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 is a group effort”.
20여 년 전, 헤이그 NGO 국제평화회의장 한구석에 걸려있던 현수막에서 이 말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분단이라는 군사적 긴장 관계 속에서, 협정이 체결되면 평화가 ‘정착’된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을까. 평화란 법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던 나에게 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평화가 어떤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의 노력”이라니! 말문이 트이는 것 같은 쾌감과 함께 새로운 난제에 맞닥뜨린 듯한 마음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집단적 노력이라는 사회적 과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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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는 여성가족부의 후원하에 오는 10월 13-14일 양일간 일정으로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이하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컨퍼런스는 집단의 노력으로서의 평화는 결국 여성을 비롯한 타자들의 인권과 맞닿아있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사법 정의의 문제, 전쟁의 성별성(gender)과 평화교육, 기억이라는 정치의 문제를 심도 있게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과거를 아는 것과 과거에 대해 해석하는 현재라는 맥락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현재의 지표라는 점에 주목하는 논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이슈가 논의될 때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의 한 가지가 배상과 사죄, 그리고 명예 회복이라는 말이다. 여성학자 김정란은 성폭력 상황에서 “명예롭지 않은 유일한 당사자는 가해자”라는 점을 상기하며, 성폭력을 “여성의 명예 실추와 연관시키는 사고방식”의 “후진성”을 역설한다. “성차별적 사고는 상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수치심을 피해자에게 떠넘김으로써 가해자 처벌의 기회를 축소할 위험”마저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명예 ‘상실’을 전제함으로써 이미 그들이 담보하고 있는 존엄과 명예를 오히려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한다. 일상에서 숨을 쉬듯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게 간주 되어 온 인식이 얼마나 반여성적인 폭력일 수 있는지 제기하는 그의 시선은 시사적이다(김정란, 경향신문 2020년 6월 24일, 기고,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
사전에는 명예(名譽)란, “자기의 도덕적, 인격적 존엄에 대한 자각 및 타인의 그것에 대한 승인과 존경”이라고 나와있다. 이름 명(名), 기릴 예(譽)라는 한자의 조합, 누군가의 이름을 기린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누가 누구의 이름을,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리는가. 강물이 흐르면 강기슭의 형상이 변화하는 것처럼 사람의 이름을 기리는 명예라는 가치 또한 시대 인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명예는 고정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명예의 회복과 미회복의 경계를 결정짓는 것은 타인과 ‘나’와의 관계, 즉 사회의 의식이다.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는 칼럼의 제목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논의의 틀 자체, 즉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당위로서 여겨지는 성차별적 전제를 문제 삼고 있다. 컨퍼런스 기조 발제를 맡은 크리스틴 친킨은 “젠더 정의는 성인지적 차원에 대한 관심을 요구할 뿐 아니라 성과 인종, 식민주의와 계급 문제에 기반한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를 시정하려고 노력한다”고 논한다.
“차별과 억압의 교차점에 있는” 피해와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차별과 억압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화 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가시화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겨우 그 실상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중심으로, 피해자가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문제, 혹은 상처라는 흔적을 ‘어떻게’ 다룰 것 인가라는 질문은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접근법을 집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컨퍼런스 3부에서 토론을 맡은 도미야마 이치로는, 경험이란 공유해야 할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의 시작”이라 역설한다. 이러한 관계성, 사회성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을 통해서 억압이라는 기존의 상황은 다른 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명예는 선험적으로 회복 혹은 미회복이라는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하여 비로소 그 윤곽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1990년 한겨레신문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연재를 통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윤정옥은 “종전이 되고 나서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우리들이 잊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 죽은 셈”이 되었다고 언급하며, 그들을 “잊었”던 우리 사회의 유기(遺棄)의 시간에 대한 내성적 논의를 촉발시켰다(오키나와타임스, 1992년 3월 4일). 2011년 한국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방치한 것은 피해자의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하는 “위헌 행위”라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늦게나마 우리가 “잊었”던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을 법의 언어로 명시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정의와 평화의 물결을 잇다>라는 컨퍼런스 주제는 이러한 겹겹의 쟁점을 다각적인 고찰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보호의 대상으로서 ‘꽃’과 ‘할머니’라는 표상, 혹은 강제냐 자발이냐를 다투는 이분법적 논의는 고통의 체험을 딛고, 혹은 그 고통과 더불어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온 이들을 존중하는 논의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문제가 다루어지는 형식과 위상을 재고한다면, 평시와 전시가 연동하는 의례로서의 전시 성폭력 문제는 ‘배상’과 ‘사죄’로만 환원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인 ‘위안부’ 이슈는 외교 관계를 통해 ‘해결’되어야할 사안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숙의(熟議) 과정을 통해 “집단의 노력”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진행형의 과제이다.
여성문제다, 민족문제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문제이면서 민족 문제”라는 점을 어떤 방식으로 논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직하자.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 https://www.icwrp2021.com
기사 게재일: 20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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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전 도시샤대학교 조교수(전공: 일본학, 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