기림비를 없애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달래요. 제가 그렇게 화를 드러내는 경우가 잘 없는데, 그때 책상을 쾅 내려쳤어요. 할머니들이 살아 계신데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옛날 일이냐, 당신들 유태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 가서 홀로코스트 기림비를 없애달라고 할 수 있느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나가라, 소리를 쳤죠. 시장, 행정서기는 너무 놀라서 말을 못하고, 일본 쪽에서는 이웃에서 불평을 할 거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하고 물러서면서 이틀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회의가 끝났어요.

다음 회의를 앞두고 급하게 일본어가 가능한 통역을 구했어요. 언어 때문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게 중요하잖아요. 두 번째 회의에는 일본 국회의원이 3명이나 왔고, 입장도 더 강경했습니다. '위안부' 역사가 틀렸기에 기림비가 있으면 안 된다고 정식으로 철거를 요구했습니다. 받아들일 수가 없잖아요. 역사가 틀린 것이 아니고 당신들이 잘못 알거나 부인하는 것이다, 기록과 할머니들의 증언이 있다며 맞섰죠. 2시간 넘게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다가 점점 일본 쪽이 밀렸어요. 통역을 대동한 게 주효했습니다. 잘못된 내용을 말하면 저희가 딱딱 끊고 반박을 했거든요. 급기야 저희가 ‘그럼 피해자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함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계신 광주 나눔의 집에 가서 물어보자’고 했죠. 당연히 일본 쪽은 갈 수 없다고 뒷걸음질을 치고, 그러면 더 이상 대화는 없다고 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가면서 한 마디를 해요.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This is not the end, this is the beginning)'이라고요. 고소를 하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기림비가 주민들한테 혐오를 부추긴다면서요. 곧바로 주 상원, 하원 의원들에게 연락해 기림비를 보호할 수 있는 결의안을 요청했더니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이미 마이클 혼다 의원이 발의해 2007년 통과된 '미 연방의회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도 있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반전평화교육이기도 하니까요. 다음 방어막은 언론이었어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중국 등의 언론에 적극 알렸죠. 중국 CCTV에서도 왔고, 특히 CNN, Fox, CH9, Ch11, CH14, PBS, 뉴욕타임즈 등 미국 언론의 관심이 컸어요. 주택연합회와 재향군인회를 설득할 때처럼 기림비가 전쟁 대신 평화와 여성인권, 가정의 행복을 지키려는 상징이라는 명분을 설명하니까 너무 공감하는 겁니다. 한 리포터는 인터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기림비를 철거하라는 일본의 요구는 들어갔고, 갑자기 제가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Q : 인근 지역사회에도 여파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제이슨 김 : 네, '위안부' 기림비에 대해 묻는 곳이 많았어요. 작은 지방정부 단위에서 일본 정부와 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방어막을 쳐야 하는지부터 주와 카운티의 지원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방법 등 그동안의 제 경험을 나눠드렸어요. 몇 달 뒤 인근 뉴욕주 롱아일랜드 아이젠하워파크에 두 번째로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질 때 결의안을 같이 설치하는데 도움이 좀 드렸고요. 뉴저지주 헤켄색에 김동석 씨에 의해서 세 번째 기림비가 세워진 2013년에는 뉴저지주 상원, 하원에서 팰리세이즈파크시 기림비를 기리는 결의안까지 통과됐습니다.
저희가 특히 강조한 부분은 공공 부지 설치와 교육적 접근이었어요. 기림비를 설치하는 이유는 잔인한 역사가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 나아가 세계가 지향하는 공공의 가치로 공유되어야 한다고 확신했거든요. 공공 부지와 교육은 그 양면이에요. 물론 일본과 다양하게 협력해온 미국 사회에는 부담일 수 있고, '배신으로 비친다'는 우려가 있는 걸 모르지 않았어요. 그래도 미래 가치를 포기해선 안 되잖아요. 다만 할머니들의 피해와 상처를 앞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고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도 절실하지만 그보다 지역이 다르고, 강도가 다르고, 시기가 다를 뿐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비극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세계에 알리고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진 2] 제이슨 김 ⓒpopcon

 

 

그가 대한민국 청소년 특강을 자처하는 이유

 

Q :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의 문제로 축소되지 않도록 애써주신 과정 자체가 기록으로 남겨져야 할 또 하나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는 '일본군'위안부'를 위한 미국 최초의 기림비(Commemorating The First U.S. Memorial For "COMFORT WOMEN")'을 부제로 한 잡지 「COME FROM THE SHADOWS-ART&WRITING」를 발간하셨어요. 청소년들의 참여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제작 목적이 궁금합니다.

🧶 제이슨 김 : 모든 일은 소통이고, 교육입니다. 이 둘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그릇으로 잡지를 생각했어요. 마침 '위안부 초상화가'인 스티브 카발로 씨가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고 작품화해 전시를 한 후였어요. 정말 소중한 작업이잖아요. 상의를 드렸더니 감사하게도 잡지에 할머니를 담은 작품과 증언까지 담는 것을 허락해주셨고, 잡지도 함께 만들기로 했어요. 기림비 제막식 모습부터 일본 측과 치열하게 싸우던 모습까지 전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저희 활동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타임라인도 정리했어요. 여기에 제가 교육자니까 지역의 8~10학년 학생들을 참여시켰어요. 미국에서는 8학년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워요. 글로벌 리더로 자라날 이 친구들에게 여성인권과 평화의 상징인 '위안부' 역사와 책임의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할 기회이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뻔 했어요. 'If I Scream'이라는 시부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상처와 역사를 기억하고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큰 소리로 외치겠다는 산문까지, 모두 마음을 울리는 훌륭한 작품들이었어요. 2026년에 새로운 에디션을 발행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Q : 이번 방한 중에 세계한인정치인포럼 프로그램 외에 국내 청소년들에게 직접 연락해 특강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제이슨 김 : '위안부' 기림비를 설치한 것은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과 치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낳는 전쟁 범죄를 고발하는 것, 나아가 여성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를 알지 못하는 우리 젊은 세대가 역사로부터 배우고, 세계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 압축된 상징입니다. 이 의미를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림비를 세운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돼요.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고, 수 백명 앞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제가 중고등학교 때는 대인공포증이 심한 아이였어요. 책을 읽다가 운 적도 있다니까요. 이걸 좀 다스려보려고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흥사단을 다녔어요. 덕분에 애국심, 정의에 대한 소명 의식을 배웠고, 교육자로서 잃지 않으려 한 자세입니다. '위안부' 역사는 이러한 메시지를 종합적으로 담아 전달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하지만 한국에 올 기회가 있으면 먼저 방문할 예정인 지역의 인근 중고등학교에 연락을 드려요. 공항 근처 학교는 기본이고, 동선을 고려해 대략 10군데 정도 추려 특강을 할 수 있으니 원하면 연락을 달라고 해요. 이번에는 부산국제고, 전주 신흥고 등 4군데에서 연락을 주셔서 학생들과 신나게 만나고 왔습니다.

 

 

'sympathy'에서 'empathy'로, 중요한 것은 행동

 

Q : 학생들과 함께하는 특강에서는 어떤 내용을 강조하시나요?

🧶 제이슨 김 : 전쟁과 폭력, 혐오, 기아문제, 기후문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위협하는 문제가 많고 동시에 이 문제들은 서로 연결돼 있어 지구적으로 대처하고 풀어야 합니다. 세계시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미래 세대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문제이기에 어느 때보다 글로벌 리더로서의 소양이 필요하고요. 이런 생각을 전하는 특강은 '글로벌 리더 되기'로 요약할 수 있는데, 제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행동과 소통, 언어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언급하는 개념이 'sympathy'와 'empathy'예요. sympathy는 연민 혹은 측은지심으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 이웃과 약자의 불행을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empathy는 공감, 즉 sympathy에다 자신의 문제로 받아 안아 무언가를 행하는 한 차원 높은 지적 각성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즉 강도를 만나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도운 사마리아인의 '선한 마음'인데, sympathy와 empathy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것이 행동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고,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어요. 
'sympathy'와 'empathy'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면, 글로벌 리더가 갖춰야 할 능력은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포용력, 올바른 판단력과 행동력이에요. 이를 위해 언어가 미치는 영향, 책과 참여 등을 통한 직간접 경험 등을 소개합니다.

Q : '위안부' 문제도 언급을 하시나요?

🧶 제이슨 김 : 당연합니다. 글로벌 리더의 태도와 능력을 말할 때 빠뜨리지 않는 사례입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피해와 상처를 알게 되면 누구나 가슴이 아파요.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은 물론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공감하고 해결하려는 정의로운 노력 덕분에 인류 사회가 발전해왔다는 거예요. '위안부' 문제 또한 다르지 않아요. 할머니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sympathy에 행동을 더한 empathy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위안부' 문제가 불법적인 전시 성폭력이자 여성인권과 평화, 가족의 문제라는 것을 글로벌 어젠더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국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당당하게 대화하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요. 물론 쉽지 않죠. 하지만 홀로코스트가 누구나 다 아는 '웰논(Well-Known) 스토리'가 된 것은 어렵고 힘들지만 이 길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위안부' 문제는 '언톨드(Untold) 스토리'예요. 아직 알려지지 않고, 공감되지 못했기에 '운동'이 되지 못했고 '세계화'되지 못한 겁니다. 잔인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각자의 능력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시민의 책임이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 학생들이 꼭 배우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전하고 싶어 특강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사진 3] 제이슨 김 ⓒpopcon

 

 

계획은 미 학생 커리큘럼에 '위안부' 역사 넣기, 
세계 곳곳 '위안부' 기림비 설치하기

 

Q : '위안부' 문제가 '언톨드(Untold) 스토리'에서 '웰논(Well-Known) 스토리'로 나아가야 하고, 이를 위해 한국 사회가 할 일에 대해 말씀주신 부분,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거 같습니다. 마무리 말씀으로 교수님의 향후 활동과도 연결될 것 같은데, 어떤 계획을 구상하고 계신지 들려주세요.

🧶 제이슨 김 :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해야' 해요. 그래야 보폭을 더 넓히고, 세계화할 수 있으니까요. '위안부' 문제 또한 여러 국가, 시민사회, 학생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내년에 잡지 'COMFORT WOMEN' 다음호를 발간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또 저는 교육자니까 뉴저지주와 뉴욕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교육위원들과 상의해 8~10학년 학생들의 커리큘럼에 '위안부' 역사를 포함시키는데 신경을 더 쓰려고 합니다. 세계 곳곳에 '위안부' 기림비를 설치하는 계획도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과 유럽 등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는데, 여기에 더해 몽고,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서도 추진하려 합니다. 기림비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이런 종류의 범죄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메세지를 전하려 합니다.

[사진 4] 제이슨 김 ⓒpopcon


 

각주

  1. ^편집자 주 : 레드 애플 보이콧은 1990년 1월 18일 뉴욕 시 브루클린(Brooklyn) 지역의 한인 청과 상인과 아이티계 이민자 고객 사이에 15개월 동안 벌어진 분쟁과 보이콧 운동을 말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에 대한 인식이 흑백 간의 분규에서 복잡한 다인종, 다민족 갈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인터뷰이 제이슨 김(Jason Kim)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를 졸업했다. 1975년 미국으로 이민간 뒤 뉴욕시립브롱크스대학과 퀸즈대학 등에서 컴퓨터 사이언스와 수학을 공부했다. 1992년 미국정치에 입문해 1995년 버겐카운티 한인 최초 교육위원, 2005년 미동부 최초 한인 시의원을 거쳐 최초 한인 부시장, 카운티 운영 학교 교육위원장 등을 지냈다.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펠리세이즈파크시의 부시장으로 일하던 2010년 미국 최초로 '위안부' 기림비 설립을 주도했고, 현재 뉴욕시립브롱크스대학에서 수학과 종신교수로 일하면서, 팰리세이즈파크시에서 시의원과 버겐카운티 특목고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