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계일본군‘위안부’기림일에 KBS 탐사 프로그램 <추적 60분>에서 방영한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 편은 인도 벵골만에 위치한 안다만제도에서 한 영국군이 촬영한 젊은 여자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여자들이 어떤 집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 빛이 바래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지만 키가 제각각인 여자들이 한데 모여 서 있는 장면, 제복을 입은 영국군 두 명과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일곱 명의 여자가 기념사진을 찍듯 나란히 서 있고 그 앞을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가는 장면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어서 어떤 교통수단에 올라 바깥을 내다보는 여자들, 무성한 야자나무를 등지고 클로즈업된 여자들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 무성 영상의 장면들 속에서 실제 어떤 소리가 들리고 있었을까 . 군인들의 구령과 목소리, 매미 울음과 파도 소리, 야자나무 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와 땅으로 떨어지는 야자 열매의 둔탁한 소리. 그 사이로 영어와 일본어, 안다만제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여러 말이 뒤섞이고, 여자들의 조선어가 들렸을지도 모른다.
영상은 이 모든 소리를 잃어버린 채 전해졌다. 화면에는 여자들이 있었던 집과 교통수단을 타고 가는 사이 보이는 배경, 강아지와 야자나무, 여자들의 얼굴과 옷이 남아 있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서로를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남아 있지 않다. 영국 군인이었던 촬영자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어도 카메라 앞에 선 여자들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소리가 사라진 영상 속에서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여자들을 하나의 상황 속에 놓인 존재들로 짐작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결같이 비슷한 옷차림이다. ‘간단후쿠’.
간단후쿠를 입은 한 명 한 명의 삶을 알 수 없는 우리는 간단후쿠가 집에서 나오는 장면, 간단후쿠가 늘어서 사진을 찍는 장면을 본다. 얼굴이 촬영되어 있지만,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없고, 그들이 ‘간단후쿠’를 입고 있었다는 것만 알게 된다. 간단후쿠가 집 안에서 나오고, 간단후쿠가 나란히 서고, 간단후쿠가 두리번거리고, 간단후쿠가 말한다.
김숨의 소설 『간단후쿠』 표지에는 흰 선으로 그려진 간단후쿠의 실루엣과 노란 개나리꽃이 겹쳐져 있다. 옷의 윤곽은 있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몸과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개나리꽃 한 송이가 놓여 있다. 개나리는 이 소설의 서술자 ‘요코’가 위안소로 오기 전에 가졌던 본명이다. 개나리라는 조선어 이름은 ‘요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대체되고, 그 몸에는 간단후쿠가 입혀진다. 책 표지에는 본래의 이름을 가진 몸이 사라지고 꽃과 옷의 윤곽만 남는다.
몸과 얼굴이 비어 있는 간단후쿠의 실루엣은 그 옷을 입은 여성들의 차이가 어떻게 지워지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어떤 몸이나 간단후쿠를 입을 수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이름과 얼굴을 지닌 여성들을 대체 가능한 몸으로 만든 폭력의 형식을 드러낸다. 요코, 나오미, 나나코처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들은 간단후쿠를 입고, 벽으로 나뉜 각각의 방에 배치된다. 고유한 삶을 가진 사람이 위안소라는 공간 속에서 일정한 자리를 부여받고 반복해서 사용되는 사물로 전환된다.
이때 인간의 사물화는 사람을 물건처럼 바라보는 인식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을 일본군의 군수품이나 천황의 하사품으로 취급하는 언어는 그 몸을 다른 사물들과 연결하고, 군사적 성폭력의 장치 안에 실제로 배치한다. 여자들의 몸은 방과 벽, 군표와 삿쿠(콘돔), 간단후쿠와 철조망, 군인의 명령과 정해진 차례 속에 놓인다. 이 요소들이 서로 연결될 때 위안소는 성폭력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의 몸은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맞춰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거대한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간단후쿠』의 여자들은 위안소라는 성폭력 장치 속으로 끌려들어가 그 장치의 작동에 필요한 사물로 바뀐다. 김숨은 여성들이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그 참상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몸을 거래하고 이동시키는 말, 여자들을 나누어 수용하는 방과 벽, 빨아서 다시 사용하는 간단후쿠와 삿쿠처럼 폭력의 반복을 가능하게 한 요소들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사물화된 몸과 언어, 질병과 역할, 반복되는 행위와 소리가 그로테스크하게 배치되고 서로 연결되면서 위안소라는 성폭력 장치의 전체 형태가 드러난다. 인간과 사물의 경계가 무너지고 몸에서 분리된 사물과 소리가 스스로 움직이는 듯 서사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소설은 하나의 고딕 판타지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환상은 역사적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개별적인 폭력의 장면이라기보다 그러한 폭력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시스템의 작동이다. 누가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 몸과 사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여성의 몸과 겹쳐진 간단후쿠가 어떻게 반복해서 폭력의 자리로 돌아오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사실적인 재현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위안소의 비인간성과 반복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이처럼 『간단후쿠』가 그리는 지옥의 조립도는 인간을 사물의 자리로 밀어 넣는 순간, 곧 사물화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일본군‘위안부’ 서사가 반복해서 상상하고 묘사해 온 장면 중 하나는 위안소 내부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이다. 많은 소설과 영화는 성폭력이 벌어지는 순간을 구체적이고도 참혹하게 재현해 왔다. 그 과정에서 가해 일본군의 잔혹성과 악마성이 부각되고, 반대로 피해 여성의 처녀성과 순결이 강조되기도 했다. 반복되는 폭력의 구조를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 칸막이로 나뉜 위안소 내부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여러 방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을 제시한 영화와 그림도 있었다.
그러나 성폭력 장면을 아무리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여러 방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한 화면에 담더라도, 그것만으로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체계적인 폭력성이 충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재현에서 성폭력은 대개 잔혹한 일본군과 무력한 피해 여성 사이에서 벌어진 개별적인 사건으로 제시된다. 동일한 장면을 반복하거나 병렬적으로 배열하는 것만으로는 누가 여성들을 그 방에 데려다 놓았는지, 무엇이 그들의 몸을 거래하고 분류했는지, 폭력이 어떻게 반복 가능한 일상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어렵다. 일본군‘위안부’ 서사가 일본군을 악마화하고 피해 여성을 순결한 민족의 딸로 재현한다는 비판도 폭력의 체계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에 집중해 온 이러한 재현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위안소 관련 사진 가운데에는 위안소 앞에 모이거나 줄지어 선 일본군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 여성들은 보이지 않고, 군인들이 향하는 문 너머에 있다. 성폭력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진은 군인들이 같은 공간을 향해 줄을 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얼굴과 행동보다 동일한 제복을 입은 몸들의 대열이 강조되면서, 군인의 줄은 개별적인 성폭력을 군대 전체가 반복하는 집단적 행위로 조직하는 장치로 나타낸다. 사진에 고정된 대열을 『간단후쿠』의 서술과 겹쳐 읽으면, 한 군인이 문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줄이 한 칸 줄고 다음 군인이 같은 자리를 통과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반복되는 움직임의 끝에는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 여성의 몸이 놓여 있다.
『간단후쿠』는 사진에 고정된 이 줄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품 속에서 “열 개의 널빤지 방”과 “열 개의 널빤지 문” 앞에는 각각 군인들의 줄이 만들어진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한 군인이 나오고 다음 군인이 들어간다. 사진 속에서 침묵한 채 서 있던 군인들의 몸에 “키에로(꺼져)”라는 구령과 발소리, 문이 요동하는 소리, 군복을 벗고 삿쿠를 씌우는 소리가 더해진다. 소설은 사진이 보여주지 못한 문 너머의 공간과 그곳에서 반복되는 폭력의 리듬을 사물과 소리로 조립한다.
“열 개의 널빤지 방/ 열 개의 널빤지 문/ 열 개의 널빤지 문마다 군인들이 한 줄로 ‘줄 서기’를 한다.”(중략)“금세 열 개의 줄이 만들어진다.”(중략)“새치기를 하려는 군인이 있으면 군인들은 외친다. “키에로!”(중략)”“키에로는 만주에 울려 퍼지는 전투함성이다”(중략)“널빤지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눈금자의 눈금이 지워지듯 줄이 줄어든다.”(중략)“줄들이 매달려 있는 널빤지 문들도 덩달아 요동친다.”(중략)“돌림 노래 한 소절은 삿쿠 하나다./ 돌림노래 한 소절은 군표 한 장이다.”(중략)“돌림노래가 빨라지면 열 개의 방은 기차가 되어 뚜뚜 기적을 울리며 들판을 제 집 마당처럼 휘젓고 다닌다.”(『간단후쿠』 중 「돌림노래」장 일부 발췌)
열 개의 방과 열 개의 문, 열 개의 줄은 같은 수로 반복되면서 위안소의 공간과 군인의 움직임을 규격화한다. 각각의 방에는 여자 한 명이 놓이고, 각각의 문 앞에는 군인들의 줄이 만들어진다. 문이 열리면 한 군인이 들어가고, 그가 나오면 다음 군인이 같은 자리를 통과한다. 줄은 “눈금자의 눈금이 지워지듯” 하나씩 줄어들지만,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횟수는 그만큼 늘어난다. 군인은 얼굴과 이름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눈금으로 환산되는 수가 되고, 여성의 몸은 그 눈금이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에 고정된다.
“줄들이 매달려 있는” 널빤지 문이 “덩달아 요동친다”는 표현은 군인의 대열과 위안소의 건축물을 하나의 움직이는 장치로 결합한다. 문은 폭력의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군인들을 차례로 들여보내고 내보내며 성폭력을 다음 순서로 전달한다. 새치기하는 군인을 향한 “키에로”가 “만주에 울려 퍼지는 전투함성”으로 변하는 순간, 위안소 앞의 줄서기는 전장의 집단적 질서와 연결된다. 전장에서 적을 향하던 군대의 대열과 함성이 위안소에서는 여성의 몸을 향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로써 위안소의 성폭력은 전쟁 바깥에서 일어난 군인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군대의 이동과 위계, 집단적 규율과 보급체계 안에서 조직된 제도적 폭력이다.
김숨은 서로 다른 방에서 반복되는 성폭력을 ‘돌림노래’라는 장으로 만들었다. 돌림노래에서는 앞선 소절이 이어지는 동안 다른 사람이 같은 선율을 시간차를 두고 시작한다. 위안소에서도 한 방의 폭력이 끝나기 전에 다른 방에서 같은 폭력이 시작된다. 문과 군복, 삿쿠는 성폭력에 부수적으로 딸린 소품이 아니라 폭력의 준비와 실행, 교대를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서로 다른 방에서 시간차를 두고 발생하는 폭력과 사물의 소리가 중첩되면서 위안소 전체가 하나의 그로테스크한 돌림노래로 변한다. 그 속도가 빨라지면 고정되어 있던 열 개의 방마저 기적을 울리며 들판을 질주하는 기차가 된다. 위안소의 공간 전체가 폭력의 속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로 변형되는 고딕 판타지이다.
“돌림노래 한 소절은 삿쿠 하나”이고 동시에 “군표 한 장”이다. 한 소절과 한 차례의 성폭력, 삿쿠 하나와 군표 한 장이 서로 등가를 이룬다. 성폭력은 한 여성에게 일어난 고유한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고 삿쿠의 개수와 군표의 장수로 환산된다. 삿쿠가 폭력의 횟수를 세는 단위가 된다면, 군표는 그 폭력을 계산하고 거래할 수 있는 행위로 바꾼다.
『간단후쿠』가 재현하는 체계적 성폭력은 개별적인 폭력 장면들을 모아놓은 전체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몸과 군인의 줄, 널빤지 방과 문, 삿쿠와 군표, 전투함성과 사물의 소리가 연결되면서 동일한 폭력을 다음 차례로 전달하는 작동 방식이다. 김숨은 성폭력의 순간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대신 그것을 반복 가능하게 만든 사물의 움직임과 소리를 들려준다. 스즈랑 여자들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의 돌림노래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숫자와 차례, 사물과 역할로 전환되는 성폭력 장치의 리듬을 지속하는 지옥의 고딕 판타지이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밤마다 군인들과 부르던 돌림노래를 기억하는 것이다.”(272쪽) 요코라는 이름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고유한 이름이면서, 동시에 위안소의 폭력 속에서 개나리에게 강제로 부여된 이름이다. 따라서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빼앗긴 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리며 겪었던 폭력의 리듬까지 되살리는 일이 된다. 돌림노래가 끝난 뒤에도 그 박자는 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요코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그 노래를 부르던 여자들의 이름, 그들이 낳은 아이와 그들에게 닥친 죽음을 기억한다.
위안소라는 공장이 생산하는 것은 ‘간단후쿠가 된 여자들’만이 아니다. 여자들의 임신과 출산, 그들이 낳은 아이의 삶과 죽음까지도 성폭력 장치의 작동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레이코가 낳은 아기는 바늘장수에게 팔린다. 여자의 몸이 거래된 것처럼 그 몸에서 태어난 아기의 생명도 거래된다. 위안소에서 탄생은 폭력의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가 되지 못한다.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와 분리되어 또 다른 거래의 대상이 되고, 여성의 몸에서 시작된 사물화는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고토코는 죽은 아기의 뼈를 품에 안고 있다가 강물에 띄워 보내는데, 이 장면에서 생명을 품는 행위와 죽음을 떠나보내는 행위가 기묘하게 포개진다. 고토코가 품에 안은 것은 살아 있는 아기가 아니라 아기의 뼈이다. 한때 몸의 일부였던 뼈는 아기의 몸에서 분리된 사물이 되지만 아무 의미 없는 물질로 남지는 않는다. 고토코가 그것을 품에 안고 강물에 띄우면, 뼈는 죽은 아기의 존재와 그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흔적이 된다. 강물은 뼈를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지만, 고토코의 행위는 그 죽음이 아무도 모르게 소멸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여자들은 위안소 안팎에서 죽음을 맞는다. 미치코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나코는 ‘위문 출장’을 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미치코의 자살은 위안소 내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몸의 죽음이고, 나나코의 죽음은 위안소 밖으로 나가는 것이 곧 해방을 뜻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위문 출장’이라는 말은 군대를 따라 여성의 몸을 이동시키는 성폭력 시스템의 작동을 평범한 업무처럼 바꾸어 부른다. 방과 칸막이로 고정되어 있던 성폭력 장치는 여자들의 몸을 전장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위안소의 경계 밖으로까지 확장된다. 위안소를 벗어난 나나코의 몸은 군수품처럼 전쟁터로 운반되고, 그곳에서 총에 맞는다.
“요코, 계집애를 낳으면 조센삐 시킨다.”는 위안소 주인의 말은 이 폭력이 현재의 여자들에게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태어날 아이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조센삐’가 될 운명을 부여받는다. 아이의 미래는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되고, 어머니가 겪은 성폭력은 딸에게 물려줄 운명으로 제시된다. 위안소라는 공장은 여성의 몸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여자아이까지 폭력의 다음 자리에 세운다. 그것이 재생산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폭력의 대상자가 될 또 하나의 자리와 역할이다. 여성의 출산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보호되지 않고, 폭력을 대물림하는 행위로 자리매김 된다.
『간단후쿠』에서 죽음은 성폭력 기계가 작동을 멈춘 뒤 남겨진 결과가 아니다. 팔려간 아기와 품에 안긴 뼈, 미치코의 자살과 ‘위문 출장’ 중 총에 맞은 나나코의 죽음은 삶과 죽음마저 위안소의 작동 안에서 거래되고 이동하며 처리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이 사라진 뒤에도 이름과 뼈, 노래와 소리는 흔적으로 남는다. 요코는 자신의 몸 안에 태어날 생명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레이코가 낳은 아기와 고토코가 안았던 뼈, 미치코와 나나코의 죽음, 그리고 함께 위안소에 있었던 여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안고 있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성폭력의 대물림과 재생산 폭력의 돌림노래를 기억하는 일이라면, 그 노래를 기억하는 것은 폭력 속에서 사라진 존재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이다. 기억은 지옥이기도 하고, 위령이기도 하다. 소설은 죽은 이들에게 완전한 목소리와 생애를 돌려주지 못한다. 대신 이름과 뼈, 사물과 소리를 서로의 곁에 놓아 그들이 어떤 폭력의 구조 속에서 사라져 갔는지를 드러낸다. 사물은 사람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다른 흔적들과 연결된다. 그 연결은 사람의 몸을 사물로 만들었던 폭력의 구조와 그 폭력을 반복시키는 장치의 작동을 드러낸다. 『간단후쿠』가 보여주는 ‘지옥의 조립도’는 사물화로 시작되어 성폭력 장치가 만들어낸 지옥 속에서 ‘간단후쿠’를 입고 있었던 몸과 그 몸에 가해진 폭력의 구조를 가시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