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Posts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 Created at2020.12.03
  • Updated at2022.11.28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전시 성폭력을 처벌하지 않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를 세상에 알리고, 이 제도에 대해 일본군 상부층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으며,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민중 법정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은 아시아 전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일본은 군의 위안소 설치에 관해 국내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금지했고, 일본군이 패전 당시 '위안부' 제도, 위안소 설치 및 운영과 관련된 자료를 소각했기 때문에 그 실태는 계속 은폐되어 왔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몇몇 증거가 제출되었지만, BC급 전범 재판에서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 여성들의 피해는 다뤄지지 않았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일본 정부와 군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가 드러나고 일본 정부의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1991년 8월 14일,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가 공개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각국의 피해 여성이 잇따라 증언을 하였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제소한 10건 중 8건에 대해 사실이 인정되었지만, 국가무답책(国家無答責) 법리나 제소 기간, 양국 간 평화조약 등으로 인해 이미 해결되었다는 판결이 내려져 원고의 청구는 모두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많은 증언과 자료가 모였고 '위안부' 제도가 성노예 제도이며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전쟁 범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聖戦)'으로 포장하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도리어 '위안부' 문제를 다시금 은폐·봉쇄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교육'과 '언론보도'에 개입해 국민의 의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역사수정주의자와 우익 단체는 '위안부' 지원 활동을 반대하는 로비와 공격을 계속하고 피해자에 대한 비방과 함께 거짓 정보를 지속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암살자'들에게 분연히 맞서기 시작한 사람들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며 전시 성폭력의 근절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호소해온 일본과 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고 대다수가 고령이 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남은 수명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다가 결국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위안부' 피해자 지원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짚어가면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이케다 에리코 (사진 제공 : 이케다 에리코)


NHK PD로서 다루었던 '위안부' 문제

나는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NHK에서 37년간 PD로서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베트남 반전운동과 일본의 전공투(全學共鬪會議, 1968~1969년에 걸쳐 일본의 각 대학에서 학부와 당파를 뛰어넘어 결성된 연합체-옮긴이)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미디어가 권력을 가진 이들의 관점에서 시민과 학생, 여성들의 운동을 보도하고 있다는 데 의문과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미디어를 내부에서부터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NHK에 입사해 전쟁, 여성, 인권을 주제로 여러 편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같은 전쟁을 다룬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미군의 오키나와 대공습이나 원폭 피해, 전쟁 이후 중국에 잔류한 고아들의 문제 등 일본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제작할 때는 취재 활동이 고달픈 것 외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나 주민 학살 등 일본의 가해 사실에 초점을 맞췄을 때는 방송이 되기까지 많은 방해에 부딪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을 때였다. 나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NHK에서 1991년 6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ETV 2001 시리즈》를 비롯해 8편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방송을 제작했다. 하지만 우익의 반대가 커지면서 1997년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프로그램의 기획은 전부 무산되었다. 결국 '위안부' 문제는 '난징대학살',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과 함께 NHK에서는 암묵적인 '3대 금기' 아이템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NHK의 PD로서 방송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한편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위안부' 피해자와 전 일본 군인들의 증언 등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시민단체 '비디오 학교'를 조직했고, 중국 산시성(山西省) 출신 성폭력 피해자의 재판을 지원하는 단체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여성 선배 저널리스트로서 존경해 왔던 전 아사히신문 기자이자 여성 인권 활동가 마쓰이 야요리 씨로부터 2000년 여성법정의 주최 단체인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활동에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1998년부터는 2000년 여성법정의 국제 실행 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제안부터 실현까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제기한 재판에서 연이어 패소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가해국인 일본의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마쓰이 야요리 씨가 여성들이 모여 민중법정을 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아이디어는 일본 여성들, 각국의 피해자와 이들을 지원하는 이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법정은 2000년 12월에 개최되었지만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국제 실행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국제 실행 위원회에서는 수석 검사와 판사단을 선출하는 한편 '법정 헌장'의 초안도 마련했다. 또한 각국 검사단은 기소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실행 위원회는 각국의 기소장 작성을 위한 조사와 영상 기록, 번역 등의 작업을 진행했고 일본군 관련 자료 수집과 전문가 증인 선정에 나섰다.

동영상 기록 팀의 일원이었던 나는 법정에 증거로 제출할 증언 영상을 제작하거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를 찾는 등 NHK에서의 근무 시간 이외의 대부분을 2000년 여성법정 준비에 바쳤다.

법정 실행 위원들은 끼니도 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혼신을 다해 2년 반 동안 법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직장생활과 2000년 여성법정 활동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일에 동시에 매달리면서 쌓인 과로 탓일까, 나는 법정 개정을 2개월 앞두고 지주막하 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바로 병가를 썼고 다행히도 3개월 후에는 후유증 없이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병가 기간 중 시작된 2000년 여성법정에 비디오 학교의 멤버로 참가하여 12월 8일~10일의 본 법정과 12일의 예비 판결을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2000년 12월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8일에 본 법정이 개정했다. 8개국의 '위안부' 피해자 64명을 비롯해 세계 30개국에서 연일 1,000여 명의 방청객이 모여들었다. 증언대에서 몸소 겪은 처참한 피해를 증언한 각국의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얼마나 여성의 존엄을 짓밟고 인생 자체를 파괴했는지에 대해 호소했다.

피해자 64명의 증언은 한결같이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또한 직접 법정에 나와 자신이 전장에서 강간을 저지른 사실과 위안소에 드나들었던 사실을 증언한 두 명의 전 일본군 병사에게는 방청석으로부터 감사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여성법정에서는 각국의 검사단이 제출한 기소장과 방대한 양의 증거 자료, 전문가 증인에 의한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의 책임론 등을 토대로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책임자 10명이 기소되었다.

그리고 2000년 12월 12일 '히로히토 천황 유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제도로 인해 가해진 피해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는 판결 개요가 내려졌을 때 법정 전체가 큰 감동에 휩싸였다. 피해 여성들은 "정의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았다"면서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법정 개최 준비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실행위원회 멤버들도 '세계사에 남을 역사적인 순간이다'라는 벅찬 감격과 자랑스러움이 가슴 가득히 차올라 법정을 준비하며 쌓인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2000년 여성법정
언론보도에 정치권이 개입하다

2000년 여성법정의 성공적 마무리 이후 우리는 법정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언론보도라는 문제에 맞닥뜨렸다.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하러 온 해외 미디어는 95개사로, 취재 신청자 수는 200여 명에 달했고 법정 소식은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일본 내에서도 48개 언론사에서 105명의 기자가 취재차 왔으나 대부분의 기사 논조가 소극적이었고 법정 소식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요미우리 신문은 법정 소식을 단 한 줄도 싣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히로히토 천황 유죄' 판결을 주요 기사로 다룬 곳은 아사히 신문과 홋카이도 신문 2개사뿐이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2000년 여성법정을 무참하게 날조해 보도한 'NHK 프로그램 개찬(改竄,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일부러 고침) 사건'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단계에서부터 취재해 왔던 NHK의 프로그램 《ETV 2001》에서 2001년 1월 30일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통해 여성법정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 방송에서는 법정 기소장의 내용도, 판결문의 내용도 전하지 않았을뿐더러 법정에 선 피해자들의 증언은 극히 일부만 소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취한 이 방송은 '지리멸렬'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바우넷 재팬과 마쓰이 야요리 대표는 바로 NHK에 항의하며 질문지를 보냈지만,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NHK와 관련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나도 이 소송의 원고로 합류했었다.

NHK를 상대로 한 소송의 도쿄 고등법원 제2심의 결심 전인 2005년 1월, NHK 소속직원의 내부고발이 있었다. 2000년 여성법정 당시《ETV 2001》 프로그램의 데스크였던 나가이 사토루가 방송 직전에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장관 등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 날조되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나가이 사토루의 내부고발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몰고 왔다. 도쿄 고등법원은 결심 기일을 늦췄고 NHK 관계자에 대한 증인 심문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정치권이 방송에 개입한 실태가 차례차례 까발려졌다. 2007년에 도쿄 고등법원은 피고 NHK가 정치인의 의도를 헤아려 방송을 조작했다며 원고에게 200만 엔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2008년, 대법원은 방송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원고 패소라는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NHK는 지금까지도 정치권의 방송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검증 프로그램도 제작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NHK 프로그램 개찬 사건'의 전말이다.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사실과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묻으려는 정치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의 압력에 굴복한 미디어의 민낯이 세상에 드러난, 일본 패전 이후의 방송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다. 자율 규제와 자숙, '촌탁(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으로,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한다'는 뜻의 일본어 표현, 편집자 주) 문화'가 만연한 작금의 일본 미디어의 쇠락을 암시하는 불길한 조짐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와 언론뿐 아니라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사람들도 공포에 떨게 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날조된 가짜 프로그램에 의해 2000년 여성법정이 부당하게 낮은 평가를 받거나 오해를 받을 우려도 있었다. 나는 《ETV2001》방송을 본 후 2000년 여성법정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을 한시라도 빨리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병가를 마치고 막 복귀한 직후였기 때문에 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고된 업무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방을 빌리고, 편집기를 구입하여 비디오 학교의 동료들과 합숙하며 2000년 여성법정을 알리는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들어갔다. 2개월 후 《침묵의 역사를 찢고 –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6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완성했고 2000년 여성법정 보고 집회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판도 제작해 국내외 시청자를 늘려왔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계몽 활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도쿄에서 여성법정이 개최된 이듬해인 2001년 12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2시간에 걸쳐 낭독된 최종 판결문에는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지도자 10명에 대한 유죄와 일본 정부의 국가 책임이 명기되었다. 이 판결문은 곧바로 일본 정부와 궁내청으로 전달되었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NHK퇴직자와 저널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는 'NHK와 미디어의 지금을 생각하는 모임'에서는, 도쿄 시부야에 있는 NHK방송센터 현관 앞에서 NHK에 대한 비판과 항의를 계속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3월 22일 (사진 제공 : 이케다 에리코)


전시 성폭력 근절을 향한
투쟁과 평화의 실현

2000년 여성법정이 국제 사회와 국제법에 끼친 영향은 컸고,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나 국제형사재판소(ICC)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2000년 여성법정 이후 전시 성폭력 책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민중 법정의 시도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2010년 3월에는 과테말라와 미얀마에서 민중 법정이 열렸고, 구 유고슬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도 지속적으로 가해자 처벌 방안을 모색했다. 콩고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치료하고 지원해 온 의사 드니 무퀘게, 이라크에서 IS의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당시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나디아 무라드가 201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실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책임자 처벌의 움직임이 전세계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2000년 여성법정은 세계 각국에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와 가해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고 이를 공개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이라는 새로운 바람 역시 불러일으켰다. "망각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저항이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민중의 무기다". 이러한 말처럼 전시 성폭력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시 성폭력 피해와 가해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세워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하 WAM)'은 그 같은 성과 중 하나였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하는 동안 실행위원회 구성원들은 "언젠가 일본에 '위안부'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라는 의견을 모았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자료관 개설은 '꿈 같은 이야기'였으나, 엄청난 속도로 여성법정 이후 5년 만인 2005년에 WAM을 개관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법정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마쓰이 야요리 씨 덕분이었다. 마쓰이 씨는 2002년 여름에 담관암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의 전 재산과 소장 자료를 '위안부' 자료관을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해 12월에 별세했다.

마쓰이 씨의 유지를 받아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자료관 건설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각지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을 시찰하면서 어떠한 박물관을 만들 것인지 의논하고, 자금을 모으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나는 건설 위원장을 맡아 또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WAM은 2000년 여성법정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위안부' 제도 관련 자료를 수집, 공개, 보존하는 장소로서 2005년 8월에 도쿄에 개관했다. 그리고 매년 아시아 국가별로 개최하는 '위안부' 특별전을 거듭하면서 아시아 전역에 걸친 피해자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 일본군 측의 공문서,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 등을 대부분 수집할 수 있었다. 약 5년 전부터는 아카이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방대한 양의 자료를 정리하고 추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WAM과 같은 '위안부' 자료관은 한국 각지와 필리핀, 중국, 대만에 잇따라 세워지고 있다.

2016년 11월 7일 왐(WAM)을 방문한 이용수가 왐 사무국 직원과 운영위원들, 미국 CWJC('위안부'정의연대) 멤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이케다 에리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2000년 여성법정으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위안부' 피해생존자도, 가해 증언을 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도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피해자가 원하는 사실의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 개인에 대한 배상 등을 실현하도록 요구하고, 동시에 이러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기록과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할 책무가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인과 미디어의 발언은 엄중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또한 장기간 집권한 아베 정권 하에서 '위안부' 문제가 한일의 내셔널리즘이 대립하는 정치 문제로 다뤄진 것도 큰 문제이다.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피해자들을 강제로 연행했는지 여부에만 초점을 두거나, 폭언과 거짓 정보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자체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민족, 여성, 계급에 대한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일본 사회의 실상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선 몇 세기동안 성매매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패전 이후 공창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성매매 산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남성들의 성매매가 빈번히 발생하는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다. '위안부'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의식과 성행동을 돌아보지 않은 일본 남성과 그러한 남성들을 허용해온 일본 여성들 속에서 지속된 일본의 성 풍토 자체도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에게 던져진 과제는 크고 무겁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미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지 반 세기가 지나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사망하였고, 그 유지를 이은 다음 세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와 연대하면서 '기억의 암살자'들의 공격에 대항하고 '위안부'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위안부'를 부정하는 '기억의 암살자'들과의 투쟁은 곧, 전쟁으로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파시즘 정권과 그에 동조하는 매스미디어와의 투쟁이기도 하다. 세계의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평화를 실현하고, 전시 성폭력의 근절을 위해 노력하는 지속적인 투쟁이 오늘날의 일본을 변화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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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1950년 일본 도쿄 출생. 1973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후 제작국 PD로 NHK 입사. 재직 당시 "오하요 저널(おはようジャーナル)" 「ETV 특집」 「NHK 특집」 등에서, 여성·교육·의료·인권·복지·일본어·아시아 태평양 전쟁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1990년대는 약물피해, 에이즈, 동티모르의 인권 침해, '위안부' 문제 등을 중심으로 다뤘다. 2006년부터 NHK 자료실에서 연간 100여 편의 공개 프로그램 선정 및 이벤트 기획을 담당하다가 2010년 8월에 정년퇴직했다.

1997년부터 영상을 만드는 단체인 '비디오 학교(ビデオ塾)'를 조직하여 '위안부' 피해자나 일본군 병사의 영상을 기록했다. 중국 산시성의 성폭력 피해자의 재판 지원과 의료 지원도 계속해 왔으며, 실행위원으로서 2000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 개최 준비에 참여했다. 2005년 '여성법정'의 정신을 이어갈 왐(WAM)이 개관하기까지 건립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NHK를 은퇴한 2010년부터 WAM 관장을 역임했다가 2018년부터 명예 관장을 맡고 있다.