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 45년간 속죄를 실천한 일본 전범들

  • 비평
  • 김수용
  • 2026-05-14
가해자는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 45년간 속죄를 실천한 일본 전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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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 45년간 속죄를 실천한 일본 전범들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전 일본군 병사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는 공개적으로 일본군의 가해 행위를 증언하고 사죄했다. 이를 통해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의 조직적인 계획과 집행 하에 이루어졌음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중국에서 귀환한 전 일본군 병사들이 모여 만든 반전·평화운동단체인 ‘중국귀환자연락회’ 회원인 이들은 나아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서 긴 시간 우익과 역사수정주의에 대항하며 평생 자신들의 가해를 일관되게 증언하고, 최선을 다해 사죄했다. 이들의 활동은 가해자가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 마주하고 실천했는지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던진다.

 

 

가해를 공개 증언한 전 일본군 병사

2000년 12월 10일, 일본 도쿄의 구단 회관. 이곳에서 전직 일본군 병사 가네코 야스지(金子安次)와 스즈키 요시오(鈴木良雄)가 자신의 가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8일부터 닷새간 열린 이 자리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국제법정)으로,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20세기를 마무리하려는 취지 아래 개최된 민간 차원의 국제인권법정이었다.

과거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해 연합국이 ‘도쿄 전범재판(1946~1948)’을 진행했지만, 아시아인들에게 자행된 성폭력과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한국(남북공동기소단포함),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 10여 개국의 피해자와 NGO, 국제법률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개최한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바로 그 과오를 바로잡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이 법정에는 ‘위안부’ 문제의 살아있는 증거인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 당사자인 전 일본군 병사들이 공개 증언에 나섰다. 이들은 전쟁 당시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관여했던 경험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며,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의 조직적인 계획과 집행하에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밝혔다.

수많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세상에 나왔지만, 가해자의 증언은 드물었다. 이는 과거 도쿄 전범재판이 전쟁 책임을 일부 군 지도자에게만 한정해 단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마저 일본에 관대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면서 가해 책임은 흐릿해졌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일본인은 자신들이 침략전쟁에 가담한 가해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났고, 오히려 군국주의 지도자와 연합국에 의한 피해자로 여기는 ‘이중의식’을 가지게 됐다. 이러한 전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가해자가 스스로 죄를 밝히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는 침묵하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큰 울림을 준 이들이 바로 ‘중국귀환자연락회(中国帰還者連絡会. 이하 중귀련)’의 회원이라는 사실이다. 중귀련은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전범재판을 받고 1956년 본국으로 귀국한 일본인들이 결성한 반전·평화운동단체이다. 1957년 출범부터 2002년 해산까지, 이들은 45년 동안 줄곧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증언하며 사죄를 이어왔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의 증언 또한 그 활동의 일환이었고, 조직 해산 2년을 앞두고 이뤄진 거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꼽히는 중귀련의 회원들은 어떻게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사죄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사진 1]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직접 가해 증언을 하는 전 일본군 병사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는 중귀련 회원이었다. 사진은 2001년 3월 발간된 계간 『중귀련』 제16호에 수록돼 있다. (출처: 중귀련평화기념관)

 

 

신중국의 정치적 실험, ‘관대한’ 전범 처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났으나, 1950년까지 ‘국공내전’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BC급 전범재판이 1950년 이전에 대부분 마무리된 것과 달리, 신중국의 전범재판이 1956년에야 열린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여기에는 냉전이 강화되는 국제적 상황에서 내전을 끝내고 새롭게 성립한 공산당 정부(신중국)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서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한편, 전쟁 막바지인 1945년 8월 9일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한 소련은 약 60만 명의 일본군 포로와 군속을 억류해 전후 재건을 위한 노동력으로 이용했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라 불리는 이 사건은 가혹한 환경 탓에 6만 명 이상이 사망해 일본의 대표적인 전후 피해서사로 자리잡았다. 생존 포로 대부분은 1949년 이전에 송환되었으나, 전범 용의자 2,467명은 소련에 남겨졌다. 이 가운데 중국 관련 전범 용의자로 분류된 969명은 1950년 중국으로 이관되어 푸순 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다. 신중국으로의 전범 이관은 소련 스탈린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국공내전 시기 국민당을 지원했던 일을 사과하는 의미이자, 중국이 직접 전범재판을 열어 새로운 정권의 주권을 확인하고 유엔의 승인을 얻는 데 이용하라는 배려였다.

푸순 전범관리소의 생활은 전범들이 예상한 것과 매우 달랐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기도 했던 관리소 직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관대했다. 국제법과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했을 뿐 아니라 양질의 식사를 충분히 제공했고, 노동조차 강제하지 않았다. 대신 전범들은 죄를 인정하는 ‘인죄(認罪)’와 숨김없이 털어놓는 ‘탄백(坦白)’이라는 고통스러운 학습과 반성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이들은 피해자의 처지에서 죄의 무게를 느끼고, 거대한 전쟁 구조 속에서 자신의 죄가 갖는 의미를 깨닫도록 요구받았다. 충분한 사색과 학습의 시간은 일본 전범들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철저한 인죄와 탄백의 과정을 거친 후, 신중국에 수용된 1,000여 명의 전범 중 재판에 넘겨진 이는 단 45명뿐이었다. 기소된 이들조차 사형이나 무기징역 없이 8~20년의 유기징역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신중국은 단순히 단죄를 넘어, ‘관대한 재판’과 ‘인죄’를 통해 자신의 죄를 평생 속죄하는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철저한 성찰의 경험은 이들이 평생 가해 사실을 증언하며 반전·평화운동을 지속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사진 2] 중귀련의 첫 출판물인 <삼광(三光)>(1957) 표지(좌)와 1997년 6월에 나온 계간 『중귀련』 창간호 표지(우)

 

 

중귀련의 속죄와 반전·평화 운동 실천

1956년, 기소된 45명을 제외한 전범 대다수가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귀환 직후 조직 결성에 돌입해 이듬해인 1957년 중귀련을 결성했다. 이후 2002년, 회원들의 고령화와 사망으로 불가피하게 조직을 해산할 때까지 무려 4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반전·평화와 중·일 우호의 기치 아래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중귀련이 특히 중점을 둔 것은 ‘출판’과 ‘증언’ 활동이었다. 그 출발점은 1956년 조직 준비 단계에서 출간된 『삼광(三光』이라는 책이었다. 『삼광』은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진행된 인죄 학습과정에서 전범들이 자신의 범죄 행위를 최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작성한 글의 일부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전후 10년이 지나 전쟁의 참상이 희미해져 가던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삼광(三光)’은 ‘모두 죽이고, 불태우고, 빼앗는다(殺光·焼光·搶光)’는 뜻으로, 중국 화베이(華北) 지역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항일 근거지 소탕 작전 당시의 참상을 묘사한 것이다. 발간된 지 두 달 만에 약 20만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우익단체의 공격을 받아 절판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중귀련은 이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가해 증언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인식하고 이후 출판과 증언 활동을 병행해 나갔다.

중국 인민에 대한 속죄 방법을 고심하던 중귀련은 중국인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 발굴과 송환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중귀련 회원 상당수가 군인, 헌병, 만주국 경찰 출신이었기 때문에 노동자 강제 동원, 소위 ‘토끼사냥(兎狩り) 작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명령으로, 또는 직접 참여한 작전으로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고, 그 유해마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현실을 대면한 중귀련 회원들은 피해자 유골 송환 작업을 통해 반성과 사죄를 이어 나갔다. 이는 신중국의 관대한 처분을 받아 귀환하던 도중에 다짐한 “실천을 통해 죄를 갚아 나가겠다”는 맹세의 실천이었다.

1958년 2월에는 홋카이도 산속에서 류렌런(劉連仁)이라는 중국인이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노무자사냥’으로 납치돼 홋카이도의 메이지광업(明治鉱業)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류렌런은 극심한 학대와 굶주림으로 1945년 7월 탈출한 후 일본의 패망 사실도 모른 채 산속에 숨어 살다 무려 13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존재는 중귀련 회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자신들에 의해 일본에 보내졌을지도 모르는 강제동원의 상징적 인물, 류렌런과의 조우는 귀환한 중귀련 회원들에게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피해자의 실상을 생생하게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귀련은 류렌런으로 상징되는 강제동원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와 책임의 수단으로 중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송환 사업과 ‘전시 중국인 포로 순난자 명부’ 작성에 적극 협력했다.

 

[사진 3] 푸순 전범관리소의 도서실에서 책과 신문을 읽으며 학습 활동을 하고 있는 전범들 모습 (출처: Cri online 웹사이트)

 

[사진 4] 1956년 열린 신중국의 BC급 전범재판 특별군사법정 현장 모습이다. (출처: 중귀련평화기념관)

 

 

‘위안부’라는 새로운 피해자와의 조우

오랜 시간 활동이 지속되면서 중귀련이 인식한 피해자의 범위도 점차 확장되었다. 단적인 예가 일본군‘위안부’ 관련 활동이다. 중귀련의 ‘위안부’ 관련 첫 활동은 1992년 8월 16일 신토미(新富) 구민관에서 개최된 <종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증언·학습회>였다. 이 증언·학습회는 중귀련이 자체 기획한 것이 아니라 ‘위안부’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니시 노루미코(西野留美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위안부’ 관련 증언을 취재하기 위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귀련 최초의 ‘위안부’ 관련 활동이 외부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전쟁 직후 ‘인죄’의 대상으로 삼았던 범죄가 ‘중국 인민’에 대한 ‘침략행위’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범재판 당시 작성된 자필진술서에도 ‘강간’ 등 전시 성폭력의 범주 안에 ‘위안부’ 증언이 간간이 포함되어 있으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이나 중국을 제외한 식민지 여성들의 피해에 대한 인식은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니시 노루미코의 요청으로 증언·학습회가 열린 직후, 중귀련 회원들을 대상으로 1년에 걸쳐 ‘종군위안부 조사카드’를 수집했지만, 응답자는 42명, 전체 회원의 약 15%에 그쳤다. 이처럼 낮은 응답률은 ‘위안부’에 대한 회원들의 인식 부족과 함께 전시 성폭력에 대한 증언이 여전히 조심스러웠던 상황을 반영한다.

 

 

역사수정주의와의 대결

중귀련이 보다 본격적으로 ‘위안부’ 및 전시성폭력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역사수정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기관지인 『계간 중귀련』을 창간하면서 부터이다.[1] 1990년대 중반 자유주의사관이 등장하면서 ‘위안부’ 문제와 『삼광』으로 대표되는 중귀련의 가해 증언은 ‘자학사관’이라 비판되었다. 중귀련은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의 왜곡에 시의성 있게 대응하기 위해 『계간 중귀련』을 창간했고,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계간 중귀련』에 게재된 글 중 중국 침략전쟁과 관련된 사건을 제외하면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주제는 ‘위안부’ 및 전시 성폭력 문제였다. 중귀련은 『계간 중귀련』의 기사를 통해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피해자들의 투쟁을 알리는 데 힘썼다. 역사수정주의에 맞선 이런 활동은 중귀련 회원들 스스로의 학습 과정이기도 했다.

 

<표 1> 「계간 중귀련」에 실린 ‘위안부’ 관련 기사

 

<표 2> 「계간 중귀련」에 실린 전시 성폭력 관련 기사

 

[사진 5] ‘위안부’ 문제와 전시 성폭력 관련 특별 기사가 수록된 『계간 중귀련』 5, 6, 41호 표지 이미지들이다.

 

 

‘들어줄 귀’ 없는 전후 일본에서 다시 선 ‘가해자’의 자리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이루어진 가해자 증언은 중귀련의 ‘위안부’ 관련 활동이 도달한 하나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은 일본 대중에게 온전히 닿지 못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다룬 NHK 다큐멘터리에 가해진 정치적 외압, 이른바 ‘NHK 개찬(改撰) 사건’으로 인해, 전 일본군 전범 가네코 야스지와 스즈키 요시오의 증언 장면이 검열·삭제되었던 것이다. 1957년 『삼광』 출판 당시 우익의 공격에서 드러나듯이, 전후 일본 사회는 중귀련 회원들의 가해 증언을 끝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없는 일본 사회에서 평생 가해 증언과 반전·평화운동을 이어 온 중귀련 회원들의 마지막 무대 역시 전범 법정이었다. 가네코와 스즈키는 1956년 당시 신중국 정부로부터 기소 면제 처분을 받아 중국의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귀환한 지 4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은 셈이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일본 검사단 히가시자와 야스시(東澤靖) 변호사는 신문이 끝난 후 가네코와 스즈키에게 각각 이렇게 물었다.

 

🧶 히가시자와 : 이런 증언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 가네코 : 푸순에서도 강간한 일은 깊이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강간이란 일은 밖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문제였고, 관리소에서는 증거가 없는 문제는 추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간 같은 일은 잠자코 있으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인간으로서 양심이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고백했지만, 이게 좀 정말 잔인한 문제거든요. (중략) ‘위안부’였던 분들이 나서서 이 문제가 제기됐을 때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전쟁에서 ‘위안부’의 실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 이건 말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전우회 친구들은 말하지 않을 거예요. 입을 다물어 버려서, 나이도 많고, 체면도 있고…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을 실행한 우리밖에 할 수 없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살아있는 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 히가시자와 : 스즈키씨에게 증언한다는 것은 사죄(償い)의 의미일까요?

🧶 스즈키: : 그렇습니다. 사죄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사과는 중국에서 쓴 진술서가 끝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단계일 뿐이니까요. 죽을 때까지 우리의 ‘인죄’는 계속됩니다. 사과해서 끝날 문제는 아니지만, 사과는 해야 한다고 대체로 중귀련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에 역행하는 시대에 더 소중해지는 중귀련의 정신

평생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다시 가해자의 자리에 선 두 사람의 답변에는 중귀련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푸순에서의 가해 고백으로 인죄가 끝난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서도 끝나지 않는 일이라는 중귀련 회원들의 공통적인 감각이 드러난다. 그들은 “살아있는 한 그대로의 사실을 계속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고자 했다. 이는 중귀련이 전후 책임을 일회적 반성이나 사죄의 선언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어가야 할 ‘끝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각주

  1. ^ 『계간 중귀련』은 1997년 6월 1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2021년 10월까지 24년간 총64호가 발간되었다. 창간호~15호까지는 중귀련이, 16~64호는 후속단체 ‘푸순의 기적을 계승하는 모임’이 발행했다.

 

 

  • 글쓴이 김수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군 ‘조선인’ 포로, 신중국의 일본인 전범 등 일본의 전쟁기억에서 불가시화된 존재들에 관한 연구와 번역을 병행하고 있다. 번역공동체 ‘잇다’의 일원으로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마을을 불살라 백치가 되어라』,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인신매매』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