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상 : 다큐멘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폭력과 피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입니다. 과거를 어떻게 잘 재현해서 현재의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인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이 갖는 근본적인 질문일 겁니다.
궈 커 감독님의 <22>는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피해 생존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그분들의 마지막 순간의 어떤 모습들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와 같은 접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이 영상들은 다시 후대에 기록될 자료나 전문가의 발언과 함께 새롭게 재구성될 가능성을 남겼다는 점에서 소중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인 피사체로서 피해 생존자들 혹은 증언자들을 다루는 접근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증언자와 상호작용을 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피해자 혹은 증언자의 증언은 대상화가 되고 혹은 감상의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황미요조 : <22>는 중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근접해 클로즈업으로 얼굴을 담아내거나 반대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분들의 일상을 지켜봅니다. 간간히 인터뷰가 나오기는 하지만 어떤 큰 역사의 내러티브를 구축하거나 개인의 삶을 일관되게 구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중요하게 담고 있는 것은 피해자들의 현재 시간, 그 일상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 얼굴의 주름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유예된 시간, 동결된 시간 자체를 보여줍니다. 스물 두 분의 생존자 중 이제 일곱 분만이 남아 있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해왔고 이 역사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내러티브 구축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이 영화가 무엇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가지는 예의와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은경 : <22>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생존자들의 증언을 낱낱이 기록해 후대에 전승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히는 한편으로 ‘부재’를 환기시키는데요, 특히 ‘사라짐’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메모리 시대에 ‘위안부’ 기억은 이제 피해 당사자의 어떤 회상이나 증언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기억의 전승이라고 하는 것, 그들의 부재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내가 그것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창조적인 재해석을 통해 그 기억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았습니다.
🧶 소영현 : 기록과 기억의 대상이 피해 생존자로 한정된 경향에 대해서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시각화하는 순간 언제나 피해 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는데, 사실은 피해 생존자 말고 돌아오지 못한, 기록에도 남지 않은 수많은 피해 생존자와 피해자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죽었기에 기록도 안 되고,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많은 부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록할 것인가, 함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살아 돌아온 피해자,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 기록에도 남겨지지 못한 피해자와 피해 생존자를 위문하는 가족과 친척들, 돌아왔으나 트라우마적 과거에 갇히게 하는 사회를 폭넓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피해가 선명해 보인다고 해도 사실 피해와 가해는 구분되기 힘들거나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피해 생존자임을 밝히기 원하지 않는 가족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제 질문은 그 죽음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기록해야 하는가로 요약된다고 하겠습니다.
🧶 황미요조 : <보드랍게>는 기존 ‘위안부’ 재현 방식과는 다르게 김순악이라는 피해자의 삶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대구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 인권 활동가 인터뷰라든지, 드라마적인 애니메이션, 김순악의 생전 인터뷰와 일상생활 푸티지 들, 또 성폭력 생존자인 동시대 여성들에 의한 김순악의 증언 낭독, 그리고 화면 바깥에 화자가 전제된 연대기적 설명 자막과 사진이나 신문 기사처럼 정보 제공을 위해 화면 사이에 끼워 넣은 인서트용 아카이브 푸티지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김순악의 생애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층위의 재현 양식은 그동안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사용된 인터뷰나 보이스오버 위주의 ‘위안부’ 피해자 재현양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 김은경 :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김순악의 다양한 이름은 그녀를 어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고 또 단일한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복수의 김순악‘들’은 편하고 매끄럽게 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미투 운동 당사자들의 음성이 서로 중첩돼 울리는 가운데 열거된 그 이름들은 정말 듣는 청자가 천 개의 귀를 열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고, 이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름의 나열은 단지 김순악이라는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효과, 그러니까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인 상징, 어떤 ‘숭고한 피해자’라는 상징을 완전히 깨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영화는 ‘강제 동원된 일본군’위안부’ 대 매춘부 혹은 기지촌 미군 ‘위안부’’ 혹은 ‘인신매매된 순진한 기지촌 여성’ 대 ‘기지촌 여성을 착취하는 포주 마마상’ 등과 같은 이분법적 통념이나 피해자의 전형성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일부러 김순악이라는 굉장히 난해한 텍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정형화된 기억과 담론을 뒤흔들며, 여러 이름으로 살았던, 여러 목소리로 중첩되어 설명되는 그 김순악‘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재현 방식들, 그러니까 기존 다큐멘터리에서 해온 관습을 뒤로 하고 애니메이션과 미투 운동 당사자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관객이 김순악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미학적 선택은 ‘위안부’ 역사의 박제화에 저항하면서 관객이 함께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굉장히 훌륭한 미학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또 낭독자들은 김순악의 삶을 읽어내려 가면서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어루만지고 ‘아이고, 참 애묵었다’며 다독입니다. 김순악의 삶과 낭독의 얽힘은 낭독자들의 상처까지 보듬으며 ‘애먹었다’라는 말을 그들에게 돌려줍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연대하는 큰 울림을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 황미요조 : <내게서 출발한 배>는 아르헨티나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영화가 이루어지는데 특히 주인공인 멜라니는 ‘위안부’ 피해자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하며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 가정폭력을 당한 엄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립니다. 영화는 한국에 와서 ‘위안부’ 문제에 더욱더 심층적으로 다가가는 멜라니의 여정을 함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이렇게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과 동시대의 20대 젊은 여성의 삶 사이의 공명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보드랍게>와 공통 지점을 갖습니다.
하지만 <보드랍게>와 달리 우리는 <내게서 출발한 배>를 통해 피해자 황금주의 구체적인 삶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주의 삶을 구성하거나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 증언의 일부만이 목소리나 표정, 몸짓 같은 멜라니의 ‘몸’을 통해 파편적으로 제시됩니다. 한국에서 멜라니가 방문한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나 기록, 자료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황금주’의 삶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는 관객들이 멜라니를 비롯해 여성들이 서로 주고받는 감응적인 반응들을 바라봄으로써, 그 감응의 공동체에 참여해 일부가 됨으로써 ‘황금주’의 삶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어떤 억압에 대한 디아스포라의 삶일 수도 있고, 불안정한 20대나 가정폭력 피해자의 위치일 수도 있습니다. 황금주의 생애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제시되듯이, 그에 감응하는 주체들의 삶도 완결적이지 않습니다.
영화는 ‘황금주’부터 현재 디아스포라 20대 여성까지 연결하면서도 계속 어떤 빗금을 긋고 영화 안에 액자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자연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 있다는 것을 계속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누구의 삶도 일관되게 구성하지 않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감응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격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 소영현 : 기본적으로 ‘위안부’문제에서는 역사에서 지워졌던 피해와 피해자를 가시권으로 이끄는 일, ‘드러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피해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떻게 현재의 문제로 다룰 수 있는가도 고민해야 할 것이고요. 이런 점에서 오늘의 영화 3편은 다양한 재현 양식을 구현하고 있어 흥미롭게 봤습니다.
우선 일본군‘위안부’를 부인해 왔던 오랜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직접 증언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운동의 성격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 구축하게 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분하자면 <22>의 경우 피해 생존자 가시화 작업이 온전하게 요청되고, 거기에 긴급하게 반응해야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업이었습니다. <보드랍게>는 감독님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사건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개인의 삶이 삭제되어 버리고 역사적 증인으로 환원되어버리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한 점들이 굉장히 의미 있었습니다.
나아가 세실리아 강 감독님의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에서는 ‘위안부’문제 논의의 확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세 재현의 방식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진전된 작업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에 대한 기록 작업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용자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문제는 수용자가 계속 바뀐다는 겁니다. 또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꽤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수용자의 가변성을 고려할 때 그것에 맞춘 재현의 방식이 반복적으로 지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공적 기억의 지형 변화에 대한 고려가 좀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억 투쟁 과정에서 피해와 피해 경험이 ‘있었음’을 부정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과거에 이미 다 보여줬으니까, 드러냈으니까 지나간 거고 이후에는 다른 방식의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의로 나아가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의 재현 방식에 대한 대안적이고 보완적인 작업으로 볼 수 있을 <22>와 <보드랍게>의 작업이 말해주듯, 그런 의미로 피해-증언의 복원과 피해 경험자의 복원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그 자체로 보족(補足)적 작업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