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그거 정치적 중립성 위반 아니에요?”
일본군‘위안부’나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가르치다 성평등 문제나 12·3 비상계엄을 언급할 때 이런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하는 교사가 많다. 그래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내용은 아예 꺼내지 않거나, 교과서만 읽는 식으로 진행하고 서둘러 다음 진도로 넘어간다. 교실 밖에서 역사 왜곡·부정 콘텐츠를 보고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이를 교실 안으로 가져오거나, 극단적인 정치적 발언, 혐오 표현을 해도 이를 바로잡는 것이 망설여질 때도 있다.
교사의 이러한 자기검열이 쌓이면 교실에는 회피와 힘의 논리가 자리잡는다. 학생들은 ‘위안부’ 역사를 왜 지금도 기억해야 하는지, 계엄이라는 헌정 파괴 시도가 왜 문제인지, 혐오와 차별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논쟁하고 배우는 대신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감각만 배운다. 혹은 학생의 견해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교사의 입을 막을 수 있다는 권력의 작용을 학습한다. 이 과정에서 정작 민주주의에 필요한 시민적 역량 즉, 공적 사안에 대해 스스로 근거를 세워 판단하고 그 판단을 두고 다른 시민과 대화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라는 사회 현실이 학교 안으로 침투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인권 규범에 근거해 역사적 부정의나 국가폭력, 젠더폭력을 비판해 왔던 ‘사회적 합의’의 영역들이 이제는 진영 논리 속에서 논쟁 가능한 ‘해석의 영역’으로 치부되면서 교실 밖 논쟁이 교실 안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교사나 교육기관이 특정 정치적 시각이나 정파적 입장을 교육에 개입시키는 것을 막는 기준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쪽 진영이 다른 쪽을 공격하는 무기, 곧 민원이라는 형태로 자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실제로 교육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중립성은 특정 세력이 자신에게 불리한 교육 내용을 통제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민주시민교육이나 비판적 교육을 ‘좌파 교육’으로 ‘프레이밍(framing. 같은 문제라도 사용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느냐에 따라 사용자의 판단과 선택이 달라지는 현상)’하면서,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명분 아래 이를 제한하려는 시도이다.
헌법과 교육기본법이 요구하는 정치적 중립성 원칙은 본래 국가나 정당 등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수호하고 교원의 신분과 교육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이자 외압 배제의 규범이었다. 또한 교사나 교육기관이 학생들에게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일방적으로 주입하거나 편파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한다. 학생의 자율적 판단 능력을 키우고, 자주적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수업이나 교육 활동에서 정치적 파당성을 배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중립성 원칙은 정반대의 효과를 낳고 있다. 한 교원단체가 2025년 교사 1,91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교사 중 84.4%가 정치적 중립성 위반으로 오해될 것을 우려해 수업 또는 지도를 포기하거나 축소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정상적인 교육 활동이었음에도 정치적 중립성 위반으로 신고·고소를 하겠다고 위협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도 91.2%에 달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교과서 내용대로 가르쳤을 뿐인데 ‘좌파 사상 주입’이라는 민원을 받은 뒤로 “이제는 교과서 글씨만 읽고 배경 설명은 생략한다”고 답한 교사의 사례는, 진영에 따라 갈라진 여론 속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교육 현장에서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1]
이처럼 굴절된 정치적 중립성 원칙이 지배하는 교육 현장에서 교사는 가능한 한 어떤 입장도 명시적으로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아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교육적 실천은 완전한 중립과 주입 사이의 스펙트럼 상 어딘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실을 가르칠 지를 선택하는 행위 자체에 이미 편향이 개입되어 있으며,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은연중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교사는 학생의 인식과 가치 형성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위적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함을 요구받는다. 교사가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을 드러내는 순간 학생들은 이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는 개입해야 할 교육적 의무와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규범 사이에 놓이게 되는데, 어디까지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지는 모호한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
이 모호함 앞에서 판단의 부담은 교사 개인에게 떠넘겨진다. 어떤 개입이 정당한 교육이고 어떤 개입이 편향인지, 그 기준을 교사 스스로 매번 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헌법은 민주주의, 기본권, 법치주의 같은 정치적 가치를 담고 있지만, 이를 사실로서 가르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비상계엄처럼 헌법적 가치가 실제로 위협받는 사건이 벌어져서, 교사가 헌법을 근거로 이러한 행위가 잘못됐다는 평가적 판단을 내리게 되면 이는 중립적 사실 전달자에서 벗어나 하나의 ‘입장’을 취한 것이 된다. 이는 헌법 내용에 근거해 사실을 검토하는 시민적 추론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듣는 사람의 정치적 위치에 따라 갈릴 수 있다. 어떤 학부모는 당연한 헌법 교육으로, 다른 학부모는 특정 정파를 편드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교사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발언한다 해도, 그 발언 자체가 이미 정치화된 사회적 공간 내에서 전달되는 이상 중립적 효과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원이라는 자의적 권력이 작동할 여지가 생긴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기준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민원을 제기하는 쪽은 얼마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기준을 끌어다 쓸 수 있다.
판단의 부담을 진 교사가 합리적이라면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민원에 대비해 방어적인 입장에서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논쟁적인 정치사회적 이슈나 역사 문제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배제하고 의견이나 해석이 갈리는 내용에 대해 기계적으로 분량을 맞춰 중립적으로 제시되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2]
그러나 기계적 중립성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편향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오늘날 학생들은 매우 이른 시기에 정치사회화를 경험하고 있다. 가정, 지역사회, 미디어, 또래 문화 등 다양한 사회적 영향 속에서 이미 특정한 정치적 감수성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는 온라인 환경에서 폐쇄적인 또래 집단의 영향력 하에 더욱 강화된다. 이에 따라 성평등 교육도 특정한 가치를 주입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한다는 반발이나 백래시(backlash) 행동에 직면하고 있다.[3]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가 중립을 지키려고 하면, 실제 수업에서는 암묵적으로 보수적 정치관을 용인하거나 지지하는 방향으로 교육적 선택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이미 형성된 학생들의 편향은 교정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교육은 외부에서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형성된 왜곡된 인식을 묵과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중립성을 실천하는 일반적인 교육 방법은 교사가 어떤 가치가 옳고 그른지를 직접 가르치는 대신, 학생 스스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자칫 기계적인 중립으로 드러나면 “나는 내 의견이 있고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있으며, 누가 옳은지는 알 수 없다”는 식의 가치 상대주의와 지적 냉소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 요즘 청소년 문화에서 혐오와 조롱은 하나의 놀이가 되어 있다. 5·18민주화운동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같은 역사적 비극이 자극적인 밈의 소재로 소비되는 한편, 어떤 가치든 진지하게 믿거나 분노하는 사람을 ‘진지충’, ‘선비’라 부르며 조롱한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 교사가 양쪽을 조심스럽게 나열하면, 그것은 균형이 아니라 눈치 보기로 비칠 뿐이다. 냉소가 자리 잡은 교실에서 어설픈 중립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된다.
권위주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만 누려온 세대에게, 기성세대가 가르치는 민주주의·인권·사회적 약자 보호는 소중한 가치가 아니라 ‘자신들을 억압하고 가르치려 드는 꼰대 규범’으로 다가온다. 현실은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인데 입으로만 올바른 소리를 하는 기성세대의 도덕성을 ‘위선’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성역’을 노골적으로 혹은 미묘하게 모욕하는 이들의 행위는 ‘당신들의 위선을 깨부수는 솔직한 날것의 반역’이라는 정의감(해방감)을 안겨준다.
이러한 사고가 자라나는 것은 잠재적·현재적 시민인 학생들에게 그들이 발 딛고 선 지금 여기의 문제들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설득력 있는 이유와 동기를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4]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올바른 거야!”라고 강변하는 허세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들이 경험하는 학교란 입시 경쟁으로 서열화된 곳, 부모들이 자신의 돈과 권력을 이용해 자식들에게 좋은 배경을 물려주기 위한 곳, 노골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곳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드라마나 웹툰을 통해 표상되는 학교란 존엄한 대우를 받는 민주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존재들이 얼마든지 타인을 모욕할 수 있는 곳이거나, 자신들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어린애 취급을 받는 곳이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에서 학생들이 민주적 가치를 습득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를 ‘비정치적인 공간’으로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교가 정치와 무관한 중립적 공간이라는 전제 아래에서는 교육이 지니는 정치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기 어렵다. 교육은 가치 중립적인 빈 공간에서 진행되는 비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구조와 규범을 재현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학교를 비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이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내부에서 작동하는 권력 관계와 지배 구조를 비가시화한다. 학교는 비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을 비롯한 모든 학교 공동체 구성원이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를 누리는 민주적 공간이어야 한다. 학교라는 일상에서의 민주적 실천을 통해 시민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함양하고 민주적 규범을 내면화할 때 민주주의의 문화적 토대가 강화될 수 있다.[5]
오늘날 정치적 양극화는 단지 여론의 갈등 수준을 넘어,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자체를 위협하는 구조적 현상으로 심화되고 있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적대감은 상호 불신, 혐오, 심지어 폭력적 수사와 행위로 이어지고, 이러한 경향은 시민사회의 분열뿐 아니라 정치제도의 마비와 민주주의 퇴행을 초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논쟁적인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도 폭넓게 존재한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정치적 중립성 원칙이 민주시민교육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효과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주시민교육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그동안 제한되어 온 교사의 정치기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일선 교사들이 교육 현장에서 판단의 부담을 홀로 짊어지지 않도록 제도적 차원에서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무엇이 정당한 교육적 개입인지를 개별 교사에게 판단을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교육공동체가 함께 논의해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다. 교사가 부당한 민원에 맞서 자신의 교육적 판단을 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절차적 경로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2026년 8월, 국가교육위원회가 「학교시민교육 국가 기본원칙(안)」을 마련하고, 정당한 교육활동이 민사상·형사상·행정상 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한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그리고 이에 근거에 악성 민원과 법적 분쟁을 방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면책권과 수업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양극화 시대의 민주시민교육은 다음과 같은 실천 방향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 교사가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되, 학생의 이의 제기를 열어두는 것이다. 교사가 자신의 생각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과 그 생각을 학생에게 주입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학생의 반박을 허용하지 않지만, 전자는 오히려 학생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를 되묻고 논쟁할 공간을 열어준다. ‘위안부’ 역사를 가르치며 역사부정론을 담은 유튜브 영상을 학생들과 함께 보고 그 주장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같이 따져보는 수업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이 문제를 전쟁과 젠더, 국가폭력과 인권의 문제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6]
둘째, 관용을 ‘모든 의견은 동등하다’는 가치 상대주의가 아니라 '어떤 입장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배제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범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혐오 표현이나 역사 왜곡 앞에서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며 물러서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방기에 가깝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왜 다수 시민의 자유까지 잠식하는지, ‘중립’이라는 언어가 실제로는 누구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 동원되어 왔는지를 구체적 사례로 짚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교실 자체가 냉소와 서열 대신 우정과 돌봄으로 채워져야 한다. 체육 활동을 통해 협력과 갈등 조정, 감정 표현 등 사회 정서 역량을 강화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 등에서 돌봄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의 취약함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7] 입시 경쟁과 위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만 익힌 학생에게 민주주의는 위선처럼 느껴질 뿐이다. 우정과 돌봄을 실제로 경험해 본 학생만이 민주적 가치의 소중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만큼,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늘려야 한다.[8]
마지막으로, 의견 차이를 적대가 아니라 조정과 타협의 대상으로 다루는 경험을 학생들에게 다양하게 제공해야 한다. 학급 및 학교 규칙 제정, 학교 예산 일부의 기획·집행, 또래조정 활동 등을 통해 학생들은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공동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기술을 익히게 된다.
민주시민교육은 정부의 결정이나 교사 개인의 용기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 학생, 전문가, 학부모, 시민들 사이의 개방적이고 지속적인 논의 과정을 통해 이를 공동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학교의 문화를 바꾸는 것이자, 민주주의 규범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